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18)

Level 2. 메인 퀘스트 : 성장 (04) 

***

루스템 제국의 1황자 루퍼스리안의 황궁 내 입지는 미묘했다.

만년설보다 차갑다는 황제가 자식들에게 무관심한 것도 크지만.

무엇보다 황자 자신의 문제가 컸다.

루퍼스리안은 태양의 마력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이는 황족으로서 심각한 결격 사유였다.

직계나 방계냐보다 태양의 마력을 얼마나 강하게 가지고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루스템의 황족들이었으므로.

때문에 루퍼스리안 황자는 황제의 첫 번째 아들이면서도 황위 계승권이 없었다.

오히려 마력을 증명한 방계의 사촌들이 황자보다 앞서는 계승권을 가졌던 것이다.

때문에 공공연하게 황자를 얕보고 무시하는 귀족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사실 황족이라고 부를 수도 없죠. 태양의 마력이 없는데.”

“성인이 되면 황자로서의 지위도 빼앗길 테니. 쯧쯧. 가엽게 되셨어.”

대부분 황족들은 다섯 살 이전에 마력을 각성했다.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일곱 살인 지금까지도 마력을 각성하지 못했다.

기록을 보면 이런 경우 평생 마력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까운 사례가 황제의 이복형인 벨론드 대공이다.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마력을 각성하지 못해서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전부 빼앗겼었다.

그가 대공 작위를 되찾은 건 본인이 마력을 얻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자식 중 둘이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황위 계승권을 인정받으며 대공도 겨우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루퍼스리안 역시 비슷한 길을 걸을 거라고.

이 소년은 자기 힘으로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지키지 못하리라고.

다들 그리 생각했다.

대신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것이 바로 황자보다 한참 어린 여동생이었다.

얼마 전에 이름을 받았을 정도로 어리지만, 태어나자마자 태양석을 눈부시게 빛나게 한 마력을 보였으므로.

하지만 황녀가 이름을 받기 전부터 암암리에 돌던 안 좋은 소문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상황은 더 미묘해졌다.

황녀가 제대로 크지를 않는다더라. 백치라더라.

이 소문이 황녀가 태양석을 빛냈다는 사실마저도 가릴 만큼 급속도로 퍼지면서 루퍼스리안에 대한 대우는 더더욱 소홀해졌다.

차기 황위 계승자가 그나마 같은 부모를 가진 동생도 아니고, 사이가 안 좋은 사촌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황제는 정무 외의 거의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자식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서마저.

황제의 이런 태도는, 그가 자식들이 아니라 조카를 후계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벨론드 대공 일파와 그의 자식들은 황궁 내에서까지 활개를 치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야! 반푼이!”

황자궁의 연무장에서 목검을 들고 혼자 수련하던 루퍼스리안은 시비를 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결 좋은 은발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황제를 그대로 닮은 새파란 눈동자가 무례한 사촌에게 향했다.

“또 너냐? 여기를 네 집처럼 드나든다, 아키러스?”

아키러스.

벨론드 대공의 장남은 올해 열 살이었다.

루퍼스리안보다는 세 살이나 위.

때문에 키도 머리 하나 이상으로 컸다.

아키러스는 시건방지게 웃었다.

“당연히 내 거니까 오는 거지.”

그는 황자궁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둘러보았다.

아키러스는 루퍼스리안의 굳은 얼굴을 비웃으며, 어린 사촌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너처럼 마력도 없어서 황자 자격도 없는 놈에게 이런 화려한 궁은 어울리지 않아.”

그러자 아키러스 옆에 붙어 있던 소년이 열심히 아첨했다.

“맞습니다. 당연히 아키러스 대공자님께 훨씬 잘 어울리죠!”

“당연히 그렇죠! 황제께서도 곧 아키러스 님을 후계자로 인정하실 거예요!”

아키러스가 다음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부모들이 벌써 제 자식들을 곁붙이로 둔 것이다.

아직 루퍼스리안에게는 귀족 배동이 하나도 없었다.

이 자체가 소년과 사촌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였다.

그럼에도 루퍼스리안은 침착과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루스템의 유일한 황자다. 예의를 갖춰.”

그러자 아키러스와 부하들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황자는 무슨 황자야. 황위 계승권도 없는 반푼이 주제에!”

“맞아! 대공자님 앞에 무릎을 꿇어!”

그때, 아키러스가 루퍼스리안의 역린을 건드렸다.

“엄마도 없고 마력도 없는 쓸모없는 놈이!”

루퍼스리안이 분노하기 전, 그보다 먼저 분노한 이가 있었다.

***

저놈의 폭언을 들으니 머릿속에서 퓨즈가 나간 모양이다.

생각이 필터 없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가 버렸다.

“꽁냐무 떼가리! 닥쵸!”

(콩나물 대가리! 닥쳐!)

주변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날 보고 바보 오빠가 놀라서는 다다다 달려왔다.

“리샤! 나 보러 온 거야?”

나와 콩나물 대가리 사이를 막아서는 모양새였다.

나를 노랑머리에게서 보호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싸가지 없는 놈의 시비는 끝나지 않았다.

“아, 누군가 했더니. 그 백치 꼬마잖아? 그냥 모자란가 했더니 아예 미쳐 버린 건가? 반푼이에 백치라니. 끼리끼리구만. 헹.”

콧방귀 뀌는 소리가 아주 재수가 없었다.

‘저, 저, 싹퉁머리가 노란 놈이!’

내가 뭐라고 참교육을 해 주려는데.

선수를 뺏겨 버렸다.

오빠가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친 것이다.

“닥치지 못해!”

일곱 살 꼬마의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일갈이었다.

연무장 공기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나조차도 멍하니 보고 있을 정도니, 콩나물 대가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와 함께 온 유모나 콩나물 찌그러기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어른들마저 잠시 압도되었으니까.

그나저나 어른이 따라와 있으면서 저 진상을 안 말렸어? 황궁에서 황자에게 저따위로 구는데?

오빠 시종들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왜 방패막이도 안 해 주는 거지?

내가 의문과 분노를 삼키고 있는데, 뒤늦게 연무장 옆에 딸린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오빠의 외침을 들은 모양이다.

“황자님!”

“루퍼스리안 님!”

그리고 그들은, 놀랍게도…….

“죄송합니다, 대공자님.”

“용서해 주세요, 아키러스 님.”

“우리 황자님께서 아직 어리셔서 실수를 하신 겁니다.”

자기 주인인 오빠를 살피고 보호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콩나물 대가리 앞에서 비굴하게 빌고 있었다.

‘뭐야, 이거?’

“어서 아키러스 님께 용서를 비세요, 황자님!”

심지어는 오빠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랑 대가리는 우쭐해서 콧대를 세웠다.

“그래. 어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 그러면 관대하게 용서해 줄게. 그리고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황자궁을 임시로 쓰게 해 줄 수도 있어.”

시작부터 끝까지 어처구니가 하나도 없는 소리였다.

그 말에, 오빠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소리쳤다.

“해지먀! 해지먀! 햐면 내 어빠 안냐!”

저딴 놈한테 무릎 꿇는 놈은 내 오빠 아니다!

콩나물 대가리의 헛소리가 더 이어졌다.

“네가 무릎 꿇고 사과하면 네 동생은 용서해 줄게. 백치가 뭘 알겠어. 내 아량에 감사해야 할걸?”

하지만 나의 희망과 달리, 오빠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콩나물 대가리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려는 것처럼.

나는 유모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너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마력을 써서 근력을 강화해 버렸다.

“으아우앙! 끄앙!”

‘진짜 빌면 죽인, 아니 반만 죽인다, 안서운! 네가 그러고도 우리 엄마 아들내미냐!’

엘제는 생각보다 강한 힘에 나를 놓치고 말았다.

“앗! 아기님!!”

하지만 엘제의 걱정처럼 내가 바닥에 나뒹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사뿐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 정도는 껌이지!

알아본 사람은 없겠지만, 마력으로 얇은 결계를 펼쳐 안전하게 착지했다.

“아, 아기님?”

엘제의 당황한 목소리는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집 바보 오빠 놈을 무릎 꿇릴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나는 빽 외쳤다.

“어빠!!!”

그리고 그 순간.

의기양양한 콩나물 대가리 앞에 오빠가 털썩, 무릎을 꿇어 버렸다.

그리고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아 버렸다.

“미안…….”

“앙대!”

……그런 줄 알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오빠의 몸이 앞으로 내쏘아졌다.

“……하다고 할 줄 알았냐! 아키러스 이 개자식!”

오빠는 그대로 콩나물 대가리의 턱을 머리를 들이받았다.

뻑!

꽤 커다란 소음이 울렸고.

“꿱!”

개구리 배 터지는 소리를 내며 노랑머리 싸가지가 뒤로 넘어갔다.

나는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무릎 꿇는 척한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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