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한편, 어느 차원에도 속하지 않는 곳.
누구도 관심 갖지 않고,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곳.
그래서 이름조차 갖지 못한 곳에 어떤 ‘존재’가 있었다.
그 존재는 혼자서 써 내려지는 글씨를 보고 있었다.
르네는 이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한테 줄을 서야 하는지.”
그 글씨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르네 마키어스, 아니, 김이영, 아니, 르네 마키어스.
어느 쪽이어도 같은 사람이니까 별 상관없겠지.
그 존재는 시큰둥한 얼굴로 글씨를 읽어 내리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장난감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장난감이었는데, 자꾸 제멋대로 움직이려 들었다.
처음에는 그런 반항이 재밌고 즐거워 지켜보았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놀아 보라고 몇 번 눈감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그의 장난감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자꾸 그렇게 마음대로 놀면 재미없는데, 이영.]
‘존재’가 중얼거렸다.
[내가 너를 르네와 만나게 해 주었잖아. 내가 네게 르네를 구할 기회를 주었잖아.]
그러면 나머지는 다 내 말을 들어야지.
[내가 너희 둘 모두를 구해 줬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지?]
‘존재’는 은혜를 모르는 이영이 점점 짜증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존재’가 이영을 발견한 건, 아주 작은 우연에서였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영혼이 쪼개져서, 수만 개의 차원으로 나눠졌다.
오로지 ‘존재’만을 제외하고.
그는 온전한 채로 차원의 틈새에서 나머지 존재들을 관장하며 살았다.
감히 셀 수도 없는 시간 동안 그는 홀로 ‘온전’하다는 이유로 횡포를 부렸다.
그는 모든 차원의 생명들보다 강했고, 모든 차원의 신들보다 위대했다.
모든 것이 그의 발아래에 있었다.
그가 가장 온전했기에.
그러나 그는 곧 권태에 빠졌다.
온전하기에 오히려 지루했다.
그래서 그는 찾기 시작했다. 자신처럼 ‘온전한’ 존재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결국 찾아냈다.
완전히 온전하지는 않지만-
오로지 두 개로만 나뉘어진 한 영혼을.
그 영혼은 각각은 평범했으나, 반쪽임을 증명하듯이 완전히 반대되는 운명을 가졌다.
‘엄마. 내가 별로 잘난 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 딸인 거 하나는 좋다.’
하나는 잘난 것 하나 없으나,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운명.
‘…나도, 나도 오라버니들처럼 모든 것을 가졌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
나머지 하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절대로 사랑받지 못할 운명.
다른 영혼들은 수만 개로 갈라지고 찢어졌지만, 오로지 이 영혼만이 단 두 개로 쪼개져 있었다.
그래서 이 영혼은 모든 영혼 중에서도 가장 ‘온전’해 보였다.
물론 세상에 오로지 단 하나뿐인 ‘존재’보다는 훨씬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본 영혼 중에선 가장 온전해 보였다.
그러나 존재는 곧 실망했다.
[애걔.]
아무리 가장 적게 쪼개진 영혼이라 해도, 쪼개진 건 쪼개진 것이다 보니 아직 너무 약했다.
그와 대등해지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그는 아주 기나긴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나처럼 온전해지게 만들어 줄게, 이영, 르네. 너희들을 만나게 해 줄게.]
오로지 본인만을 생각한 계획을.
그는 두 개의 영혼이 합쳐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영은 사랑받을 운명이지만, 사랑을 하지 못할 운명이기도 했다.
르네는 사랑을 할 운명이었지만, 사랑받지 못할 운명이었다.
[…둘이 운명을 정확히 반반씩 나눠 가졌군.]
본래 한 영혼은 수만 개로 갈라지는 이유가 있었다.
하나의 영혼이 받을 고난을 수만 개로 갈라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영혼은 고작 두 개로 나뉜 덕분에, 고난도 고작 두 개로만 나뉘어졌다.
그래서 한 사람이 겪을 고난으로는 너무 큰 고난을 겪을 운명이었다.
[…분명히 둘 다 못 견디고 부서질 텐데.]
그러나 ‘존재’에게 그 고난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존재’는 이영과 르네가 받을 고난의 대부분을 없애 버렸다.
[내가 조금 가져가 주지, 뭐.]
이렇게 재밌는 장난감을 찾으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니까.
소중하게 대해 줄 거야.
안 부서지도록.
그러나 ‘존재’가 고난을 가져가 주어도, 두 사람에게 남은 고난은 너무나도 컸다.
결국 ‘존재’는 고민하다가 펜을 들었다. 아무래도 그가 이영과 르네의 운명을 다시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가 두 사람의 운명에 개입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인간들의 운명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거지?]
하지만 고작 인간 하나의 운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써 본 적이 없는 ‘존재’는 난감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빌리기 시작했다.
이영이 읽던, 소설-
‘S급 헌터는 회귀할수록 짱짱 세집니다.’를.
[얘는 뭐 이런 걸 읽는지 몰라. 그래도 뭐, 좋아하는 얘기니까 이걸 읽은 거겠지?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면 더 좋아하겠지?]
라고 중얼거리며.
[나한테 분명히 고마워하겠지?]
물론, 그가 자신의 결정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
[그나저나, 대체 어쩔 작정인데?]
허무의 공간.
<유혹의 군주>는 <악랄한 피의 교주>에게 물었다.
[…나도 모르겠느니.]
<악랄한 피의 교주>는 오랜만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아까 전, 이영은 그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르네를 찾았던 것처럼, 세딘과 이시르의 의식을 찾아서 되돌려 줘요.’
말이 쉽지.
<악랄한 피의 교주>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시르의 의식을 되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세딘은….
[그 망할 망아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악랄한 피의 교주>는 모든 차원을 찾다 못해, 이제는 차원의 틈새들마저 뒤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건드려 본 건 처음이었다.
차원의 틈새를 건드리면 시스템이 항상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스템은 이영의 반항에 정신이 팔렸는지, <악랄한 피의 교주>의 일탈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혼자 어디서 날뛰고 있겠지.]
<유혹의 군주>는 <악랄한 피의 교주>의 고통이 즐거운지 낄낄 웃었다.
[이영은 왜 매번 내게 이렇게 어려운 일만 시키는지.]
<악랄한 피의 교주>는 그렇게 투정 부리면서도, 입가에는 작은 미소를 띠었다.
[아마도 이 몸을 가장 신뢰하고 사랑해서겠지.]
[전혀 아니라고 본다만, 이 핏덩어리야.]
[어허, 어디 삿된 마귀 놈 주제에….]
두 성좌는 이내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에휴.]
그리고 <파도와 치유의 왕>이 멀리서 고개를 내저었다.
[이영이는 대체 왜 저것들과 계약한 건지.]
나 하나면 될 것 같은데.
<파도와 치유의 왕>은 휘하의 정령들을 시켜, 세딘의 이마에 생명력을 불어넣도록 했다.
하루라도 빨리, 헤매고 있을 세딘이 돌아오도록.
***
훅.
세딘의 이마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강가에서 불어오는 물기 어린 바람 같기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가득한 바람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개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르네.’
그가 현재 부유하고 있는 공간은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차원의 틈새였으니까.
왜,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강한 악의와, 아주 강한 계약의 힘.
그리고 그보다도 더 크나큰 의지.
세딘은 그 의지의 손아귀에 잡혀, 여기까지 끌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 들어온 공간 속, 그는 눈을 떴고-
[나는 너를 만든 적이 없어.]
세상에서 가장 삐뚤어진 존재를 마주해야 했다.
[내 이야기에는 너라는 주인공이 없었다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이 존재 그 자체였다.
흐려진 어둠 같기도 하고, 뭉개진 빛 같기도 했으며.
[이영이 나와 거래를 했기에, 너를 내 이야기에 껴 주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싫어.]
가느다란 희망 같기도 했고, 올바르게 뻗어 나가는 절망 같기도 했다.
[아주 이상하단 말이야.]
그 존재는 기이하게 움직이는 커다란 눈으로 세딘을 쳐다보았다.
이곳저곳, 면밀하게 살펴보는 듯했지만-
[나는 너를 만든 적이 없는데.]
사실은 그저 흘겨보고, 노려보고, 질시하는 것이었다.
[너는 왜 내 이야기에 존재하지?]
이야기?
세딘은 눈을 찌푸렸다.
[나는 네가 이영의 옆에 있는 게 싫어.]
처음으로, 이해가 가능한 말이 나오자 세딘은 흐트러졌던 정신이 돌아왔다.
이영?
르네의 다른 이름? 갑자기 그 이름이 여긴 왜-
[너는 르네의 삶에도, 이영의 삶에도 갑자기 생겼어.]
!
세딘은 눈을 부릅뜨고 ‘존재’를 마주했다.
르네!
이 기이한 눈은 르네를 알고 있었다.
[마치 버그처럼.]
‘존재’는 세딘이 듣든 말든, 계속 중얼거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놈이 나타난 후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사랑을 하지 못할 운명이었던 이영이 사랑을 하게 되고,
[하지만 나는 실수한 적이 없는데.]
사랑을 받지 못할 운명이었던 르네가 넘치는 사랑을 받게 되었다.
[어쩌다가 네가 생긴 거야?]
왜지?
왤까?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걸까?
‘존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이 모든 차원에 걸쳐, 그가 모르는 것은.
[대답해 봐, 세딘 안시라드. 아니면… 안세진.]
그래서 존재는 아예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버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