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37)

104화.

“증거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르네는 품속에서 종이를 팔랑, 흔들었다.

“있어, 여기.”

순식간에, 사람들의 눈은 르네의 손에 쥐어진 종이로 향했다.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하며.

‘아니, 정말로 증거가 있었다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테의 말을 들으면서도, 르네의 결백을 믿진 않았다.

조금 긴가민가하는 정도에 그쳤지.

아무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안 성녀가, 사실은 성녀가 되기 싫었다니.

그런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증거가 있었다고?

그리고 그 증거가 마키어스 공녀의 손에 있다고?

대체 어떻게?

수백 개의 의문이 화살이 되어 르네를 겨냥하고 있었다.

르네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혀를 찼다.

쯧.

일단 퀘스트나 <탑의 주인>이 하는 꼴이 꼴 보기 싫어서 내가 이렇게 나서긴 했는데….

사실 르네는 일이 이렇게 되는 게 썩 기껍진 않았다.

결국 인간들의 추악한 본성들에 휩쓸리는 것 같아서.

“네가 내게 직접 써서 보낸 편지야, 리안.”

그리고 그 본성 때문에, 리안과 르네 사이에 오간 개인적인 편지를 드러내는 게 달갑지 않아서.

“…!”

순식간에, <탑의 주인>의 안색이 나빠졌다.

<탑의 주인>은 리안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저 편지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르네가 갖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 편지일 리가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는, 언제나 불에 태웠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그것도, 르네의 요구로.

그런 편지가 있었다면 진작에 활용했겠지.

멍청이처럼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건데.

“왜 그렇게 생각해?”

“저는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없으니까요.”

“이게 무슨 편지인 줄 알고?”

르네는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미소 지었다.

“저는 공녀님께 편지를 쓴 적 자체가 없으니, 어떤 편지든 상관없죠.”

“너와 내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지.”

많지 않다 뿐일까, 너무 적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딱 한 명 있긴 있더라고.”

“!”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탑의 주인>은 움찔했다.

“너도 아는 사람일 거야.”

르네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까딱, 했다.

“이제 나와, 탈리아.”

“!”

그 말에, 가면을 벗고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탈리아 키프로스?”

<탑의 주인>의 옆에 있던, 마키어스 공작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마키어스 공작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일전, 탈리아와 르네 사이에 있었던 ‘소란’에 대해서는 그도 전달받은 바 있으니까.

하지만.

저 영애가 갑자기 여기서 왜…!

탈리아는 결연한 얼굴로 숨을 들이쉬더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의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너…!”

<탑의 주인>은 눈을 부릅떴다.

“두 분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어요. 제가 직접 목격했어요.”

진정으로, 개똥도 약에 쓰이는 순간이었다.

***

그러니까 이렇게 된 일이었다.

안테, 세딘, 르네 세 사람이 회장에 다시 돌아오고.

<탑의 주인>이 르네를 끌어내리겠다는 결단을 말하고.

또 한 사람이 나름의 결단을 내렸다.

“공녀.”

“!”

르네는 가면을 쓴 자신을 대번에 알아챈 것에 놀라 뒤돌았다.

대체 누가 나를 알아본 거야?

뒤를 돌아보니, 커튼 사이로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르네는 곧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많이 익숙한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황녀…전하?”

“다시 앞을 봐.”

“예?”

“지금 우리는 대화하는 게 아니야. 알겠나?”

“…?”

하지만 대화하고 있잖아요.

르네는 황당했지만 순순히 이딘의 말대로 뒤돌았다.

이딘은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없어. 그러니 잠자코 듣기만 하게.”

뭐?

뭐가 시간이 없다는 거야?

르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딘은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멋대로 말을 이었다.

“리안 성녀가 자네를 치려고 하네.”

“어… 그걸 왜 제게 말씀을…?”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듣기나 해.”

꾸중 들었어….

누군가 자신한테 명령하는 게 별로 익숙하지 않은 르네인지라, 조금 뾰로통해졌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딘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라면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르네는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리안 성녀는 지금 성력이 없네. 그리고 그걸 자네 탓으로 돌릴 거야.”

“아니, 그게 왜 내 탓…?”

“대처할 방법을 생각해 내. 당장.”

르네는 옆에 서 있던 세딘을 쳐다보았다.

저걸 어떻게 해결해?

세딘도 심각한 눈으로 르네를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자세히 좀 말해 보세요. 뭐 어떻게 내 탓을 하겠다는 거야?”

르네의 말에, 이딘은 짧게 요약해서 설명했다.

르네와 이시르가 리안을 배신하고 연인 관계로 이어져서, 리안이 크게 상심했다고.

그리고 그 상심 때문에 악한 마음을 품게 되어 성력을 잃었다고 말할 거라고.

진짜 말도 안 되는 궤변인데, 진짜 말도 안 돼서 오히려 통할 것 같았다.

망했다.

르네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 언제 그럴 건데요?”

“아마도 10분 이내로.”

뭐?

르네는 기함을 했다.

10분 만에 그런 걸 어떻게 대처해!

“그걸 10분 만에 어떻게 대처해요?”

“머리를 굴려. 당장.”

아니, 내가 무슨 계략 기계야? 누르면 다 나오게?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초감각을 켜라고 충고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