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37)

117화.

-르네!

르네와 세딘이 서로에게 쓰러지는 그 순간, 할란은 마법으로 두 존재를 받쳤다.

-어딜!

그리고 곧바로, 도망치려는 <탑의 주인>에게 결박의 주문을 날렸다.

[이건 네 일이 아니다, 균형의 수호자!]

리안의 몸으로 도망치려 했던 <탑의 주인>은 이를 부득, 갈며 주문을 풀었다.

[네가 수호해야 하는 건, 이 세계의 일뿐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할란은 다시 한번 <탑의 주인>에게 용언을 읊었다.

부정하고, 사악하고, 악의적인 것을 굴복시키는-

[그럼 왜 끼어드는 것이냐, 회색의 불이여?]

-….

할란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스스로 몇 번이고 묻지 않았나.

왜 이렇게까지 원칙을 어겨 가면서, 르네의 곁을 지키는지.

이 세계의 일이 아닌, 여러 세계에 걸친 일에 끼어들게 되는 건지.

-이 세계의 일이 아닐지는 몰라도.

그러나 결국 할란은 답을 알아냈다.

-나의 일이니.

할란은 폴리모프를 풀고 본체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심장에서부터 비롯된, 겁화를 <탑의 주인>에게 쏟아부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불을 마주하며 <탑의 주인>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된 게 신의 종이라는 것들은 이 세계에서조차도 나약한 건지.]

<탑의 주인>은 비웃음 가득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몸은, 조종하긴 쉬워도 너무나도 나약하다.

강한 것만 따진다면, 저것의 몸이 나쁘진 않았는데.

<탑의 주인>은 어느새 구에서 풀려난, 의식이 없는 리안의 몸을 보았다.

흐음.

<탑의 주인>은 고개를 들어, 르네와 자신이 한 계약서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아직 ‘계약’은 시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라지지 않은 계약서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계약서’는 지금 둘 중 누가 더 많이 규칙을 어겼는지 셈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과연 ‘계약’은 어떻게 판단할까.

만약, 계약 자체가 무효가 된다면- 도로 리안의 몸을 차지할 수 있다.

그럼 다시 저 미친 용과 싸울 수 있지. 싸우기만 할 수 있을까, 짓밟아 줄 수도 있었다.

결국 또 도박이었다. 신께서 이미 정답을 정하신 도박.

<탑의 주인>은 기꺼운 마음으로 두 팔을 벌렸다.

[와라, 겁 많은 존재의 겁화여!]

운명은 누구의 편일까, 이영.

너는 알고 있느냐?

-이 더러운 존재 주제에.

화아악!

할란이 내뿜은 불길이 <탑의 주인>의 현재 몸을 덮쳤다.

바다도 녹일 수 있을 것 같은 불길이 용의 형상을 하고 위로 솟구쳤다.

그에 따라, 허공에 떠 있던 ‘계약서’도 불살라지고-

[하하하하하!]

또다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불길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

할란은 그 존재를 질린 눈으로 보았다.

리안의 몸이었으나, 그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특악한 것이 들어 있는, 그 존재를.

[결국 또 신께선 우리 둘 모두를 택하셨구나, 이영!]

저런 미친놈.

젊은 드래곤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내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오게 하는구나.

르네가 왜 저놈이라면 치를 떠는지, 알 것 같았다.

나름대로 오래 살았다고 자부했건만, 저렇게 그를 질리게 만드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을 이어 가 드려야겠지!]

<탑의 주인>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브레스를 내뿜으려는 할란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클루드 영지의 성 위로 커다란 구름이 몰려들었다.

[멈춰라, 균형의 수호자여.]

할란이 멈칫한 사이, <탑의 주인>은 말을 이었다.

[이것은 너의 일이 아니다. 나의 목적은 오로지 이영의 파괴뿐.]

처음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탑의 주인>은 자신의 명줄이 그렇게 길게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 세계에서 그는 그의 힘과 목숨이 되어 줄 추종자들도 적었고, 완벽하게 적합한 몸도 찾지 못했다.

원대한 목표를 이룰 때까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복수라도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닐까.

그는 악에 받친 숨을 몰아쉬었다.

[약속하겠다.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다른 인간들은 해치지 않아.]

-이영의 주변인들도 해칠 것이지 않느냐!

할란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탑의 주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태도였다.

[그래서? 인간 몇의 목숨이 수천, 수만 명의 목숨과 바꿀 수 있단 말인가?]

-….

[인간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하지만 너는 아니지 않느냐. 균형과 진실을 보호하기 위해 빚어진 존재여.]

정확히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할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탑의 주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쓰러진 이시르가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너부터이다.]

<탑의 주인>은 손에 힘을 주어, 이시르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조여지는 목 때문에 창백해진 이시르의 얼굴을 보며, <탑의 주인>은 환희에 찼다.

그러나, 이시르의 목숨과 <탑의 주인>의 환희가 치솟으며 마주한 그 순간에-

쿵.

익숙한 진동이 울렸다.

[안… 돼!]

<탑의 주인>은 현실을 부정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방금 느꼈던 진동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쿵.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오로지, <탑의 주인>의 영혼에서만.

<탑의 주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앞으로 쓰러졌다.

할란은 영문 모를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때도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탑의 주인>의 손에서 이시르를 구해 내고, 세딘, 르네, 이시르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그러나 상황이 끝난 건 아니었다.

할란은 <탑의 주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탑의 주인>은 온몸을 뒤틀면서 발악하고 있었다. 리안의 작고 가는 몸에서 뼈와 핏줄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어찌나 고통스럽게 뒤틀리고 있는지, 온몸에 피멍이 들고 있었다. <탑의 주인>은 이제 자신을 보호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

할란은 안쓰러운 눈으로 리안의 몸을 보았다.

그에게는 보였다.

저 안에 있는 리안의 영혼이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반항하고 있는지.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서 발악하고 있는지.

죽음이 오히려 자비로 느껴질 정도로.

사실 <탑의 주인>이 저렇게 약해진 상태라면, 당장이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할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탑의 주인>을 죽이면, 저 몸의 주인도 죽는다.

르네는 저 몸의 주인을 아낀다.

그러니 지금 해야 할 일은-

-르네.

르네를 깨우는 것이다.

할란은 르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의 혼자 타는 불꽃.

이젠 다시 타오를 시간이야.

***

아.

나 또 의식 잃었구나.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에서 눈을 뜬 르네의 첫 생각이었다.

성좌들이 갇혀 있다는 ‘허무의 공간’이 딱 이런 느낌일까?

아무것도 없어서 오히려 수억 가지의 감각이 밀려오는 곳.

의식을 잃었으면, 또 성좌들 걱정하겠네. 르네는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면 잔소리 좀 듣겠군.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애가 죽게 생겼는데, 내가 뭘 어쨌어야 했어?

아직 혼나지도 않았는데, 변명거리부터 생각하는 르네였다.

“…애초에, 날 버리지 않았으면 됐잖아.”

르네는 혼자 투덜거렸다.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목숨을 내던지는 건, 훤원,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없어서 내가 나를 제어하지 않잖아.

당신의 잔소리가 없어서.

-그거, 내 이야기느냐?

!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르네는 급히 뒤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르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냐 묻는다면, 르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을 택할 것이었다.

‘세계관 최강자는 나지.’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을 묻는다면, 르네는 고민하다 세딘을 고를 것이었다.

‘애가 귀엽잖아.’

그러나 만약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스?”

그건 망설임도 없이 <유혹의 군주>였다.

아스가 여기 왜 있어?

르네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실물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잠깐 두 눈이 의심될 정도로.

그러나 저 충격적인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처음 본 순간부터 공포도 잊고 그저 홀렸던 그 얼굴을.

-그래도 내 얼굴은 잊지 않은 모양이로다.

“장난해?”

당신 이름은 까먹어도 당신 얼굴은 못 잊어 먹겠다.

르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잠깐. 이것도 내 무의식의 일이니까, 다 꿈 같은 건가? 가짜인 거야?”

-…내가 가짜이면 하느냐?

“그건 아니지!”

르네는 빠르게 <유혹의 군주>에게 달려가 안겼다.

“진짜 할배야?”

-할배라 안 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왔어? 아니, 누가 마음대로 남의 무의식에 오래? 어?”

반가운 마음에도, 나가는 말은 심술 맞은 말뿐이었다.

그러나 두 존재는 서로를 바라보며 허물없이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믿는 서로이기에.

“나 기절했지?”

-기절만 했을까.

“그래도 나 안 죽었나 봐.”

-그래. 아무도 영면이라는 축복을 받지 아니했다.

말을 배배 꼬긴 했어도, 르네는 대번에 그 뜻을 알아챘다.

다행이다. 아직 아무도 다치지 않았구나.

“그럼 여긴 어떻게 온 거야? 나 데리러 온 거야?”

-…데리러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구나. <유혹의 군주>는 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를 데리러 가는 것은, 불행한 일임을 알지 않느냐.

“왜 불행해, 그게.”

<유혹의 군주>는 르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르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배.”

-또 못된 단어를 쓰느냐.

“그림자가 생겼어.”

르네는 그의 발치를 가리켰다.

원래 마왕은 그림자가 없다.

그러나 그의 발치에는 아주 옅지만 태산 같은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르네는 그것을 보고 직감했다.

“여기 오는 데 대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른 거야?”

<유혹의 군주>는 기다란 속눈썹이 휘어지도록 살짝 웃었다.

-내 이름을 불러 주겠느냐?

“그거 싫어하잖아.”

마왕의 진명은 아주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마왕의 진명을 아는 이는, 마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왕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 아주 민감했다.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숨기는 경우도 허다했고.

그런 그가,

-그래도, 불러 주겠느냐?

그녀에게 간청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

살짝, 그의 어깨가 떨렸다.

아스모데우스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르네의 목소리가 달콤한 향이라도 되는 듯.

-이영.

“응.”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존재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돌아가자.

마음만 먹으면, 차원 몇 개 정도는 날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속고 싶은, 그런 미소였다.

그래서 르네는 한 번 더 속기로 했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자신을 구하러 온 그를 위해.

“응.”

한 번 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나의 잃어버린 영혼이여.

아스모데우스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가자, 그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자, 르네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이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아스모데우스는 알았다.

그녀가 이제 있어야 할 곳으로 갔음을.

이제 이곳에는 그밖에 남지 않았음을.

또 반복되는 허무의 공간이 쓸쓸했다. 그러나 아스모데우스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 너는 가야지.

그게 설령 우리를 갈라놓는다 해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