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안테 마키어스가 리안 카리스를 처음 본 건, 그의 열다섯 살 생일 파티 때였다.
그는 장래가 유망한 소공작으로, 리안은 갓 인정받은 성녀로 이름을 떨치고 있을 때였다.
사실 안테는 연애 감정이나 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을 가질 틈새가 없었다.
마키어스 공작은 미래의 마키어스 공작이 될 안테에게 매우 가혹했으니까.
눈을 떴을 때부터 감을 때까지 오로지 검, 또 검이었다.
그리고 안테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마키어스’라는 이름을 보고 다가오는 것이라는 공작의 세뇌도 한몫했다.
‘잊지 마라, 안테. 사람들은 네가 아니라 마키어스라는 이름만을 본다. 그래서 네가 더 완벽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안테는 그 말만을 믿고 자랐다.
그랬기에,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한 개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질 수 없어요, 소공작님.’
리안은 더 특별했다.
‘허락받지 못했거든요.’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모든 사람을 완벽한 선의로 대하는 사람.
‘그래도, 종종 이렇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완전무결한 애정으로만 대하는 사람.
증오와 탐욕으로 가득 찬 마키어스와는 그야말로, 반의어 같은 사람.
‘약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어째서입니까?’
‘소공작님.’
만인을 의심하고 만인 위에 군림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안테와는 달리,
‘저는 이시르 전하의 반려가 되기 위해 그분과 약혼한 게 아니에요.’
만인을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
‘제국의 반려가 되기 위해서죠.’
그런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었다.
르네가 그런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을 땐.
말 그대로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르네가 결백하다는 건 이제 알았다.
그래도 리안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잊었다. 희망을 지우고 버렸다.
가끔은 스스로를 지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잊은 줄 알았다. 눈만 감으면 보이던 사람이, 이제는 꿈에만 나오는 정도가 되었으니까.
아주 서서히 희미해졌으니까.
그런데.
“잘 지내셨나요, 소공작님?”
당신이 이렇게 돌아오면,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카리스 영애.”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
“왜 하필 안테 놈이야?”
은곰궁.
르네는 어쩔 수 없이 며칠만 더 이시르의 궁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바로 건너편, 은독수리궁에 리안이 있었으니까.
단, 세딘과 함께 머무른다는 조건하에.
“둘이 원래도 친했잖아.”
키릴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둘이?
르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안이라는 애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안테와는 질적으로 다른 애 같던데.
“전에는 안테가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던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것도 맞고.”
그건 또 무슨 사이야. 르네는 키릴을 괴이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키릴은 이시르의 눈치만 볼 뿐, 더 설명하진 않았다.
“…내 눈치 볼 것 없소. 공자.”
이시르는 불쾌함 반, 난감한 반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맞다.
리안과 이시르도 약혼했던 사이였지.
이거 참.
난감하게 됐네.
“그런데 왜 이시르도, 나도 아니고… 안테일까?”
안테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면.
왜 리안은 꼭 집어 안테를 불렀을까.
“글쎄. 이시르 전하도 진짜 사랑은 너였다고 고백한 마당에, 리안 성녀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어? 알고 보니 형이 리안의-”
헙.
키릴은 거기까지 말하고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분위기는 싸해진 후였다.
[<유혹의 군주>님이 집 나간 키릴의 눈치를 찾는다며 공고를 냅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내쉰 한숨이 해일을 불러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