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공녀.”
그때, 르네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황녀 전하.”
오늘 르네의 진짜 ‘상대’, 이딘이었다.
“웬일로 오라버니와 입장하지 않았군.”
오늘 이딘은, 은독수리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붙어 다니던 안시라드 경도 보이지 않고.”
그녀가 검을 잡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본인이 입고 싶은 거 입는 거지 뭐.’
그러나 르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꼭 제가 누군가와 함께 입장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르네의 말에, 이딘은 하하, 하고 낮게 웃었다.
“그 말이 옳군.”
르네는 그제야 이딘이 아르웬 없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하야말로, 아르웬 경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근, 르네는 몇 번 아르웬에게 연락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르웬은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르네에게는.
르네는 그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을 시, 언제든 전음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르웬에겐 어떤 전음도 닿질 않았다.
“내 기사에게 관심이 많군, 공녀?”
이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르네와 아르웬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이.
눈치챘겠지 당연히. 르네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황궁에서 정상인을 볼 기회가 얼마 없어서 말이죠.”
“그래도 남의 기사에 신경 쓸 시간에-”
이딘은 이시르를 향해 고갯짓했다.
“그쪽의 약혼자나 신경 썼으면 좋겠군.”
파지직.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오갔다.
그때,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할란이 헛기침을 했다.
그 신호의 뜻을 알아차린 르네가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요, 전하. 최근 기이한 일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기이한 일?”
이딘은 미간을 좁혔다.
“네. 이를테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만났다거나.”
“….”
르네의 말에도, 이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글쎄, 공녀.”
“그런 적, 없으신가요?”
“그런 존재가 한둘이겠는가?”
이딘은 능숙하게 대답을 피하고선, 뒤로 물러섰다.
“그럼 나는 이만.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이지.”
능구렁이 같긴. 르네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이딘이 멀어지자마자, 할란에게 물었다.
“뭔가 못 느꼈어?”
“내 능력은 영혼을 보는 능력이다.”
할란은 멀어지고 있는 이딘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다.
“저 영혼은 엄청난 야망과 탐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타락했다고 볼 수는 없구나. 네 아비와는 질적으로 달라.”
“….”
하긴 저번에 할란이 마키어스 공작에게 부정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이딘과 마키어스 공작 사이에 연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둘의 차이는 뭘까?
왜 이딘에게는 부정한 냄새가 나지 않는 걸까?
위치를 생각하면, 이딘이 이 모든 일의 배후여야 하지 않나?
르네는 이럴 땐 상태 창을 볼 수 없게 만든 시스템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무언가 숨기고 있음은 분명하다.”
“뭐를 숨기고 있는 걸까.”
르네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일단 다른 귀족들을 살펴보자.”
르네는 할란을 데리고 다니며 최대한 많은 귀족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예? 부, 부정한 존재요?”
“저는 그런 건 정말 모릅니다!”
“에이, 공녀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몇몇 귀족은 확실하게 상관이 있는 것 같았다.
르네는 그 귀족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해 두었다.
내일 세딘에게 명단 넘겨야지.
“근데 정말 세딘은 왜 오지 않는 거지?”
파티가 이제 1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르네는 문 쪽을 돌아보았다.
왜 오지 않는 거야, 세딘?
내가 그 보석을 끼고 나타날까 봐?
***
한편.
은독수리궁, 기사단 연무장.
세딘은 사실 누구보다도 일찍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다름 아닌, 아르웬의 연락 때문이었다.
세딘은 아르웬을 별로 신뢰하지 않았으나, 르네가 아르웬을 신뢰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르네가 신뢰하는 사람은 그도 신뢰해야 한다.
그게 그의 신조였다.
그래서 탐탁지는 않았지만, 파티 시작 전에 은독수리궁에 들른 것이었다.
“남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하실 처지가 아니실 텐데요.”
아무리 아르웬이 르네의 은총을 입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는 해도, 두 사람은 질적으로 달랐다.
소드 마스터가 된 기간부터가 달랐으니까.
세딘은 아르웬을 제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의 도움을 받아 소드 마스터가 된 사람과, 스스로 경지를 깬 사람은 완전히 다르다.
아르웬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 묘하게 심기가 불편한 눈치였다.
“저도 부르고 싶어서 부른 게 아닙니다, 경.”
“그럼 뭡니까.”
아르웬은 르네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태도가 완전히 다른 세딘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겉과 속이 다른 자식.
“제가 황녀 전하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은 알고 있을 겁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 제국에서 그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벨루아 감사제 때의 일 때문에, 아르웬이 이딘의 눈 밖에 난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소드 마스터기 때문에, 이딘은 대놓고 아르웬을 직위 해제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곁에 두지도 않았다.
본래 은독수리궁 가장 안쪽에 있었던 은독수리 기사단 연무장은 이제 한적한 곳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아르웬은 은독수리궁에 자유롭게 출입할 권리도 박탈당했다.
사실상 완전히 연이 끊긴 셈이었다.
“제가 더 이상 은독수리궁에 출입하진 못해도, 항상 주시하고는 있었습니다.”
아르웬은 착잡하게 말을 이었다. 은독수리궁을 주시한 건, 르네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딘을 염려해서기도 했다.
이딘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했다. 데서스 대주교를 만나는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사용인까지 전부 내보냈다.
제국의 황녀가 사용인을 전부 내보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르웬은 위험을 무릅쓰고 은독수리궁 내부로 잠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은독수리궁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신성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걸 전부 깨는 것이야, 가능했다.
하지만 결계를 깨지 않고 잠입하는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경께서는 저보다 더 음지의 기술을 많이 알지 않으십니까.”
“대단하신 양지의 인물 나셨군요.”
아르웬의 칭찬 아닌 칭찬에, 세딘은 비꼼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재수 없는 길거리 고양이 자식.’
‘남의 도움만 받고 자란 집고양이 주제에.’
두 사람은 소드 마스터라는 공통점 이외는 전혀 통하는 부분이 없었다.
검술 명가 카나에 가 출신 아르웬.
길거리 출신 세딘.
이런 두 사람이 잘 맞을 리가 없었다.
“최근 황녀가 사용인을 전부 내보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왜 르네가 아니라 내게 연락한 겁니까?”
세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런 일은 그보단 르네가 훨씬 잘 처리할 텐데.
세딘과 아르웬이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물론 공녀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니, 그분께 연락 드리는 게 맞긴 하지만….”
“민폐 끼칠까 걱정했군요.”
“네.”
두 사람은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세상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람디샤 기사의 양대 산맥.
그 둘은 지금 한 명의 주군을 모시고 있었다.
“아마 제가 말씀드리면-”
“자애로운 미소을 지으시며-”
“‘우리 애들은 약해서 탈이야.’라고 하시겠죠.”
너무 강해서 두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주군을.
“…들어가죠.”
“…예.”
두 사람은 어쩐지 자괴감을 느끼며, 은독수리궁으로 접근했다.
“황녀 전하께서는 방금 전, 본궁으로 가셨습니다.”
아르웬은 세딘에게 복면을 건네며 말했다.
소드 마스터인 두 사람을 잡을 수 있는 호위병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럼 현재 궁 안엔 아무도 없어야 하는 거군요.”
“예.”
“하지만 안에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고요.”
“…그게 문제인 겁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전부터 은독수리궁 내부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단순한 인기척이었다면, 몇몇 사용인들이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이 정도는, 거의 마족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인기척인데.”
“…불길하고 사악한 존재감입니다.”
두 사람은 근심 어린 얼굴로, 신성 결계에 손을 댔다.
이렇게 강한 신성력으로도 다 가릴 수 없는 사악한 존재감이라니.
“결계를 깨지 않고 진입할 수 있겠습니까, 경?”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
세딘은 결계의 힘을 가늠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르네가 펼친 결계에 비하면 별거 아닌 결계였다.
물론, 이조차도 교황급이나 펼칠 수 있는 결계였지만.
“하지만 몸 성히 들어가긴 그른 것 같군요.”
“…동의합니다.”
세딘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 한 몸을 바쳐서, 르네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내가 입증할 수만 있다면.
“제가 먼저 들어가서 길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조금쯤은 당신도 내게 의지해 줄까?
“위험할 텐데요, 안시라드 경.”
아르웬이 흠칫하며 말했다.
“들어가서는 그쪽이 싸우면 될 일 아닙니까.”
그러나 세딘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망할 길고양이….”
“뭐라고 했습니까, 집고양이?”
“들어가기나 하십시오, 길고양이.”
아르웬의 성질 가득한 말에, 세딘은 피식 웃었다.
저딴 온실 속 집고양이와 함께 움직이는 날도 오고.
르네가 두 사람을 얼마나 많이 바꿔 놓았는지 실감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서라도 이젠 주저할 수 없었다.
세딘은 손을 뻗어, 신성 결계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계의 틈이 만져지는 그 순간-
“지금!”
두 사람은 아득한 어둠 속으로 입장했다.
***
“!”
“!”
두 사람이 결계의 틈을 비집고 들어간 순간.
“느꼈어요?”
파티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그 파동을 느꼈다.
“방금 그것을 못 느꼈을 리가.”
일부러 르네를 피하던 이시르도, 그 순간만큼은 르네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색하게 함께 서 있었다.
“은독수리궁 쪽이었어요.”
“그런 것 같군.”
이시르는 인상을 구기며 와인을 들이마셨다.
르네는 이딘의 표정을 살폈다. 궁에 뭘 숨겼기에, 이런 힘이 느껴지는 거지?
하지만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인 이딘은, 그런 힘의 파동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가 봐야겠어요.”
르네는 결국 드레스 자락을 꽉 쥐고 몸을 돌렸다.
“안 돼.”
하지만 떠나려는 르네를 이시르가 붙잡았다.
“네?”
“내 생일 연회이다. 약혼자인 당신이, 나와 함께 입장하지 않아서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래서요?”
“그런데 그대가 먼저 떠나 버리면 우리 약혼이 위태롭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이 와중에도 자기 평판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르네는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생각 따위, 나는 걱정하고 싶지 않아요. 은독수리궁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와서 축하해 주면 되잖아요.”
“공녀.”
이시르는 이를 꽉 물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내 생일이다.”
“….”
“은독수리궁은 파티가 끝나고 확인해도 늦지 않아.”
“하지만-”
“고작 1시간이다. 생일인 사람을 위해 1시간을 기다려 줄 수 없나?”
어떻게 하지? 르네는 입을 꾹 다물며, 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파티는 이제 겨우 1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젠장.
“1시간 뒤에는, 무조건 나갈 거예요.”
나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너무 약해.
르네가 이를 꽉 물었다.
[<유혹의 군주>님이 우리 이영이, 58번의 생 동안 한 번도 생일 축하 못 받았다고 생일 트라우마 있는 거 너무 마음 아프다고 말합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그래도 우리는 축하해 줬는데! 라고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