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37)

134화.

세딘은 부유하고 있었다.

머나먼 기억의 시작을 부유하고 있었다.

[너는 나의 실수로 빚어진 존재로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그 아득함만은 느껴지는 존재의 말.

그 말에 세딘은 더욱 깊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지?

나는 무엇이기에, 너의 실수인 것이지?

세상은 그를 제국의 빛이라 불렀다.

그러나 제국의 빛이 되기 전 그는-

‘이 태생도 모르는 천한 것이.’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너 같은 것은 평생 이런 그림자 속에서 살아갈 거야. 네놈은 그림자에서 태어났으니까!’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태생도 알지 못한다.

누구도 그가 어디에서 온 건지, 어떤 사람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처럼, 그저 그렇게 빚어졌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절망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빛을 알았던 적이 없으니, 어둠 속에 존재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영원히 이 어둠 속에 있어도 상관없었다.

나의 태생이 어둠이라면, 내가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세딘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대체 어떻게 그 나이에…!’

‘이건 그저 미친 재능이라고 밖엔 설명이 안 되는군. 경이로워.’

‘네놈은 검을 잡기 위해 태어났다.’

다만 영원히 이 어둠 속에 있어야 한다면.

최소한 이 어둠을 지배하기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세딘은 검을 잡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태생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

당연한 듯이 잡았던 검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부와 명예, 심지어는 권력까지.

그러나 그는 그의 재능이 이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무언가 해소되지 않는 갈등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는 더욱 검의 길에 집착했다. 아마도 그의 갈증은 강한 힘에 대한 갈증일 것이라고.

더 강한 힘, 더 강한 검의 길을 걷게 된다면. 힘의 정점에 서게 된다면 해갈될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강자들을 쫓아다녔다. 그래서 개중 가장 강한 이시르의 곁에 있어 주었고, 다른 권력자들은 하찮게 보았다.

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날 알고 있나 보네. 우리 구면인가?’

그 사람을 본 순간, 세딘은 완전히 다른 감정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영애를 보는 순간, 제 안에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그 무언가가 뭔데.’

‘호승심.’

‘…호승심?’

‘처음이었습니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와 겨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까지 무력감이 드는 것은. 하지만 질 걸 알면서도 이 마음이 잠잠해지질 않습니다.’

기이한 일이었다.

설명할 길이 없어, 호승심이라는 말을 붙였다.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라 애써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딘은 그게 호승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건 그보다 더 운명적이고, 더-

[너 자신도 몰랐겠지.]

더 강력한.

오로지 그만을 위해 안배된 것.

그리고-

[너는 오로지 르네를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르네만을 위해 안배된 것.

[르네와 이영이 짊어져야 할 고난을 없애겠다는 나의 의지가, 너라는 존재를 아예 만들어 냈구나.]

‘존재’는 계속해서 더 깊은 무의식으로 떨어지고 있는 세딘을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너무 아득한 힘을 가진 나머지, 그의 의지가 자연스럽게 세딘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한마디로 세딘은 ‘존재’의 부산물이자, ‘존재’의 의지 그 자체였다.

[다만… 흥미로운 게 있다면.]

‘존재’는 고뇌에 빠졌다.

[네 시작은 나의 의지였을지 몰라도….]

지금의 세딘은 그의 의지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존재’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르네를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지금의 너는 네 의지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게 세딘의 존재 이유가 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를 어쩐다?]

존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영이라면 나를 이야기 속의 악당이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쓴 이야기의 악당이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단 말이야.

‘존재’는 르네, 이영과 수백 년을 함께하면서 나름대로 그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완전히 배려해 준다거나,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그들을 아끼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뿐.

그래서 때때로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도 했고, 또 때때로는 말도 안 되는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다 너희를 위한 거야. 나를 위한 게 아니야, 라고 합리화하며.

언젠가는 너희들도 나를 이해할 거야. 모든 진실을 알아낸다면.

내가 너희의 고난을 전부 가져갔는걸.

[하지만 이번 거는 정말로 원망 많이 듣겠는데.]

‘존재’는 처음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뇌에 빠져 있던 ‘존재’는 불현듯, 또 심술이 났다.

[…생각해 보니 조금 억울하네.]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나인데.

르네와 이영을 위해 모든 것을 한 건 난데.

그 애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정작 너라니.

네가 그렇게 잘났어?

‘존재’는 한껏 몸을 부풀렸다.

[그렇게 잘났다면, 한번 네 힘으로 르네에게 돌아가 보든가.]

그럼 나도 인정하지 뭐.

네 의지가 나의 의지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존재’는 세딘에게서 손을 뗐다.

어차피 이곳은 차원의 틈새.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누구도 나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세딘은 이곳을 나갈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육체는 르네의 곁에 있어도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영원히 의식이 없는 육체를 한번 사랑해 보든가, 이영.

그게 네 마음이라면 한번 해 봐.

‘존재’는 힐끔, 이영과 르네를 보았다.

리안의 몸 안에서 <탑의 주인>과 싸우고 있는 르네.

르네의 몸으로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는 이영.

어차피 길어야 100년이다. 인간의 시간으로 100년 후면, 저들의 불꽃같던 삶도 사그라든다.

‘존재’에게 그 시간은 찰나보다도 더 짧은 시간이었다. 영원을 견뎌 왔는데, 그 잠시 하나를 내가 못 기다릴까.

그동안 한번 마음대로 해 보라지.

어차피 100년 후엔 너희는 나와 함께 이곳에 존재해야 하니까.

‘존재’는 제멋대로 잠을 청했다.

딱 100년 후에.

그때 일어날 거야. 그때쯤이면 너희들도 나를 이해하게 되겠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리고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린 한 성좌가 있었다.

그 성좌는 ‘존재’가 잠들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세딘을 움켜쥐었다.

[…가자, 세딘.]

참을성 하나는 참 많은 훤원이었다.

***

“거 참. 더럽게 안 일어나네.”

카리스 영지 한구석.

울창한 숲.

그 숲 한가운데엔, 예쁜 저택이 있었다.

갓 지어진 게 티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저택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공작저와 비슷한 수준으로 돈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 저택의 가장 좋은 방에서 투덜거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 진짜 일어날 때 되지 않았어? 응?”

그 사람은 세딘을 보며 중얼거렸다.

“세딘. 대체 어디까지 갔기에 훤원 할배도 아직 못 돌아오는 거야?”

내가 싫기라도 했나. 그렇게까지 멀리 갈 이유가 있어?

르네는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벌써 3년.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르네!”

쟤가 일어났지.

르네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안시라드 경은 좀 어때요?”

세 사람분의 점심 식사를 가져온 리안이였다.

“뭐 어떻긴 어때. 똑같지.”

“괜찮아요, 르네. 안시라드 경도 곧 깨어나실 거예요. 제가 일어난 것처럼요.”

리안은 매우 활기차게 앞치마 끈을 동여맸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세딘을 일으켜 세우고, 축복을 걸었다.

그럴 때마다 리안의 몸에서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몸에서만 빛이 나오냐, 그것도 아니지. 얼굴도 그냥 빛 그 자체네.

아니, 쟤는 어떻게 매일 저렇게 상큼할 수가 있냐. 나만 어? 이렇게 찌들어 있고, 어?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흠칫합니다.]

[<파도와 치유의 왕>님이 당신에게 물방울을 뿌립니다.]

[이거라도 뿌리면… 우리 르네도 조금 상큼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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