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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26/137)

126화.

데서스 대주교는 기본적으로 피곤한 것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길을 걷고 있었다.

바로, 우매한 인간들을 구원하는 길이었다.

벨루아의 은총을 따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데서스는 인간을 돌보는 삶을 살았다.

처음에는 그도 인간을 사랑했다. 아니, 지금도 인간을 사랑하기는 한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조금 변했을 뿐이지.

예전에는 그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그들에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올바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벨루아께서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단언컨대, 데서스는 그 방법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 중 하나였다. 평민 출신인 그가 대주교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운이 아니었다.

그렇게 20년째 인간에게 사랑을 쏟던 데서스는, 어떠한 존재를 마주한다.

바로 리안 카리스였다.

데서스는 리안이 벨루아가 말한 ‘인류를 위한 벨루아의 사랑’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인류를 향한 벨루아의 애정이 현신하면 딱 저렇겠지. 저렇게도 따스하고 올곧으며 무한하겠지. 데서스는 리안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벨루아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몰랐다.

인간들은 리안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리안을 갉아먹었다.

불행해지고 약해지는 리안의 모습은, 데서스를 갉아먹었다.

아, 정말이지…. 데서스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주교.”

그 순간,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트렸다.

“이제 나를 왜 찾아왔는지 말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딘 황녀.

한때는 그의 도구였으나, 이제는 그에게 등을 돌린 배교자였다.

“즐거우시겠습니다, 전하.”

데서스는 비릿한 미소를 자애로운 미소로 능숙하게 바꾸었다.

“투자가 잘 풀렸으니 말입니다.”

“….”

“아, 혹시 이미 알고 투자하신 건가?”

얼마 전, 르네 마키어스의 놀라운 활약은 황궁을 발칵 뒤집었다.

황제는 두려움에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고, 황태자는 연락도 닿질 않는다.

따라서 현재 황궁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이딘이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대주교.”

이딘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몇 년은 실패한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까.”

“….”

“이제야 좀 올바른 투자를 하고 있는 건데, 섭섭하게 그러시면 안 되지요.”

망할 황녀. 데서스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녀가 이렇게 쉽게 그를 배신할 줄은 몰랐다.

잘 세뇌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던 건지.

데서스는 짜증을 억눌렀다.

“직접 봐야겠습니다.”

“무엇을요?”

“아시잖습니까.”

이딘은, 아주 뻔뻔하고 태연한 얼굴로 어깨만 으쓱였다.

“직접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쪽으로 가시면 되지, 왜 여기로 오셨는지?”

“모르는 척하지 마십시오, 전하. 오늘 그녀가 황궁에 방문하기로 한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아, 거기까지 알고 오셨나요?”

“제가 뒷방 늙은이기는 하지만, 전하. 눈과 귀는 아직 쓸 만하답니다.”

쓸 만하다 뿐일까. 어지간한 젊은 사람보다 건강한 인간이.

이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황궁을 한번 정리하든가 해야지. 사방에 첩자 놈들이 깔려 있으니.

“그래요. 마키어스 공녀가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대주교와 무슨 상관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녀의 힘이 벨루아께 반하는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반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전에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성수를-”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노인네.

이딘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대주교의 입장이십니까, 교단의 입장이십니까?”

대놓고 교황 파와 대주교 파로 갈라진 교단의 상황을 지적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교황의 힘이 약해졌다곤 해도, 교황은 교황이었다. 대주교가 그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최소한 ‘대외적으로’는 그랬다.

“아, 제가 아직 전해 드리지 못했군요, 전하.”

데서스가 아주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교황 성하께서는 오늘 중으로 은퇴를 선언하실 겁니다.”

“!”

“성하께서도 오래 버티셨지요. 지병으로 그리 고생하셨으니 이제는 안식을 가지실 권리가 있으십니다.”

안식은 개뿔이. 당신이 강제로 쉬게 만든 거면서.

이딘은 애써 표정을 구기지 않으며 차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마음 같아서는 차 대신 술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대주교께서 그 자리를 이어받으시고요?”

“사실 진작 이어받았답니다.”

“!”

“이리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시끄럽게 굴고 싶지 않아, 즉위식은 교단 내에서 간소하게 했습니다. 고통받는 민초들이 워낙 많아 조용히 진행한 것이니, 부디 이해해 주시길.”

이딘은 이제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망할 인간. 이렇게 대놓고 교황을 제거해 버리다니.

이딘은 확실히 교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교황은 너무 대놓고 이시르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제거되어야 한다면 그건 이딘의 손에 의해서여야 했다. 이 위험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우가 가고 호랑이가 들어앉은 꼴이었다.

이거 원, 곤란하게 되었는데. 이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리하여, 제 입장이 교단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전하.”

“…경축드립니다, 성하.”

“그러니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서스는 교활한 눈을 빛냈다.

“제가 직접 그녀의 힘을 확인해야겠습니다.”

한때는 강직했을 그 눈을.

“확인을 해서, 만약 마족의 힘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럼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애초에, 어떻게 해 보실 순 있으시고?”

이딘은 가소롭다는 듯, 되물었다.

“교단의 이름으로 파문해야겠지요. 그리고 교단의 주적으로 지목해 처벌을 하고, 그 힘을 폐해야지요.”

“퍽이나 그게 통하겠습니다. 손끝 하나 대기라도 하면 다행이겠던데요.”

이딘은 대놓고 데서스를 비웃었다.

그러나 데서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세상을 등지고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전하.”

“글쎄요. 그건 적당히 강한 자에게나 통하는 말이지요.”

“…일단 확인부터-”

그때,

“확인?”

그의 뒤에서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벼락처럼 꽂혔다.

대체 언제…!

데서스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르네가 있었다.

“그런 건 당사자한테 물어봐야지.”

후비적, 르네는 귀를 팠다.

아주 그냥 남 뒷담을 깔 거면 좀 조용히 까든가. 온 세상 다 들리게 까면-

“왜 뒤에서 소곤거리고 난리인지.”

내가 듣잖아.

“이건 아주 무례한 행동이오, 공녀.”

데서스는 매서운 눈으로 르네를 노려보았다.

실로 악마 같은 능력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들이 몇 겹으로 마법 금지 주문을 걸어 둔 황궁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마법을 쓰다니.

마족이 아니고서야 이런 게 가능할 리가.

“무례?”

르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얘기하는 건 무례한 게 아니고?”

“그건 제국의 안녕을 위해-”

“우리 이제 서로 그런 가식은 접고 시작합시다.”

르네는 한숨을 쉬며, 이딘과 데서스 사이로 의자를 끌고 왔다. 그리고 털썩, 앉았다.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제국의 안녕, 인류의 평화,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말들.”

“마족들이나 할 법한 말을 하는군.”

[<유혹의 군주>님이 억울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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