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르네!”
찢어질 듯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모두 방 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르네 마키어스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원래 르네에게 배정된 방이 아닌, 훨씬 넓고 더 좋은 방.
그 방에는 안절부절못하는 백작 부부와, 세딘, 이시르, 백작가의 주치의, 그리고-
“기이한 일입니다. 특별한 외상이라거나, 내상은 없는데 의식을 되찾지 못하시다니….”
의식이 없는 르네가 있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백작에게 말했다.
르네는 현재 의식을 잃어, 침대 위로 옮겨진 상태였다.
세딘과 이시르가 양옆에서 그녀를 지키고 서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힘 있는 두 사람이 흉흉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에, 주치의의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제 분야가 아닌 듯합니다.”
“그, 그대의 분야가 아니라니?”
“신전 쪽에 부탁을 해 보시는 게….”
“!”
신전이라는 말에, 백작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일이 커져도 제대로 커지고 있었다.
만약 신전 측에서 사람이 나오면, 르네가 의식을 찾지 못하는 이유가 저주 때문인 것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황태자나 세딘이 그 저주의 원천을 조사하려 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끝장이었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건, 백작만이 아니었다.
백작 부인 또한 새하얗게 질려선 덜덜 떨고 있었다.
“신전이라. 짐작 가는 바라도 있는가?”
“그게….”
이시르의 질문에, 주치의는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황태자의 질문이라지만, 일단 고용주는 백작이니까.
하지만, 이시르는 그것조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한 번 더 강하게 물었다.
“카리스 백작령에서는 황족을 기만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황태자가 질문하는데도, 백작의 눈치를 더 살피는 것을 보면.”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치의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신관님들의 힘을 빌려 보시는 것을 추천 드린 것뿐입니다. 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시르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부르면 되겠군.”
“그건…!”
백작이 바로 안 된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안 된다고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부인만 노려보았다.
애초에 자신은 반대했던 계략이었다. 아무리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도 그렇지, 제 영지를 구하러 와 준 사람에게 저주를 거는 사람이 있나?
사실 백작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말리려 했다.
하지만 사람이 딸과 생이별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생긴 광기는, 어떤 것으로도 말릴 수 없었다.
그가 방만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 커질 줄 알았으면 부인을 가둬서라도 막았을 텐데.
백작은 침음을 흘렸다.
그가 그러든가 말든가, 이시르는 금방이라도 신관을 부를 것처럼 문으로 향했다.
그에 당황한 백작이 무릎이라도 꿇으려는 순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
세딘이 입을 열었다.
“아마도 공녀님께서 이렇게 되실 때까지 참으신 이유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겠습니까.”
“…흐음.”
이시르는 그 말에 흔들리는 듯,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몸을 다시 돌렸다.
“어쨌든 저희는 손님인 입장입니다. 공녀님께서 병이 나셨다는 소문이 퍼지면, 공녀님뿐만 아니라 백작님께서도 난처해지실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공녀님께선, ‘좋은 친우’인 리안 카리스 영애의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중병도 참으셨던 겁니다.”
세딘이 교활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좋은… 친우?
백작은 잠시 본인의 귀가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했다.
세상이 잘못 굴러가도 그렇지, 리안 카리스와 르네 마키어스가… 좋은 친우?
“그렇지 않습니까, 백.작.님?”
그러나 쐐기를 박듯이, 세딘은 백작에게도 동의를 구했다.
카리스 백작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신이 주신 두 번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안시라드 경의 말이 백번, 아니, 천 번이라도 옳으십니다! 우리 리안과 공녀님이 아주아주 좋은 친우 사이라는 건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그런 명명백백한 진실이지요!”
숨 한 번 안 쉬고 내뱉어진 말에, 이시르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목숨 한번 건져 보겠다고 참 애쓴다.
“뭐… 솔직히 마음에는 안 들지만, 공녀의 본뜻이 그런 것이라면 존중해 줘야겠지.”
이시르는 짐짓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짜 본론은 바로 뒤에 있었다.
“그나저나, 두 사람이 좋은 친우라는 것을 백작도 알고 있는 줄은 몰랐군.”
“…!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제가 리안의 아비인데요.”
하, 하, 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커다란 방에 울려 퍼졌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백작 부인은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모욕감이 섞인 얼굴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공녀에게 저주라도 걸었다는 혐의가 씌워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리안의 명예도 난처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백작이 모두가 듣는 앞에서 공표해 줄 수도 있겠군?”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카리스 백작은 얼이 빠진 채로 되물었다.
“아니, 그렇게 명명백백한 사실이라면 모두에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그렇지요.”
백작은 얼떨결에 대답해 놓고, 정신을 차려 다시 물었다.
“한데 그것은 왜…?”
“아, 그대는 사교계를 멀리하여 잘 모르나?”
이시르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에 가면무도회에서, 리안과 르네가 좋은 친우 사이라는 것을 말했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믿지 않더군.”
당연하지! 그걸 누가 믿냐!
백작은 속으로만 부들부들 떨며 항의했다.
“그러니, 리안의 부친인 그대가 직접 말해 주면 누군들 믿지 않겠나. 그렇지?”
“그, 그렇지요….”
“그러면 당장에라도 말해 주면 좋겠군. 공녀가 깨어날 때쯤,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말이야.”
완패였다.
백작은 무릎을 꿇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무릎을 꿇다 못해 박살 낸 기분이었다.
그렇게 꿇려진 마음으로 올려다본 황태자와 용병왕은-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전하. 이제 두 분 사이를 가지고 트집 잡는 멍청한 인간은 없겠군요.”
“그렇지. 이제 트집 잡는 놈이 있으면 그놈의 목을 잡아 줘야겠지.”
악마들 그 자체였다.
***
홍홍홍홍.
하하하하.
후후후후.
이게 무슨 소리냐고? 어디 지옥에서 끓어오르는 소리냐고?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소리는 바로-
“기막힌 계책이었습니다, 르네.”
“나도 알아.”
“대체 공녀는 어디서 그런 못된 것만 배워 온 거지?”
“불만 있으세요?”
“아니, 이것마저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들어서.”
다시 기묘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랬다.
이 모든 건 나쁜 경찰, 착한 경찰 작전이었다!
“하여간 사람 무시해도 유분수지.”
르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고작 그딴 저주에 내가 걸릴 거라고 생각하다니.”
시간을 잠시 되돌려 보자. 처음 르네가 방에 발을 들이민 그 순간으로.
***
“이걸로 그냥 역으로 엿 먹이죠, 뭐.”
그런데 어떻게 엿 먹이지?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뿅!
뭔가가 튀어나왔다.
바로,
“…뭐야, 넌?”
아주 작은 마족이었다.
[…이, 인간…님?]
그랬다. 이 저주받은 방은, 하도 저주가 널려 있다 보니, 지옥의 매우매우 약한 축소판 버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마족이 자연 발생해 버린 것이었다!
물론 워낙 약한 저주들이다보니, 발생한 마족도 아주아주 약한 마족이었다.
[…왜, 왜 인간…에게서 마, 마왕님의 기, 기운이 느, 느껴지지…요?]
르네의 정체도 몰라서 벌벌 떨 정도로 약한 마족.
[<유혹의 군주>님이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자신의 존재감을 진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