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느릿한, 그러나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음악이 회장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파트너와 손을 마주하고, 가면 너머의 얼굴을 상상했다.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홀로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소공작.”
바로, 사형 선고처럼 약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던 안테였다.
“…전하십니까?”
안테는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는 상대에 당황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정도면 단순히 얼굴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라는 것은,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래.”
“어찌하여 춤을 추시지 않고, 저같이 재미없는 사람에게 오셨습니까.”
안테는 자조적으로 미소를 짓고는 이시르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대의 동생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그 애가 오늘… 온다고 했습니까?”
안테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마키어스 공작이 르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테는 당연히 르네가 초대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사교계에서 르네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원흉이 누구인지도.
“르네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상대처럼 보이나, 소공작은?”
“….”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안테는 씁쓸하게 숨을 내뱉었다.
파티의 막바지엔, 리안과 안테의 약혼 사실이 공표된다.
그가 거절하지 못한, 약혼이.
르네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성녀는 어디에 있지?”
“저도 오늘 그녀의 가면은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왜?”
“자신을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리안이?”
이시르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리안이 그런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두 남자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겠다고 약속은 못 한다.”
“카리스 영애를… 사랑하셨습니까?”
순식간에, 침묵이 두 남자 사이에 흘렀다.
“나는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이라는 건 전부 부질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소공작.”
“그건 대답이 아니십니다, 전하.”
건방지긴. 이시르는 피식 미소를 흘리고 술을 쭉 들이켰다.
사랑했냐고, 리안을.
모르겠다. 내가 그 여자를 사랑했던가.
‘내가 원하는 건, 황위다.’
‘제가 원하는 것은, 제국의 평안입니다.’
단번에 그렇게 대답하던 여자였다.
멋 하나 없는 청혼에, 그렇게 대답하던 여자.
너를 원하는 게 아니라, 황위를 원해서 청혼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흔들리지도 않는 눈으로 그렇게 꼿꼿하게 서서 대답하던 사람이었다.
“뜻은 잘 통하던 상대였지.”
“그뿐입니까?”
“내게 그 이상의 상대라는 건 없다, 소공작.”
“…!”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군.”
“저는-”
“리안 카리스는 내가 인정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내가 존중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고.”
이시르는 억양 하나 없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그러나 안테에게는 그것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시르가 리안에게 일말의 존중심도, 관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존중하고 있었다고?
이제 와서?
“그러면, 왜 카리스 영애께 그렇게 냉혹하셨던 겁니까.”
“냉혹?”
이시르는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건 내가 할 질문인데, 소공작.”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의 동생에게는, 왜 그랬던 거지?”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
이시르는 싸늘한 눈으로 새 술잔을 집어 들었다.
동시에, 느릿하던 선율이 점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와 리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카리스 영애께서는 괴로워하셨습니다. 전하와 약혼하시던 내내-”
“나 때문에 괴로워한 것이라고, 그녀가 그러던가?”
“!”
쨍그랑.
안테의 손에 쥐어져 있던 잔이, 맥없이 깨져 버렸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모든 것들을 혐오한다, 소공작.”
‘그렇게 매일 고통스러워하면서. 왜 구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지?’
‘저를 구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따로… 있다고?’
‘전하께서는 먼저 전하 스스로를 구하셔야 해요.’
그때, 리안의 얼굴에 걸려 있던 그 감정을 이시르는 알아챌 수 있었다.
‘저는 저를 구해 줄 사람이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희망이었다.
단, 이시르가 그 희망인 건 아니었다.
그 희망은 다른 쪽이었다.
***
한편, 파티의 반대편.
르네는 앳된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도, 시선을 끌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온갖 쑥덕거림에 휘말릴 정도로.
‘아니, 저 기사는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그런데 어떻게 다 가려도 잘생겼지?’
‘여자 기사일 수도 있지 않아?’
‘그래도 잘생기긴 매한가지일 것 같은데.’
다 들린다, 다 들려.
하여간 본체의 미모란. 르네는 눈을 굴렸다. 이렇게 다 가렸는데도 시선 집중이라니.
난감했다.
오늘은 조용히 리안만 보고 빠지려고 했는데.
이렇게 시선을 끌다간, 누군가에게 정체를 들킬지도 몰라.
안 그래도 아까 이시르가 빤히 쳐다봐서 깜짝 놀랐구만.
“르네.”
옆에서 기척 없이 르네의 곁을 지키던 세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
“춤, 안 추십니까?”
“응. 출 상대가 없잖아.”
그 말에, 세딘은 르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왜 쳐다봐?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대체 너는 언제쯤 연애 세포라는 게 생기는 건지 묻습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이쯤 되면 철벽이 아니라 그냥 마음이 철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의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