소설리스트

74화 (74/137)

74화.

이딘은 ‘그분’의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제국의 황녀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성녀가 대적자였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이딘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최대한 공손하게 무릎 꿇고 있었다.

그분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이딘 정도의 위치여야만, 직접 계시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종이여.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힘. 이딘은 작게 몸을 떨었다.

이 힘 때문에 이딘은 ‘그분’을 의심하지 않았다.

고작 소드 마스터 따위와는 비견될 수 없는 힘이었다.

-의심하지 말라. 대적자는 한 명의 몸을 빌릴 수도, 수천 명의 몸을 빌릴 수도 있다.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그는….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언제나 가장 근엄하고, 평정심을 지켰던 ‘그분’이었기에, 이딘은 놀랐다.

그만큼 대적자가 잔악무도한 놈이라는 뜻이겠지.

-그는 이미 한 번 나의 대계를 망친 적이 있노라.

이딘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동시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강한 분의 대계를 막을 수 있을 정도라니. 대적자의 힘은 도대체….

‘알겠습니다. 절대로 방심하지 않겠습니다.’

이딘의 확언에, 주변에서 요동치던 힘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았다.

-나의 종이여. 너를 믿노라. 대적자만 완전히 죽인다면, 네가 원하는 그 힘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황녀 전하?”

그때, 누군가가 회상에 빠져 있던 이딘을 불렀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녀의 옆에 있던 대주교였다. 이딘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 중 하나였다.

이딘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없다. 축성 준비는 모두 완벽한 거겠지?”

“예. 걱정 마십시오. 교황 성하께서 사용하실 성수는 그냥 성수가 아닙니다. 무려 400년 전에 성인께서 직접 축복을 내리신 성수니까요. 제아무리 강한 마족이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녹아 버릴 겁니다. 마왕급이 아니고서야.”

이딘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 대적자가 보통 강한 게 아니라니 걱정이군. 전생에서도 그 대적자가 ‘그분’을 이길 수 있었던 건 계약한 마족이 보통 마족이 아니라서였으니까.”

“그분께서도 그 마족의 정체는 모른다고 하십니까?”

“어찌나 힘과 진명을 잘 숨겼던지, 그 정체를 알아내는 데엔 실패하셨다더군. 그러니 이번에는 꼭 알아내야 해.”

기필코 이번 작전은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분이 약속한 ‘힘’을 받아 낼 수 있었으니까.

이 모든 복종과 고난은 오로지 단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렇게나 고고하디 고고한 이딘이, 개처럼 복종하는 이유.

바로 ‘힘’ 때문이었다.

그녀의 호위 기사, 아르웬은 이딘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아르웬은 이딘이 왜 이런 불길한 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딘은 예전부터 검이나 마법에는 재능이 아예 없었다. 무력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람디샤 제국은 예로부터 강함을 숭상하는 나라.

황위 계승자가 약한 것은 엄청난 핸디캡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경쟁 상대가 ‘소드 마스터’일 때는 더더욱.

그래서 이딘은 어렸을 때부터 힘을 갖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힘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한때는 마족과 계약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하지만 아르웬은 그런 이딘을 필사적으로 말렸다. 황족들은 신전의 고위급 사제들과 자주 만나기에, 들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르웬. 드디어 힘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건 기적이야.’

하지만 아르웬은 그것을 기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함정이라고 생각했지.

‘강한 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전하. 그들과 협력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함정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내게는 이 방법뿐이니까.’

‘그렇게까지 황위를… 얻으셔야 합니까?’

아르웬의 충심에서 나온 물음에, 이딘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웬. 나의 충성스러운 아르웬. 정말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러나, 미소 가득한 이딘의 얼굴에는 비참함과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내가 만약 황위를 얻지 못한다면,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나를 죽일 것이다. 나만 죽이는 게 아니라,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죽일 것이다. 그게 이 황가의 규칙이니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다.

람디샤의 유명한 격언이었다.

황위 계승자가 정해지고 나면, 다른 황위 계승자 후보들은 자결해야만 했다. 그것이 강력한 황권의 원천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르웬도 더 이상 이딘을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분께, 다른 건 몰라도 황녀님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부탁드렸던 것이었고.’

하지만, 과연 그분이 들어주실까. 아르웬은 르네의 무심한 눈을 떠올렸다.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듯, 모든 것에 초월한 그 눈을.

“아르웬.”

그때, 이딘이 아르웬을 불렀다.

“네, 전하.”

“만약 공녀가 마족의 정체를 드러내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바로 검으로 찔러라.”

“예?”

아르웬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이번이 대적자를 죽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놓쳐선 안 돼. 공녀는 강하다. 성수로 약해졌을 때만이 유일한 기회야.”

“하지만 대적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 아닙니까, 전하?”

“상관없다.”

이딘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뒷수습은 내가 하겠다. 마족과 연관되었다는 것만 증명되면, 바로 죽여 버려.”

이딘의 확언에도, 아르웬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뒷수습 따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이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세딘 경과 황태자 전하가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분명 복수할 겁니다.”

아르웬은 세딘의 애정과 충성심 가득한 모습을 보았다. 그 세딘 안시라드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던 ‘제국의 빛’이, 사람에게 그런 애정을 보였다.

그런데 그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아르웬은 이딘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자신이 죽는 것이야 상관없었다. 주군을 위해 죽는 것이니까.

하지만 세딘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아르웬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이딘이라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당연히 아르웬이 르네를 찌르자마자, 세딘은 이딘을 찌를 게 분명했다.

“괜찮아, 아르웬.”

하지만 아르웬은 곧 깨달았다.

“그분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다.”

아르웬‘은’ 더 이상 이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

[탑의 시련]- 3층

클리어 조건: 남자주인공 후보 중 한 명에게서 ‘진실된 사랑의 맹세’를 듣기

시간제한: 30일 / 남은 시간: 12일

실패 시: 성좌들과의 계약 해지 및 부여된 특혜 박탈, 원래 세상으로의 회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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