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탑의 주인>은 패배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승리하고, 짓밟고, 종말을 가져오는 존재로 탄생했으니까.
<탑의 주인>이 만들어진 것은 이 세계에서 가장 지고한 존재의 의지였다.
모든 것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려는.
누군가는 그 존재를 신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그 존재를 시스템이라 불렀다.
하지만 <탑의 주인>은 그 존재를 ‘규칙’이라고 불렀다.
세상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규칙.
그래서 그 규칙이 만들어 낸 <탑의 주인>은 스스로가 질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이영을 만나기 전까진.
분했다.
이영에게 졌다는 사실이 분한 게 아니었다.
무조건적으로 공평한 줄 알았던 ‘규칙’이 이영에게만 관대하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건 어떠한 배신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분노를 완전히 삭이기도 전에, <탑의 주인>은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떴다.
그것도, 이영과 함께!
그제야 <탑의 주인>은, 어쩌면 ‘규칙’이 이영에게 꼭 관대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이영에게 큰 증오를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유야 어쨌든 그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고 <탑의 주인>은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안의 몸은 생각보다 너무 큰 저항을 했고, <탑의 주인>은 또다시 실패했다.
그래서 <탑의 주인>은 결정했다.
이 몸을 버리겠다고.
버리고, 탈피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그래서 <탑의 주인>은 자신의 대적자를 마주했을 때,
[나와 작은 내기를 하자꾸나, 이영.]
기껍게 웃을 수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임을 알았기에.
***
콰콰콰콰쾅-!
온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두 남자는 반사적으로 말을 버리고, 등을 맞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면서, 암흑에 눈을 익혔다.
“뭔가 보이나?”
“안 보입니다.”
“젠장.”
단순한 어둠은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들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앞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이건 무언가가 그 이상의 힘으로 두 남자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닿는 이 등의 주인도 보이지 않을 정도니까.
“기척도 들리지 않는군.”
오감이 차단된 건 아니었다. 서로가 느껴졌으니까.
그 말은 지금-
“온다.”
쌔애애액!
카가강----
먼저 막은 건, 이시르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은 것이었다.
“뭔지 알겠습니까?”
“전혀.”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두 남자가, 동시에 한 존재를 상대하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니.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은독수리궁에서 마주쳤던 그 존재와 가깝다는 거죠.”
두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재앙의 날.
세상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던 르네가 쓰러지고, 모두가 무릎 꿇었던 그날.
은독수리궁에서 마주했던 그 존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족과 싸워 본 적이 있나?”
“그때 딱 한 번뿐입니다.”
애초에 그게 마족인지 확신도 들지 않지만.
세딘은 일단 대외적으로 그 존재가 마족이라고 발표하긴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믿진 않았다.
그저 르네가 그렇게 말해서, 따른 것뿐.
세딘도 알고 있었다.
르네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숨기고 있는지.
왜 숨기는 건지, 무엇을 숨기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딘은 단 한 번도 르네에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건 단순히 그가 르네를 사랑하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르네가 그 비밀을 간직하는 이유가, 르네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너는 정말로 그게 마족이었다고… 믿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진실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홀로 끔찍한 진실을 짊어지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러겠는가.
“…옵니다.”
그래서 세딘은 르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어, 이젠 가련할 지경인 것들아.]
“!”
“!”
그러나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개자식. 그때 그놈이구나. 네놈이…!”
이번에는, 그가 르네를 지킬 것이다.
세딘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그 존재를 응시했다.
그리고 검을 바로잡았다.
“이름을 말해라.”
[내 이름이라고 했느냐, 인간?]
광포한 웃음소리가 어둠을 타고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심장을 쥐어짜 내는 것 같은 공포가 밀려오는 소리였다.
[감히 네가 내 이름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히 네가!]
“말해라, 그 값싼 이름을.”
쿠구구구구궁-!
존재에 대한 부정에, 공기마저 분노하듯이 떨렸다.
피부로도 생생히 느껴지는 분노의 양에, 두 남자는 침음을 삼켰다.
두 사람의 힘을 합쳐도, 승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때, 순식간에 공기가 부드러워지더니-
[그렇게 나의 이름을 묻는다니, 대답해 주는 것이 맞겠지.]
어둠 사이로 무언가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을 가르고 태어난 그것은, 빛도 또 다른 어둠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회색의 무언가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지독하게 고독한 무언가.
오히려 그 모호함이 주는 불안정성이 두 남자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잘못된 존재였다.
아예 태생이 잘못된 존재임이, 느껴졌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존재이기에…!
두 사람은 검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두 남자가 어떤 발악을 하든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잔잔히 떨 뿐이었다.
그것은 기묘하게 미끄러지듯- 박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재앙 그 자체의 탄생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음에도, 두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것의 떨림을 목도할 뿐.
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불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종말께서 너를 맞이하러 오셨는데,
이윽고 떨림이 멎었다.
-너는 그것을 구원이라 부르게 되리라.
그리고 ‘그것’이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두 남자는 그것이 입을 벌리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의 이름은-]
그때,
콰직, 하는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
바로 세딘이 자신의 갈비뼈를 부수는 소리였다.
이시르는 그 소리의 처절함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이런 미친놈.
이시르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그렇지, 자기 갈비뼈를 저렇게 인정사정도 없이 부수는 놈이 어딨단 말인가.
“저것이 우리를 현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딘의 입장도 절박했다.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세딘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리안 성녀의 몸이 아닙니다.”
“그렇군.”
“실체가 아닙니다.”
“…본체는 숨기고 있다, 이건가.”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이는 저것은 허상이다.
허상과 싸워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일단 이 허상 마법에서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군.”
그 말에, 세딘은 설산에서 결계를 가를 때처럼 집중하기 시작했다.
허상이다.
전부.
“전하.”
“왜.”
“그런데 말입니다.”
이시르는 다급한 와중에도 짜증스럽게 세딘을 돌아보았다.
세딘은 완전히 굳은 채 서 있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말이 없지?”
“전하는…”
“뭐?”
이시르는 얼굴을 구기고 되물었다.
“실체입니까?”
쩌적.
세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이시르가 그대로 갈라졌다.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하하하하하하!
-눈치가 빠르구나, 인간.
“이 개….”
세딘은 혀를 꽉 깨물었다.
이시르였던 것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래성처럼.
그러나 그를 둘러싼 어둠은 무너질 줄을 몰랐다.
세딘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을 떴던 ‘그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분위기를 내던 것도, 기껏해야 허상이었던 건가. 세딘은 허망한 한숨을 내뱉었다.
눈앞에 보이는 적도, 이시르도 실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어디지?
언제부터 실체가 아니었고, 어떤 것이 실체이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가련한 인간아. 너는 속고 있다.
그때, 귀의 바로 옆에서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나긋나긋,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천사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네가 사랑하는 그 아이는, 네 생각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 아이는 너를 속이고 있어.
세딘은 눈을 감았다.
-너는 그 아이에 대해서 무얼 아느냐? 그 아이는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있다. 너는 심지어 그 아이의 진짜 이름마저 모르지 않느냐?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딘의 의심을 자극하는 말들이었다.
세딘의 이성이 계속해서 세딘에게 제시했던, 의문들이었다.
사람을 절대로 믿지 않던 그의 본성이, 그에게 속삭이던 말들과 똑같았다.
-네가 나의 종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네게 내 모든 것을 보여 주고,
르네.
-또 너를 구원하리라.
당신께 가려면 나는.
-그러니 그 아이를 놓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보이느냐, 이영? 네 종이 네게 기도하고 있구나! 네 진짜 이름도 모르는 너의 종이!
계속해서 광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 음절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기를 품고 있어, 세딘의 살을 갈랐다.
어찌나 깊이 갈랐는지, 뼈가 드러날 정도였다.
그러나 세딘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허상이기에.
-이곳에서 나가고 싶느냐, 너 죄 없는 인간이여?
세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통이 계속되어도, 그는 천천히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더욱 강한 힘이 그의 온몸을 꿰뚫었다.
-나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고, 점점 더 커졌다.
마치, 조급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 있는 나를 찌르는 것뿐.
그 말이 끝나자, 눈을 감고 있는데도 바로 앞에 있는 ‘그것’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이.
세딘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그래! 나를 찔러라! 나를-
그리고, 자신을 찔렀다.
-안 돼애-!!
아마도 온기가 느껴졌던 것 같다.
자신을 찌르던 순간에, 세딘은 그렇게 생각했다.
뭔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제 피의 온기리라.
세딘은 목을 타고 올라오는 피의 감각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곳에는 어둠이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이 멍청아. 왜 나를 찌르지 않고…! 왜…!”
그의 빛이 있었다.
세딘은 말했다.
“제가 어떻게 르네를 찌르겠습니까.”
역시 내 기도를 들어준 것을 보면, 당신은 나의 신이 맞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