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37)

에필로그 (2)

화르륵.

또 하나의 검은 사념이 불타고 있었다.

르네의 저택, 세딘이 열심히 다듬고 다듬은 정원에서.

“…이로써 벌써 2백 번째 사념이로군. 좀 많은데.”

아스모데우스가 읊조렸다.

“점점 빈도가 늘고 있습니다.”

세딘이 옆에서 동의를 표했다.

“르네가 퀘스트를 포기한 후로, 이런 것들이 점점 늘고 있어. 나름의 페널티다 이거겠지.”

“…르네의 힘도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저보다는 강하지만요.

세딘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힘이야 약해져도 별 상관없어. 어차피 예전 힘을 그대로 가지고 있더라도 쓰지도 못하니까.”

그랬다.

퀘스트를 포기한 이후로 르네의 힘은 아주 천천히 약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정 이상의 힘을 쓸 때마다 오랜 잠에 빠지곤 했다. 대부분은 하루나 이틀 정도에서 그치곤 했지만, 힘을 과하게 쓰면 일주일까지 잠들곤 했다.

전부 시스템의 의지를 거스른 대가였다.

“차라리 잘되었다. 이런 페널티조차 없었으면 그 애는 이리저리 끌려다녔을 것이니.”

워낙 마음 약한 아이니까.

아스모데우스가 심란한 눈으로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그 애 대신에 힘을 쓰면 된다. 다행히 시스템이 우리에게까지 페널티를 주려는 것 같진 않으니까.”

대체 그놈의 생각은 알 수가 없군.

아스모데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훤원이 세딘을 구해 올 때 보았다는 그 존재가 아마도 시스템인 것 같긴 한데.

대체 왜 그렇게 순순히 세딘을 내보내 준 건지, 그리고 왜 아직도 잠잠한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르네에게 페널티를 주고는 있지만, 시스템이 여태껏 한 짓에 비해서는 아주 약했다.

속내를 알 수 없으니 아주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르네를 지킬 거니까요.”

세딘은 덤덤하게 말했다.

아스모데우스는 그런 세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마음에는 안 들지만 르네가 왜 이 녀석을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재밌으십니까?”

“너 같으면 재미없겠느냐? 고작 30년도 안 산 것이 내 르네를 지키겠다고 하는데?”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 맨날 세상 다 산 것 같은 성좌들만 보다가 이런 깜찍한 놈을 보니까 마음이 흐뭇했겠지.

그래도 괘씸해. 내가 자신의 1번이라던 그 이영은 어디에 갔는지 몰라. 아스모데우스는 혼자 투덜거렸다.

“비록 마계에서는 마왕께서 더 강하시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이 세계에서도 내가 더 강하지.”

“…365일, 24시간 내내 붙어 있을 수 있는 건 접니다.”

“이런 괘씸한 놈을 봤나.”

아픈 곳을 찌르다니. 안 그래도 지금 나도 항상 옆에 있을 수 없는 게 짜증나 죽겠는데.

아스모데우스는 르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수하들 중 가장 강한 마족들을 이 영지 곳곳에 숨겨 두긴 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르네가 있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 그래도 네놈이 있는 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그래도 이놈 자식이 르네의 옆에 있는 건 나름의 위로였다.

어쨌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르네를 지킬 놈이긴 하니까.

“이제야 인정해 주시는 겁니까?”

“아직 인정 비슷한 것도 못 하노라, 이 가련한 필멸자여.”

아스모데우스는 으르렁댄 후, 사념 하나를 더 잡아냈다.

“일단 오늘은 이 정도인 듯하니, 들어가도 될 것 같군.”

“마왕께선 들어가지 않으십니까?”

“난 원래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쪽이라. 여기가 더 편하다.”

사실 그냥 네놈이 우리 르네와 있는 꼴을 보기 싫어서지만.

아스모데우스는 굳이 속내를 전부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 속마음을 모를 세딘도 아니었다. 세딘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르네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시야에 르네가 들어오게 하고 싶었다.

르네가 조금만 보이지 않아도 개처럼 낑낑대는 꼴이라니.

세딘은 자신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렇게 그녀를 위해 불안해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것 자체가 축복 같았다.

“…왔어, 세딘?”

그리고 불안의 끝에는 언제나 그녀가 있다는 것도 좋았고.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내가 힘을 쓸 수 없을지는 몰라도, 기감까지 죽진 않았어.”

“깨워서 죄송합니다.”

“애초에 잔 적도 없는걸.”

세딘은 조용히 난로의 불을 키우곤, 르네의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어 주었다.

“날이 춥습니다.”

“나 추위 안 타.”

“절 기다리셨습니까?”

바로바로 대답하던 르네의 입이 싹 닫혔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세딘은 홀로 웃곤 의자를 끌고 와, 르네의 곁에 앉았다.

“옆에 안 누워?”

“지금 바깥바람을 맞고 와서 제 몸이 찹니다. 좀 덥혀지면 눕겠습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이상하리만큼 세심하다니까.”

“혹시 불편하시다면-”

“좋다는 뜻이잖아!”

빽, 소리를 지르는 르네에, 세딘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르네의 뺨에 입을 맞췄다.

사랑스러운 사람.

“수산나 경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뭘?”

르네는 미심쩍은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으로 되물었다.

그 녀석은 또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등 따숩고 배 따숩고 평화로우며 안온하고 아무도 안 나대는 삶.”

“….”

이거 뭔가 익숙한데?

“아무도 나한테 일 안 시켜서 방에 처박혀서 초콜릿이나 먹고 뒹굴거리는 삶.”

“….”

젠장.

르네는 세딘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닫고 입가가 굳었다.

“왼쪽엔 내 개, 오른쪽엔 세딘 끼고 자다가 오후 3시쯤에 맛있는 밥 냄새 맡고 깨어나는 삶.”

“….”

“그런 삶을 원한다고 하셨다고요.”

“그 망할 마법사, 죽이든가 입을 막든가 해야지 내가.”

르네는 얼굴을 붉히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대체 그런 건 왜 말하는 거냐고.

“왜 제게는 그런 걸 말씀해 주지 않으십니까? 어떤 것을 원하시냐고 여쭤도, 그저, ‘난 지금 삶에 아주 만족하는데.’라는 말씀만 하셨잖습니까.”

“진짜 만족하니까 그렇지.”

애초에 나는 많은 것을 바란 적이 없다니까.

르네는 뚱하게 대꾸했다.

“전부 이뤄 드리겠습니다.”

세딘은 그런 르네의 입가를 살짝 잡아당겼다.

“평생 그런 삶을 사실 수 있게,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청혼하는 거야?”

“아니요.”

앗. 혼자 김칫국 마셨나.

르네는 민망함에 흠흠, 하고 헛기침을 뱉었다.

“그 이상이지요, 르네.”

세딘은 나지막이 르네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고작 결혼이라는 제도로는 이 마음의 직성이 풀리지가 않습니다.”

“대체 그 이상의 뭔가가 있긴 해?”

르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저도 르네의 성좌-”

“안 돼.”

르네는 매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르네의 성좌가 되고 싶습니다. 계약을 하고 싶어요.”

“안 된다고 했어.”

세딘은 르네로부터 모든 사실을 전해 들었다. 시스템의 존재, 르네가 수십 번 회귀했다는 것, 아예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가족들은 저 너머의 세상에 두고 왔고, 대신 아주 오랫동안 성좌들이 그녀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는 말까지.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시스템이 그녀의 일탈을 봐주고 있지만, 언제 그녀의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까지.

“듣기로, 성좌 계약은 르네의 영혼과 제 영혼이 묶이는 것이라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둘 중 누군가가 깨트리지 않는 한요.”

“안 한다고 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르네가 저와 떨어지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제가-”

“너는 심지어 성좌도 아니잖아.”

“되겠습니다. 성좌들께 방법을 대충은 들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어!”

르네는 처음으로 세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너는 그게 어떤 삶인지, 어떤 시간인지, 어떤 공간인지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르네는 언제나 허무함과 공허함, 외로움 속에서 살던 성좌들을 알고 있었다.

너무 외롭고 또 외로워서, 르네가 자는 모습마저 세상에서 가장 위로가 된다던 그들을.

“절대로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르네와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세딘은 르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사실 훤원 님께 말씀드리진 않았지만, 남아 있는 기억이 있습니다.”

“!”

차원의 틈새에서의 기억이 남아 있다고?

처음 듣는 말에, 르네의 눈이 커졌다.

“제가 그 존재의 실수라더군요. 오로지 르네를 위해 만들어진 실수라고.”

세딘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작은 숨결이 르네의 목을 간질였다.

“기뻤습니다. 제가 르네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세딘.”

“르네를 위해 만들어졌으니, 영원히 르네를 위해 존재하고 싶어요.”

그게 제 욕심일지라도.

세딘은 고개를 들지 않고 르네의 어깨에 눈꺼풀을 기댔다.

르네는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결국 한숨을 쉬고 세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라고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르네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공간의 영원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고 있기에.

“대신 이렇게 해.”

르네는 세딘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에 눕혔다.

“계약을 하지 않아도, 나는 언제나 너를 찾아갈게. 네 영혼이 어느 차원에 있든, 어느 세상에 있든, 어느 빛과 어느 어둠에 있든.”

르네의 말에 세딘의 눈이 난로의 불빛을 따라 흔들렸다가, 아스라이 불탔다.

“그리고 너도 내가 어느 차원의 틈에 끼어 있든, 또 어디에서 말도 안 되는 회귀를 하며 헤매고 있든, 또 어떤 고난과 고통 속에 있든 나를 찾아와.”

우리가 그 많은 것들을 거쳐, 결국 서로를 찾아냈듯이.

르네는 세딘의 손에 손깍지를 꼈다.

“너는 나를 위해 만들어진 실수가 아니야, 세딘.”

르네는 세딘과 눈을 맞추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만들어진 인연일 뿐.”

그러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르네는 작게 속삭였다.

“…네, 르네.”

세딘은 르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르네를 찾아내, 르네의 곁에 있겠습니다.”

모든 생에 걸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약속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완벽하게 안온한, 무엇도 방해하지 못할 밤이었다.

다행히도, 그 후로 모든 밤이 그러했다.

< S급 헌터는 악역 공녀가 되기 싫습니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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