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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37)

128화.

람디샤 제국의 황제, 아슈타르는 르네의 ‘정체’를 알고 며칠 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아니, ‘가짜로’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이딘에게 당분간 귀찮은 일들을 맡기기 위한 연기였다. 모든 귀족들이 불안감에 떨며 르네와 황제의 눈치만 보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딘 파의 절반은 이미 이시르에게 어떻게 해야 줄을 설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서 이딘은 거의 체념한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본인도 이제 르네에게로 갈아타려고 생각 중일 정도였지.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바로 황제였다.

황제, 아슈타르는 르네가 제 발로 황궁에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이딘을 내세웠다.

르네를 황제의 편으로 돌리라고. 이시르의 편이 아니라, 황제의 편이 되게 하라고.

본인은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지만, 이딘은 할 수 있지 않냐며.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아슈타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나 보군.

“흠흠, 마키어스 공녀를 이쪽으로 잘 끌어들였-”

“폐, 폐하…!”

그러나, 문 앞에 나타난 것은 이딘이 아니라 시종장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재상이 함께 있었다.

이 둘이 ‘동시에’ 급하게 나타난 것은 아주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슈타르는 일의 심각성을 느끼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황제의 질문에, 시종장과 재상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마족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드래곤도 껴 있고요. 두 마리나요.

심지어 폭풍도 오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의 말로는, 나라 다섯 개 정도는 금방 망하게 할 수 있을 규모라고 합니다. 이상하게 제국을 덮치고 있진 않은데, 제국 바로 위에 있다네요.

하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멸망하려는 듯합니다.”

슬프게도 이 말보다 더 정확한 말은 없었다.

***

그건 아주 기묘한 대치였다.

은독수리 기사단장 아르웬은, 정말 이렇게 기묘한 대치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녀는 검을 하늘에 겨누고 있었다. 이것부터가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결투에서 진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런데도 절대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르네를 보고 한번 느낀 감정이었으니까.

그러나 가장 기묘한 것은-

“경도 르네님의 힘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여기 있는 누구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딱히 불안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산나는 아르웬을 보면서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황궁을 지키는 두 명의 기둥.

아르웬과 수산나는 인류 최대의 위기를 마주하면서도 태연하게 대화나 하고 있었다.

“제가 제일 먼저 알았습니다.”

“알았으면 공유를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경.”

수산나는 안경을 쓴 코를 찡긋, 올렸다.

“르네님이 비밀을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그건 인류의 손해인데. 하다못해 제게는 말씀하셨어야죠.”

“르네님이, 비밀을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이래서 검 쓰는 인간들이란….”

수산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르웬은 울컥해서 수산나를 노려보았다.

“이래서 수식 쓰는 사람들은 안 되는 겁니다. 르네님이 명하신 건데 당연히 지켜야죠.”

“쯧… 이리 융통성이 없어서야…. 르네님께 수산나 마할이라는 아주 훌륭한 발 닦개가 있으니 써먹으라고 간언을 올렸어야죠.”

뭔가 이상한데.

아르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건 생각 못 했네요.”

“다음부터는 생각하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요. 참고하겠…습니다.”

수산나는 다시 한번, 쯧, 하고 혀를 찼다.

“내가 가장 먼저 줄을 섰어야 했는데… 쯧. 어쩌다 저런 곰탱이가 먼저 알아선….”

당신, 그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 인류 최연소 9서클 대마법사 맞아? 평생 모든 인간들을 멍청한 밥버러지라고 무시하던 그 사람 맞냐고.

아르웬은 처음 보는 수산나의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르웬이 아는 수산나는 평생 남을 깔보기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르네님이 괜찮다고 하신 거 맞습니까?”

“그래요.”

“그럼 괜찮은 거 맞네요.”

“당연하죠.”

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겨눈 검과 지팡이는, 어느새 슬쩍 내려놓고.

르네의 말은 법이요 진리였으니까.

***

그렇다면 법이자 진리께서는 뭘 하고 계실까.

뭘 뭐를 해. 졸지에 멱살 잡혀 대전에 끌려왔지.

‘긴급 대책 회의’라나 뭐라나.

르네는 귀를 후비적, 팠다. 오로지 황족들과 교황, 그리고 최고위 귀족들만 모인 긴급 대책 회의였다.

다들 죽는 게 무섭긴 무서우신가 봐. 무거운 엉덩이 여기까지 빠르게 끌고 온 걸 보면.

르네는 코웃음 쳤다. 한 58번 쯤 죽으면 죽는 거 안 무섭게 되던데. 다들 한번 58번쯤 죽여… 아니다. 마음 곱게 먹어야지.

이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공녀.”

“이제 평민이랍니다, 폐하.”

르네는 해맑게 웃으며 정정해 주었다.

황제는 이를 부득 갈았다. 이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가 차던지.

황제는 르네가 마키어스라는 성을 버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안테를 소환하려 했다.

그러나 안테와 키릴은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평소대로라면 노발대발하며 두 사람을 끌고 오라 했을 황제도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이시르와 세딘이 없는 지금, 두 사람이 수도 전력의 5할은 차지했으니까.

물론 안테와 키릴은 수도를 지킬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저 르네의 말대로 황제와의 대면을 피하고 있었을 뿐.

“르네 양.”

“네에.”

“현재 제국에 아주 크나큰 위기가 닥쳤는데 그대는 아주 느긋해 보이는군.”

황제는 노기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나 르네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당연하죠. 교황 성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느긋하지 않을 이유가?”

“….”

르네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눈이 매섭게 데서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그딴 말을 해서, 저 미친 인간이!’

‘우리 다 죽일 셈이냐! 죽을 거면 혼자 죽으면 되지!’

대충 그런 눈이었다.

데서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잘 좀 봐 달라며 허허 웃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자신의 탓만 하고 있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교황이 될 몸이시라며 굽실거리던 놈도 저기 앉아 있거늘.

“황녀가 이미 말했듯이, 교단의 입장과 황궁의 입장이 항상 일치할 수는 없다네.”

“폐하.”

데서스가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항상 신전의 눈치를 보던 황제도 이번에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짐의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소?”

“….”

데서스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지금은 그를 향한 모두의 반감이 너무 심하니까.

“여전히 우리 제국은 그대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네, 르네 양.”

“그래요?”

르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나요?”

“?”

“?”

이 무슨 어린이들의 ‘사랑해.’ ‘얼마나?’ 같은 대화도 아니고.

‘얼마나’가 왜 나온단 말인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의문이 가득했지만 잠자코 황제만을 쳐다보았다.

대답 잘하라는 의미였다.

“아주… 많이 필요하지.”

“그래요? 막 목숨도 바칠 정도인가요?”

“…누구 목숨?”

음, 0점짜리 대답.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저딴 것도 황제로 두는 민초들이 안타깝다며 한숨을 쉽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마왕들도 저러진 않는다며 고개를 젓습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정령왕이 저러면 정령들도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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