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은독수리궁.
그 누구도 감히 얼씬하지 못하는 하나의 방이 있었다.
궁의 주인인 황녀의 방도 아니고,
시녀장의 방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손님방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거주하는 손님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리안 카리스.
태어났을 때부터 빛을 수여받고, 모든 걸음마다 신이 꽃을 피울 정도로 사랑한다는 성녀.
그리고 지금은, 마족을 물리치고 잠시 회복 중에 있는 성녀.
리안은 회복을 핑계로 궁의 가장 깊숙한 방을 받아 냈다.
그리고 아직은 사람이 무섭다고 말하며 주변에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다.
사용인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뜻을 존중해 가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리안, 아니, <탑의 주인>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포기를 못 했나? 아직도 네가 어떤 처지인지 몰라?”
아무도 없는 방.
<탑의 주인>은 홀로 광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불쌍한 리안. 내가 다시 한번 말해 주지. 네가 어떤 처지인지.”
도저히 성녀의 입에서는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사악한 목소리.
<탑의 주인>은 거울 앞으로 다가가, 리안의 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당신이 아무리 말해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자, 리안의 입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탑의 주인>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결한 목소리였다.
“네가 그렇게 기다리던 이시르 황태자는 너를 버리고 공녀와 약혼했어. 네가 흘린 피의 온기가 다 식기도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그분께서는 사명이…
“네가 그렇게 아끼고, 또 걱정하던 공녀는 너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로지 제 명성만 쌓기 급급했지. 기다렸다는 듯이 네 약혼자를 빼앗았고.”
-그렇게 해서 르네가 행복해졌다면, 저는 그걸로도 기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와장창.
<탑의 주인>은 손으로 거울을 깼다.
그러자 손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벌써 리안의 몸을 차지한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리안은 지독하리만치 포기할 줄을 몰랐다.
<탑의 주인>은 그동안 리안에게 계속 저주와 거짓말을 퍼부으며, 리안의 의지를 꺾으려 노력했다.
임시로 리안의 몸을 차지하긴 했지만, 리안의 영혼마저 내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괜찮았다. 아무리 리안의 의지가 강하더라도, <탑의 주인>은 그보다 훨씬 강한 존재였다.
그러나 문제는 <탑의 주인>이 너무 많이 약해졌다는 데에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탑의 주인>은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심지어, 지금은 르네에게 들킬까 봐 자신의 힘을 완전히 지워야만 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감히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던 리안이, 이젠 툭하면 나오려고 했다.
-언젠간 당신의 힘은 다할 거예요. 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고.
바로 이렇게.
그러나 <탑의 주인>은 조용히 리안의 존재를 억눌렀다.
내일은 감히 리안이 나오게 둘 수 없었다.
“한번 해 봐, 성녀. 그래 봐야 모든 게 끝난 후겠지만.”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
마키어스의 파티가 열리는 날 아침.
안테는 공작의 부름을 받고, 서재로 찾아갔다.
사실 오늘 파티부터가 꽤 의아한 일이었다. 공작은 근신 처분을 받고 나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특히 안테나 키릴과는 더더욱.
가끔씩 정체를 알 수 없는 손님이 몇 번 다녀가긴 했지만, 그것도 드물었다.
안테는 공작이 별로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마키어스의 가주는 공작이고, 안테는 그저 후계자일 뿐이기에.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공작은 안테와 키릴을 불러 말했다.
‘파티를 열 것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두 형제는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어떤 파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알 것 없다. 최대한 성대한 파티를 열 거란 것만 알아 둬라.’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딱 한마디만 덧붙였다.
‘리안 성녀도 올 것이라고 하니, 둘 다 참석하도록.’
그 말을 듣자마자 안테는 이 파티가 좋은 목적으로 열리는 건 아님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가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형.’
그건 키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르네에게 말할까?’
‘…그 애는 왜?’
‘뭔가 쎄하잖아.’
‘아직 회복 중인 애다. 그리고 르네라고 별다른 수가 있겠느냐.’
‘음….’
소공작은 안테였다. 그러니 일도 안테가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안테는 마키어스가 르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요즘 들어 조금씩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왜 전에는 보이지 않았을까, 의아할 정도로.
그래서 안테는 더욱 르네에게 말할 면목이 없었다.
가문의 수혜를 받은 건 안테였으니, 안테가 가문을 살려야 했다.
안테는 심호흡을 하고,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부르셨습니까, 각하.”
“들어와라.”
명이 떨어지자마자, 안테는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서재 안에는 공작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공작은 안테를 보자마자 자리에 앉으라고 고갯짓했다.
어지간하면 누구도 앉히지 않는 공작의 오만함을 생각하면, 불길한 징조였다.
그러나 안테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 파티에 리안 성녀가 온다고 말했던 건 기억할 게다.”
“…물론입니다.”
바로 어제, 리안에게서 편지도 받았으니까.
사실 안테는 리안의 환영 파티 이후에도 종종 리안에게서 초대장을 받았다.
대부분은 너무 외롭고 황궁 생활이 무서우니 부디 방문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그러나 안테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좋게 거절했다.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리안이 부르기도 전에 매일같이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테는 혼란스러웠다. 깨어난 후의 리안은, 그가 알던 리안이 아니었다.
그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리안의 얼굴 그대로인데. 목소리도 그대로이고 모든 게 다 그대로인데- 리안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시대는 저물었다.”
공작의 말에, 안테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공작은 뒤돌아선 채로 말을 이었다.
“근신 처분까지 받았으니, 전처럼 정계의 정점으로 있지는 못할 터.”
“각하.”
“되지도 않는 위로는 하지 마라. 나도 나의 현실을 알고 있으니.”
공작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슬슬 네게 이 가문을 물려줄 때가 된 것 같구나.”
“…!”
그토록 기다린 일이었다. 그토록 이 순간만을 위해 인내하고, 또 인내했었다.
그러나 안테는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잠자코 그의 뒷말을 들었다.
“단.”
바로 이것 때문에.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안테는 한숨을 쉬었다. 공작이 쉽게 가문을 주지 않을 거라는 건, 그도 짐작했던 일이었다.
“이 마키어스는 거대한 제국과도 같다. 이 람디샤의 심장이자, 기둥이지.”
“….”
“내가 최선을 다하여 너를 내 후계로 만들기는 했지만, 너는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 이대로 네게 마키어스를 물려주었다가는 선대 공작 각하들께 뵐 낯이 없어.”
매우 모욕적인 말들이었지만, 안테는 조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애초에 익숙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그제야 뒤돌아, 안테와 마주했다.
“너 혼자가 아니라, 리안 성녀와 함께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쿵.
큰일이었다.
점점 더 불길한 기운이 안테의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얼마 전, 은독수리궁에서 편지를 하나 받았다. 리안 성녀가 너와의 약혼을 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였지.”
나도 모르게 그런 편지가 오가고 있었다니.
안테는 충격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리안이, 내게 말도 하지 않고 약혼을 청했다고?
갑자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녀는 네게 과분한 혼처이다.”
“제 동의도 구하지 않고, 제 결혼을 결정하셨습니까?”
안테는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었다.
“동의를 구할 이유가 있느냐? 그 리안이다. 네가 그렇게 혼자 애달파했던!”
“지금은 아닙니다!”
“!”
안테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아차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아니었나.
그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혼란스러워할 때가 아니었다.
리안을 사랑하고 있든 아니든 이런 식의 결혼은 사양이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교황 성하께서 승인하지 않으실 겁니다.”
람디샤 제국에서 벨루아교는 상당히 중요했다.
특히 가정에서는 더욱 그랬다. 모든 귀족들과 황족들은, 교황으로부터 결혼을 축복받아야만 했다.
만약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고 또 가문끼리 서로 마음이 맞더라도, 교황이 반대하면 그 결혼은 성사되지 않을 정도로.
교황이 황태자의 약혼 상대로 리안을 점찍었다는 건, 이 제국의 모든 이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건 안테가 용기 한번 내지 못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지금’ 교황께서는 그러시겠지.”
“…!”
안테의 동공이 흔들렸다.
공작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각하.”
“교 내에서도 움직임이 있다. 데서스 대주교가 곧 교황이 될 것이야.”
“각하!”
매우 위험한 이야기였다.
안테는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교황은 매우 신성한 존재. 신을 직접 모시는 존재이니만큼, 교황을 배반하는 자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어딜 언성을 높이느냐!”
“교황 성하에 대한 쿠데타는 매우 위험합니다. 그건 황제의 권위에 반하는-”
“지금 황제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제 아들도 두려워하는 황제가, 뭘 할 수 있겠느냐.”
공작은 코웃음 쳤다. 아무리 황제가 성격이 포악하다 해도, 그의 광증은 이미 유명했다. 귀족들은 이시르나 이딘을 모셨지, 황제를 모시지는 않았다.
“너는 잠자코 리안 성녀와 결혼하는 것만 생각해라. 이 결합은 이딘 황녀 전하를 황제로 만들 것이고, 그건 곧 마키어스의 부흥을 뜻한다.”
“르네가 황후가 되어도, 마키어스는 부흥합니다. 어찌 그걸 인정하지 못하십니까!”
“그 애는 마키어스가 아니다!”
콰직.
공작은 기어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책상 위의 조각상을 안테의 얼굴에 던졌다.
안테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 하다못해 오러도 두르지 않았다.
그의 흠결 하나 없는 이마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렀다.
정확히 안테가 원하는 것이었다.
“나약한 놈!”
“….”
“르네는 이 가문을, 너와 나를 버렸다. 그런데도 아직 미련을 못 버려!”
공작은 씩씩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안테는 이마 위로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오, 각하.”
전부 지긋지긋했다.
“르네는 이 마키어스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딱 하나만 지긋지긋했다.
“그거 각하를 버린 것뿐이죠.”
쾅.
안테는 서재의 문을 닫고 나왔다.
모든 것이 엉망인 나날이었다.
그때,
“소공작님.”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카리스 영애.”
그의 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