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37)

100화.

“내가 네 냄새도 맡을 수 있다는 거는.”

르네는 <탑의 주인>의 손을 잡아당겼다가, 느릿하게 밀어냈다.

“리안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는 뜻 아니겠어?”

르네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음악도 끝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대로 못 박힌 듯,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그 계집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내게서?”

“그래.”

그동안 르네가 긴가민가했던 이유는, <탑의 주인>이 철저하게 리안의 기척을 숨기려고 발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탑의 주인>은 자신의 기척을 숨기려고 했다. 그러자 자연히 진정한 주인인 리안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느껴져, 지금 이 순간도.”

르네는 리안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았다.

“이 안에 있는 리안이.”

“너…!”

“리안.”

<탑의 주인>이 뭐라고 지껄이든, 르네는 리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아직 거기에 있는 거 알아.”

르네가 그 오랜 세월을 버텼던 것처럼.

누군가가 너희를 구하러 오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너도 그 안에서 버티고 있었을 텐데.

그동안, 확신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구하러 갈게. 조금만 버텨.”

하지만 이제는 더 늦지 않을게.

***

다른 사람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탑의 주인>의 잠식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리안 카리스.

그녀가 어떤 사람이던가.

태어났을 때부터 성녀의 운명을 타고나, 자라기를 성녀로 자랐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혼.

신이 제국을 위해 안배한 희망.

그게 리안의 수식어였다.

그러나 사실 리안은 그런 수식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행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행하는 것조차 당연했다.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돕는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최선을 다해 돕는다.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러나 당연한 일들을 하면 할수록 리안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세상은 그녀의 당연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녀를 그저 당연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래서 리안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더 많은 도움, 더 많은 헌신, 더 많은 봉사.

‘당신은 성녀니까.’

‘당신은 우리를 돕기 위해 신이 빚어낸 존재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연한 것을 행하는 것이지만, 리안은 점점 자신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리안이 있기에, 더욱 방만해졌다.

신이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었기에, 마음대로 살았다.

마음대로 살아도, 리안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니까.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런 의문이 들 때쯤, 리안은 누군가를 만났다.

‘너!’

다짜고짜 리안을 ‘너’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르네 마키어스였다.

‘너,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르네에 대한 이야기는 리안도 익히 들어 왔다. 악담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말렸지만, 들리는 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키어스의 수치. 마녀. 희대의 악녀.

그리고, 세상에서 리안을 싫어하는 유일한 사람.

‘저는… 잘나지 않았어요.’

그 사람에게 리안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뭐?’

그 솔직함에, 오히려 움찔한 것은 르네 쪽이었다.

리안은 씁쓸해하며 다시 대답했다.

‘사실,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성녀 같은 것도, 또 여러분이 원하는 그런 구원자도 아니에요.

저는 그저 당연한 것을 행하는 사람일 뿐.

그것이 당연하다 믿는 사람일 뿐.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네?’

그러나, 르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리안을 놀라게 했다.

‘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면서. 그런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고.’

그때부터였다.

‘아무것도 아니면, 비키면 되잖아. 왜 그렇게 미련하게 거기서 버티고 있냐고.’

르네 마키어스라는 사람이,

‘해야… 하니까요.’

‘해야 해?’

리안 카리스라는 사람의 무언가를 깨트린 것은.

‘세상에 해야 하는 게 어디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그래서 리안은 버티고 또 버틸 수 있었다.

끝도 없는 추악한 곳.

어둠도 아닌, 끔찍한 빛으로 가득한 공간.

<탑의 주인>의 저주받고 또 완전하게 침몰해 버린 영혼 한구석에서.

오로지,

‘아무것도 아닌 네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어.’

‘…이런 것을, 누구에게 맡기라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네가 생각해야지.’

‘그게 무슨….’

‘너만 성녀 할 수 있는 줄 알아? 나도 성녀로 태어났으면 성녀 했어. 네가 뭐 그렇게 대단히 특별하다고 너 혼자 다 해 먹을 생각만 해? 남들이랑 좀 나눠 먹어!’

다시 한번,

‘그럼, 르네가 해 줄 건가요?’

그 희망을 마주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래. 까짓것, 내가 해 준다. 됐니?’

<탑의 주인>의 영혼, 리안을 가둔 벽을-

‘…네, 르네.’

안쪽에서, 누군가가 조금씩 깨트리고 있었다.

“리안.”

그리고 또,

“너 아직 거기에 있는 거 알아.”

바깥에서도 그 벽을 두드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구하러 갈게. 조금만 버텨.”

***

음악이 끝나고 잠시 후.

휙.

이시르와 대화하고 있던 안테의 팔을 붙잡는 사람이 있었다.

“…?”

이시르와 안테는, 동시에 당황스러운 눈으로 상대방을 보았다.

뱀 가면을 쓴 사람.

체구가 작은 걸로 보아, 여성 같았다.

겁도 없이 소공작의 팔을 잡을 사람이 이 파티장에서 얼마나 있을까.

두 사람은 동시에 뱀 가면의 정체를 눈치챘다.

“리-”

이시르가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탑의 주인>이 한발 더 빨랐다.

<탑의 주인>은 이시르를 무시하고 안테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발코니 뒤로 밀어 넣었다.

“…허.”

남겨진 이시르는, 황당해,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저게 리안이라고?”

쾅.

한편. 발코니의 문 너머.

“카리스 영애?”

안테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리안을 불렀다.

그러나 <탑의 주인>은 대답하는 대신, 안테의 품에 푹 안겼다.

“카리스 영애. 지금은 연회 중입니다. 이러시면-”

“지금은 그저, 안아 주세요.”

“…!”

슬프고 처연한 목소리에, 그녀를 밀어내려던 안테의 손이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안테는 깊게 한숨을 쉬고, 자신에게 매달린 리안을 내려다보았다.

작디작은 사람이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제국을 책임지려 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안테는 결국 리안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

리안이 입을 열 기색이 없자, 안테는 다시 한번 강하게 말했다.

“이제 약혼한 사이가 아닙니까. 그런 사이에서 말하지 못할 게 있습니까?”

약혼이라는 단어에, <탑의 주인>이 빠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뱀 가면 뒤에 있는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안테는 조심스럽게 리안의 얼굴에서 가면을 떼 냈다.

리안의 눈물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 가면이 어쩐지 섬뜩하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면을 벗겨 내자, 안테가 잘 알고 있던 리안의 얼굴이 드러났다.

“정말로… 저와 약혼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런 건 싫어요.”

“…!”

리안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안테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그 눈물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애께서 약혼을-”

“소공작께서, 진심으로 이 약혼을 원하시지 않으면 저도 하고 싶지 않아요.”

“카리스 영애.”

“지금 말해 주세요. 지금이라면 파혼할 수 있으니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안테는 잠시 망설이다, 마지못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도 원하는 약혼입니다.”

그 말과 손길에, 리안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그러니 이제 말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서 그러셨던 겁니까.”

리안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전혀 망설이지 않았지만.

“사실 저, 방금 공녀님과 춤을 추고 왔어요.”

“…르네와? 하지만 어떻게 알아본-”

“저도 그건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를 대번에 알아보시고 춤을 청하셨어요.”

기척으로 알아낸 건가? 안테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시르와 자신도 리안을 찾지 못했었다. 르네는 어떻게 찾아낸 거지?

아니, 그보다.

“처음엔, 공녀님인 줄 몰랐었는데…. 저를 협박, 하시고, 그러셔서….”

어떻게 전하와 내가 당신을 찾아내지 못한 거지?

등골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소공작님?”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르네가 어떻게 협박을 했다는 겁니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안테는 가면으로 자신의 표정을 숨겼다.

그런 안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와 소공작님께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간신히 건진 목숨, 아까운 줄 알라고 하셨어요….”

정확히 르네가 했을 말이었다.

‘과거의’ 르네가.

그러나 지금의 르네도, 저렇게 말을 할까.

안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저, 소공작님과 공녀님 사이를 갈라놓고 싶지 않아서… 정말로 말씀드리지 않으려 했어요. 하지만….”

안테의 마음은 정확히 반반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현재의 르네를 믿는 마음과,

과거의 리안을 믿는 마음.

“이제, 저희는… 약혼한 사이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야 하니까.”

어떤 것을 따라야 할까, 나는.

“제, 제가 괜한 말을 했죠. 역시….”

“아닙니다.”

안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셔야 했을 말씀이었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를 믿으시는 건가요?”

신뢰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품에 안겨서.

그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안테의 갈라진 심장을 내리꽂는 게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꿈꿔 왔었나.

안테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네. 어떻게 제가 리안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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