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18)

Level 2. 메인 퀘스트 : 성장 (05) 

***

뻑!

“아악!”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아키러스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방심하고 있다가 정통으로 턱을 맞았으니 충격이 꽤 심할 게 분명했다.

놀란 건 아키러스만이 아니었다.

가해자인 루퍼스리안을 빼고 모두가 경악하고 또 두려워했다.

대공자가 맞았으니 대공이나 대공비가 얼마나 난리를 피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조그마한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의 옹알이를 내지른 황녀는 빼고.

“아쌰!”

이 와중에도 셀리나는 경악에서 빠르게 벗어나 황녀의 귀여움에 주접 떠는 걸 잊지 않았다.

“어흑! 황녀님이 기뻐하셔! 어서 더 패서 박살 내 버리세요, 황자님!”

한발 늦게 아키러스의 수행원들이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려 다가갔다.

“고,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어서 의원을 불러와! 궁의를 불러!”

“아키러스 님이 정신을…… 잃으셨네?”

당황한 시종의 말대로였다.

루퍼스리안의 추진력(?)이 대단했던 건지 아키러스는 한 방에 기절해 버렸다.

자기보다 세 살 아래에 마력도 없는 사촌 동생에게 한 대 맞았다고 저 꼴이 된 것이다.

루퍼스리안은 무표정하게 쓰러진 사촌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별거 아니네.”

아키러스의 수행원들은 차라리 주인의 의식이 없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굴욕일 테니까.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지금 그들은 이 일곱 살짜리 소년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루퍼스리안은 얼음을 섬세하게 조각해 낸 듯한 미소년이었다.

모친을 닮은 은발에 부친을 닮아 시리도록 푸른 눈이 유달리 차가운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시니컬하고 차가운 표정 때문이기도 했다.

저 표정만은 사이가 멀어졌어도 부친인 황제를 그대로 닮았다는 평이 많았다.

때문에 ‘얼음 인형 황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별명의 이유를 증명하듯, 소년은 조금이라도 웃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 드문 미소가 지금 소년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런데 그 미소는 어쩐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때문에 아키러스의 수행원들은 물론 황자궁 소속 궁인들까지, 버릇처럼 루퍼스리안을 비난하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

“…….”

평소라면 그리했을 것이다.

루퍼스리안 황자는 제 처지와 주제를 잘 알아 얌전하다고.

다들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모욕을 당해도, 홀대를 당해도,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넘길 뿐이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얼음을 날카롭게 벼린 듯 칼날 같은 눈빛이었다.

건드리면 베일 듯한.

수행원과 궁인들은 일곱 살짜리 소년의 눈빛 한 번에 얼어붙어 차마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감정은 하나였다.

두려움.

많은 이들이 차기 황위 계승자라 생각하고 있던 아키러스에게도 이런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몇몇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한 섬뜩함과 두려움은 한때 황제 카스톨트가 자주 드러내던 기세를 닮았다는 걸.

황제가 1년 전 혼자가 되면서 정무를 처리하는 조각상이 되기 전에 말이다.

과거 황제는 대륙의 두려움을 한 몸에 사던 이였다.

단 한 사람, 지극히 사랑했던 황후 앞에서만은 봄볕 아래의 눈처럼 녹아내렸으나,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과거 황제를 연상케 하는 황자의 변모에 수행원들은 당황해서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시선만으로 주변을 압도한 루퍼스리안이 천천히 뒤돌았다.

그곳에는 어린 여동생, 아나트리샤 황녀가 있었다.

황녀가 짤막한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쟈래써! 어빠!”

(잘했어, 오빠!)

그 순간,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겨울을 불러온 듯했던 황자의 시린 눈빛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던 것이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비웃음 가득하던 입술이 행복감 가득한 미소로 차올랐다.

주변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던 겨울이 한순간에 녹아 버리고, 봄이 왔다.

녹아내린 눈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되고, 그 사이에 연둣빛 이파리와 노란 꽃잎이 톡톡 피어올랐다.

배경으로 그런 환상이 보일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다.

봄볕보다 따사로운 환한 미소를 띤 채, 루퍼스리안은 제 여동생을 보고 있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루퍼스리안이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리샤! 오빠 잘했다고 칭찬해 준 거야?”

소년은 도도도 달려가 한참 작은 아기를 끌어안았다.

그때 아키러스의 수행원 중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다.

‘조금 전 수련할 때 그리고 공자님 공격할 때랑, 지금 걸음걸이가 아예 다른데?’

아까는 성인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절도 넘치는 걸음에 넓은 보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마치, 아기인 여동생 앞에서 일곱 살 제 나이로 돌아간 것처럼.

***

콩나물 대가리를 혼내 주고 왔으니 지금은 오빠 놈이 아니라 오빠라고 해 주기로 했다.

오빠가 칭찬을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다니까.

나는 선심을 크게 썼다.

“쨔래써!”

칭찬과 함께 손을 뻗었다.

그런데.

“웅……?”

손이 안 닿았다.

오빠 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한 건데, 내 팔이 너무 짧았다!

‘크윽! 이런 수치가! 역시 하루빨리 커야 돼!’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짤따란 팔과 조막만 한 손가락은 오빠 놈의 머리는커녕 가슴께에 겨우 닿을락 말락 했으니.

칭찬을 가슴을 퐁퐁 치는 걸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모 엘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풉, 제가 안아 올려드릴게요, 황녀님.”

물론 엘제가 안아 올려 주면 높이는 맞출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기 자존심(?)이 있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시로! 내가 하꼬야!”

그리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발돋움을 했다.

발이 너무 작고 발목이 약해서 발돋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대로 쓰러질 뻔한 걸, 유모가 잡아 주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그래. 이 정도 도움은 받도록 하자.’

오빠 놈 쓰담해 주겠다고 마력까지 쓰는 건 오버야.

하지만 최대한 열심히 발돋움을 해도 오빠 놈의 머리가 너무 높았다.

‘아니, 겨우 일곱 살 주제에 왜 이렇게 큰 거야!’

그러고 보면 나이 차이에 비해 노랑 대가리랑 키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아마 1, 2년만 지나도 콩나물 대가리를 앞지르지 않을까.

그런 것까지 전생이랑 똑같은 건가?

나는 바락 화를 냈다.

“머리가 노파!”

그러자 내내 짜증 나는 미소를 짓고 있던 오빠 놈이 드디어 움직였다.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은 것이다.

내내 위에서 내려다보던 오빠의 얼굴이 이젠 내 시선보다 조금 아래로 낮아졌다.

오빠는 나를 올려다보며 백합처럼 곱게 웃었다.

“어때? 이러면 안 높지? 리샤 손에도 닿지?”

나는 고개를 꾸닥꾸닥했다.

‘그래, 그래야지. 이게 나와 오빠에게 맞는 높이라고!’

그리고 선심을 베풀어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래따, 자래따!”

오빠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아빠를 닮은 파란 눈동자의 색이 더욱 짙어졌다.

그러자 나와 거의 비슷한 청자색으로도 보였다.

역시 가족이라 비슷한 건가.

한 가지 전생과 차이가 있었다.

‘머릿결이 엄청 좋아졌네.’

색깔만 변한 게 아니었다. 비단실 같은 머리카락이 사르륵하고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그 촉감이 꽤 기분 좋아서, 나는 한참 동안 오빠의 머리를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다.

그동안 오빠는 착한 고양이처럼 눈을 반쯤 감은 채 내 손길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그렇게 칭찬 타임 겸 오빠와 나에게 어울리는 높이를 즐기고 있는데.

나도 오빠도 잠시 잊고 있던 게 있었다.

바로, 기절했던 콩나물 대가리.

마력 각성도 못 하고 어려서 그런가. 오빠의 힘이 모자랐는지 바로 정신을 차린 것이다.

놈이 피가 줄줄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시끄럽게 빽빽대기 시작했다.

“감히! 감히 반푼이 따위가 내 피를 보게 하다니!”

“지, 진정하세요, 공자님!”

“네놈들도 날 비웃는 거냐?! 저놈을 왜 그냥 놔둔 거야!”

싹수가 샛노란 콩나물 대가리는 만만한 제 부하들을 족치기 시작했다.

다 큰 성인이 열 살짜리 꼬마에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퍽! 퍼벅!

“으억!”

“컥! 살려 주세요!”

자기 수행원들을 두들겨 패 놓고, 놈은 나와 오빠를 노려보았다.

“어서 내 앞에 와서 빌지 못해?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나는 오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헹. 우껴.”

“우리 리샤는 똑똑하구나. 맞아. 패배한 개가 뒤늦게 짖어 봤자 웃기기밖에 더 하겠어.”

오빠가 맞는 소리를 하며 내 손에 제 머리를 비벼댔다.

뭐야, 왜 진짜 큰 고양이처럼 굴어. 어색…, 은 생각해 보니 원래 이랬지.

여하튼 나와 오빠의 조롱이 콩나물 대가리의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던 모양이다.

놈의 주변을 둘러싼 마력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웅?”

노랑 대가리의 분노 어린 외침.

“두 놈 다 죽여 버리겠어!!!”

화르륵!

노랑 대가리가 만들어 낸 마력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성인 키보다 커다란 불꽃이 갑자기 연무장 가운데에서 치솟자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다.

“헉!”

“공자님! 안 됩니다!”

“황궁에서 마력을 쓰시다니!”

나는 코웃음을 치며 마력을 움직여 대비했다.

‘흥. 이 정도쯤이야.’

내 준비가 끝났을 때, 불꽃의 마력이 나와 오빠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여유 만만하게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리샤!”

오빠가 다급하게 외치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자신의 등이 불꽃의 마력을 향하게 한 채 내 몸을 가렸다.

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로 삼은 것이다.

또.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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