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귀족들과의 담판 아닌 담판이 끝나고, 르네는 바깥으로 천천히 나왔다.
귀족들은 웅성거리면서도 르네와 눈을 마주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를 따라오는 건, 이딘뿐이었다.
르네는 아무 말 없이 은독수리궁으로 걸었고, 이딘은 그 옆에서 함께 했다.
두 여자는 정말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딘의 궁, 응접실에 있는 안락한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처음 침묵을 깬 건 이딘 쪽이었다.
“결국 원하시는 것을 전부 얻으셨군.”
그렇게 말하는 이딘은 꽤 허탈해 보였다. 하지만 꽤 후련해 보이는 허탈함이었다.
그랬다.
결국 귀족들은 황제와 르네 중, 르네를 택했다.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황제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마족들과 드래곤이 더 위험해 보였다.
“글쎄요.”
르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하나가 남았잖아요.”
이딘은 그게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하요.”
“나겠지.”
정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동시에 말하고, 실소를 흘렸다.
“황위를 포기하라고 하는 건가?”
“어차피 가능성도 안 보이는데, 굳이 안 될 거 붙잡고 있는 이유가?”
이딘은 한숨을 쉬었다. 저런 되바라진 계집애….
“그대에게는 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겠죠.”
르네는 쉽게 수긍했다. 평생 준비한 것을 포기하라고 하는 내 쪽도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오라버니보다 내가 더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이시르는 내 손위 형제긴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인물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그럼 왜?”
이딘은 진심으로 물었다.
그럼, 왜?
“내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별 차이가 없어요. 전하가 황제가 되든, 이시르 전하가 황제가 되든 둘 다 그럭저럭 괜찮을 것 같아요.”
진심이었다. 르네가 보기에는 둘 다 황제가 되면 열심히 할 것 같았다.
“솔직히 둘 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둘 다 나름대로 잘할 것 같아요.”
각자의 방법으로 말이지. 둘이 사실 성격도 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르네가 보기에 두 사람은 영락없는 남매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이시르를 택했군.”
“미워도 어쨌든….”
어쨌든… 뭐더라?
르네는 딱히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다.
이시르는 나의 무엇이지? 내 친구? 아니, 친구는 아닌데….
…뭐지?
“솔직히 말해서, 르네 양. 나는 그대에게 협조할 생각이 별로 없었어.”
이딘은 무릎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런데 아르웬이 나를 설득하더군.”
솔직히 처음엔 황당했다.
‘전하.’
내가 기분이 상할까 봐, 그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저를 믿으십니까?’
어쩜 그렇게 꿋꿋하게 할 말은 다 하는 건지.
‘믿지.’
이딘은 완전히 긴장한 아르웬의 얼굴을 보고, 사실 아르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제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주 황당하고, 어이없고, 그러시겠지만-’
‘황위를 포기하라고?’
‘!’
아르웬은 속내를 들켰다는 얼굴로 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혹시 이딘이 많이 기분이 상했나, 눈치를 살피는 건 덤이었다.
자신의 충실한 기사를 보며, 이딘은 쓴 미소를 머금었다.
‘아르웬.’
‘네.’
‘내가 얼마나 황위를 원했는지 알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황제가 된다면, 이 제국을 바꿀 자신이 있었어.’
아르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딘을 어렸을 때부터 보필해 온 아르웬이 가장 잘 알았다.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전하, 그것이-’
‘그리고 그건 아마 그대가 가장 잘 알겠지.’
아르웬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간절한 분께 내가-
‘그러니, 그대의 말을 들어야겠지.’
‘전하.’
‘나를 가장 잘 아는 그대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말할 정도면. 정말로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아르웬은 완전히 굳어서, 이제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리고 이딘은 그런 아르웬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가장 충실한 기사이자, 세상에서 가장 강직한 기사를.
아르웬이 얼마나 이 말을 하기 어려웠을지 안다. 그리고 무슨 마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렇게 나를 위하는 아이가, 그 말을 하는 심경을 내가 어찌 모르겠어.”
그리고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아르웬 경.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이성적으로 살고 싶지 않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 양.”
이딘은 초연한 입가로 말했다.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
대화를 시작한 이래로, 처음으로 르네의 눈이 커졌다.
[<악랄한 피의 교주>님이 설득당했습니다!]
[<유혹의 군주>님이 설득당했습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설득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