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예?”
파티가 끝난 후,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은독수리궁.
이딘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안테 소공작과… 약혼을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래.”
<탑의 주인>은 리안의 천사 같은 얼굴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만큼은 어찌나 조각상처럼 완벽한지 이딘조차도 잠시 멍하니 있을 정도였다.
“친구는 가까이. 하지만 적은 더 가까이.”
“….”
“그 애는 이용 가치가 있어 보이더군. 확실히.”
하지만 그 천사 같은 입이 워낙 사악해서 이딘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시르라는 황태자가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했다지. 그러니 그 인간이 감히 이 약혼에 반기를 들 순 없을 것이다.”
이딘은 잠자코 들었다. 이 이상한 신의 사도가 하려는 말이 서서히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내가 소공작과 약혼을 하고, 너를 지지하는 것이 지금 네게는 가장 좋을 것이다. 황태자의 위세를 꺾고, 너를 드높일 유일한 방법이지.”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확실히 그게 지금으로선 유일한 방법이었다.
현재 이딘은 성녀를 구했다는 명목하에서, 잠시 반격을 하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이시르가 월등하게 우세한 상황이었다.
레드 드래곤이 수호룡으로서 마족을 처치했다고 알려진 지금, 수호룡이 보호하라고 명령한 르네의 명성은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리안의 인기가 워낙 대단해 리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르네를 더욱 싫어했지만.
그래서 지금 리안의 견고한 지지가 더욱 필요한 상황이었다.
“…왜 하필 소공작입니까? 다른 유력 귀족들도 많습니다.”
“내가 정말로 너 하나 인간들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 모든 수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미물아?”
“…!”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에, 이딘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르네가 가까이 있어, <탑의 주인>은 자신의 기척이나 힘을 완전히 지우려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딘은 종종 눈앞에 있는 이 존재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잊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감이 드러날 때마다, 이딘은 이 존재가 얼마나 강하고 음험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의 목적은 오로지 대적자의 파멸뿐. 그것이 스스로 삶의 의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처절하게 망가트리는 게 유일한 목표이다. 네 황위는 수단일 뿐이고.”
황위가 수단이라니. 이딘은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신의 사도라는 건 이런 건가.
인간들의 황위 따위는 가소로워 보이는.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이딘은 문득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니 너는 조용히 내가 명하는 바를 행하면 된다.”
눈앞에 있는 이 존재가 신의 사도가 맞는지에 대한 강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
똑똑.
“르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은곰궁.
르네는 오랜만에 성좌들과 채팅이나 하다가, 세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응.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세딘이 방으로 들어섰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성좌들과 채팅…이라고 하면 안 되겠지.
르네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냥 창밖 좀 봤어.”
“아아.”
세딘은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르네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그건 하나의 종이였다. 아마도, 편지로 보이는.
하지만 이렇게 나에 대한 소문이 흉흉할 때, 편지를 보낼 만한 사람이 있나?
르네는 미간을 좁혔다.
“마키어스 가에서 온 편지입니다.”
“…마키어스 가에서?”
안테나 키릴이 보낸 건가? 그럴 거면 직접 와서 말하지.
르네는 떨떠름하게 편지를 열었다.
르네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최근 의식을 되찾았다는 말을 듣고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내가 네게 감히 용서를 빌 수 없을 정도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있다.
혹시 괜찮다면 언제 한번 저택에 와 주겠니?
식사나 같이하며…
르네는 끝까지 읽지 않고 바로 편지를 구겨서 던졌다.
“가지가지 하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권력도, 명예도 잃고 나니 내 생각이 났나 보지? 코웃음만 나오는 얄팍한 수였다.
마키어스 공작은 근신 명령을 받은 후로 빠르게 권세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딘을 지지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이딘 파 내에서도 입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기는 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버려.”
“사실….”
세딘은 종이 하나를 더 건넸다.
이번에는 초대장이었다.
날짜는 일주일 후, 저녁. 마키어스 공작가에서 파티를 열 예정이니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파티?”
“네.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석한다고 합니다.”
“황가에선?”
“황태자 전하께서는 르네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셨고, 이딘 황녀는 참석합니다.”
“리안은 당연히 참석하겠지.”
“…네.”
또 무슨 수작질일까. 르네는 한숨을 쉬었다.
리안의 몸 안에 있는 게 진짜 <탑의 주인>이라면, 이것 또한 함정일 것이다.
<탑의 주인>은 무력만 강한 게 아니라 간계도 잘 부렸으니까.
“네 생각은 어때, 세딘? 내가 가야 할까?”
세딘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와 이시르 전하만 참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리안을 피하는 것으로 보이진 않을까?”
“….”
세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긍정임은 두 사람 모두 알았다.
“사실 난 리안을 피할 이유가 없어. 그 애가 실종되기 전, 우리는 좋은 친구였으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그래도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리안 성녀는 몰라도 리안 성녀와 함께 하는 이들은 확실하게 목적이 있는 자들이니까요.”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설령 리안이 정말 순수한 리안이어도, 리안을 이용하려는 자들은 순수하지 않았다.
“어떻게 답장할까요?”
세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세딘.”
사실 르네는 초대장을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을 정해 두었다.
사실 르네 한 사람을 생각하면, 탑의 시련 퀘스트를 생각해서 가지 않는 게 맞다.
분명 가면 명성이 깎일 이벤트들이 잔뜩 마련되어 있을 테니까.
사방에서 르네를 깎아내리기 위한 준비를 해 놨을 테니까.
하지만 가야 했다.
르네의 일기장에 있는 문구는-
“리안을 봐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제발 누가 우리를 좀 도와줘.
리안과 르네 모두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
한편, 은곰궁의 다른 방.
르네가 세딘과 대화하고 있을 때, 이시르는 부관과 대화하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하.”
“편한 대로 해라.”
이시르는 쌓여 있는 서류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대충 대꾸했다.
그의 부관은 그의 비서 겸 참모였기에, 이시르도 그의 말만은 새겨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속이 시끄러워 어떤 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부관도 그 사실을 아는지, 굉장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안 성녀님이 돌아오셨으니, 마키어스 공녀님과의 약혼을 파기하셔야 합니다.”
“…뭐라고 했지?”
순식간에, 방 안이 살기로 가득 찼다.
나름대로 소드 익스퍼트 중급에 들어선 부관임에도, 그는 소드 마스터가 내뿜는 기에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래, 성녀님이 실종되어 파기되었던 약혼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는 성녀님이 돌아오셨으니-”
“그만.”
이시르는 한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의 부관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는 이시르도 알았다.
애초에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접견을 요청한 교황부터가 비슷한 요구를 해 왔으니까.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전하.’
‘…제자리라고 하셨습니까?’
말을 듣다 말고, 이시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마키어스 공녀는 마키어스 공작가로. 리안 성녀는 은독수리궁이 아닌 은곰궁으로. 그게 모두의 제자리니까요.’
‘교황 성하.’
‘두 분이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이시르가 놀라든 말든, 교황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이시르는 그 부드러운 미소 뒤에 얼마나 날카로운 탐욕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공녀도, 전하와의 결혼 생각은 없는 것 같던데,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신 겁니까?’
‘공녀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은 결혼 같은 중대사를 미루지 않지요.’
교황의 모든 말들은 그의 모든 폐부를 찔렀다.
모두 눈치채고 있었군. 그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해 주고, 협력 관계로 돌아가십시오. 협력이라는 건 꼭 약혼이 아니어도 이뤄질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공녀도 그것을 더 원하고 있을 겁니다.’
그때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어서, 얼마나 씁쓸했던가.
얼마 전 용기 내어 내밀었던 프러포즈 링이 그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이시르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르네는 아무리 기다리고 회유해도, 그의 황후가 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전하.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공녀님은 확실히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는 패지만, 또 동시에 위험한 패이기도 합니다.”
부관은 매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성녀님은 다릅니다. 위험성이 거의 없는 패입니다. 만약 성녀님과 다시 화해하시고, 결혼하신다면 누구도 전하의 황위를 노리지 못할 겁니다.”
“….”
“그게 설령 이딘 황녀 전하라고 하더라도.”
팔랑.
이시르는 부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덤덤하게 종이를 넘겼다.
“전하.”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마라.”
“…!”
부관의 눈이 커졌다. 설마 이시르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나올 줄은 몰랐었다.
“먼저, 네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어떤…?”
“리안과 르네는 패가 아니다. 사람이지.”
“…!”
르네와 함께 지내며 이시르도 배운 것이 있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패로 보면 안 된다는 것.
오히려 그게 그를 패하게 한다는 것.
“리안은 더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황궁에 갇힐 사람이 아니야.”
이시르는 천천히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리안에게 감히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마키어스 공작가의 파티에 가겠노라는, 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