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2. 메인 퀘스트 : 성장 (06)
‘그때’가 다시 떠올랐다.
믿었던 동료의 배반.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사악한 마기는 내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당시 마왕 소환의 여파에 살아남은 헌터는 나와 오빠밖에 없었고.
나는 배신의 충격과 부상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그런 나를, 오빠가 감쌌다.
“서나야! 안서나! 정신 차려!”
자신의 몸을 방패 삼아 나를 지켰다.
아직도 생생했다.
오빠의 몸을 꿰뚫던 소리. 피 냄새.
무력하게 그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나.
그 순간의 모든 감각과 감정들이 다시 쏟아졌다.
‘안 돼! 두 번은 안 돼!’
그때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지금 콩나물 대가리가 쏘아 보낸 마력 불꽃은 그때 마왕의 힘에 비하면 장난 수준도 안 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난 그때와 달리 힘이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오빠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어디셔 가미!”
나는 손을 내밀고 준비해 두었던 마력을 개방했다.
눈부신 금빛이 내 작은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파아앗!
노랑 대가리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녀석의 불꽃은 내 마력 앞에 서자 태양 앞의 촛불보다도 약했다.
내 마력은 나와 오빠, 그리고 유모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까지 감싸서 보호했고.
그것만으로도 콩나물 대가리의 초라한 불꽃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피식 꺼져 버렸다.
“어? 어어?!”
“헹!”
나는 놈을 비웃어 주고는 과시하듯 내 마력을 확장시켰다.
파아앗!
금색의 빛이 마치 새처럼 날개를 펼쳤다.
이 정도는 기지개를 켜는 정도의 느낌일 뿐이다.
물론 이것도 전생의 내 전성기 때 힘에 비하면야 새 발의 피지만.
어린애들끼리의 힘 싸움에 쓰기엔 과할 정도였다.
하지만 난 이대로 공격만 막고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감히 내 앞에서 선빵을 쳤겠다?’
물론 바보 오빠가 추진력으로 콩나물 대가리의 턱을 먼저 갈기긴 했지만.
그 정도는 정당방위인 셈이다.
아니, 감히 누구 오빠한테 무릎을 꿇으라 마라야?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마력을 한층 더 강하게 방출했다. 그러자 나를 둘러싼 빛이 더더욱 선명해졌다.
마침내 정원을 덮을 정도로 거대해진 빛의 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 한입 소시지보다 작은 손가락이 노랑 대가리를 가리켰다.
“뽄때 주께!”
(본때를 보여 주겠어!)
아, 어리니까 이게 불편해.
혀도 짧고 손가락 발가락도 너무 작다고.
위엄이 없잖아, 위엄이!
하찮은 몸이 너무나 아쉬웠지만, 상대는 더 하찮았다.
그냥 마력으로 눌러 버리면 그만.
나는 빛의 새를 콩나물 대가리에게 날려 보냈다. 새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끼이이!
노랑 대가리와 부하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우와아악!”
“살려 줘!”
“신이시여!”
마력을 가진 놈들은 어떻게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
놀랍게도 그중 가장 강한 마력을 동원한 건 콩나물 대가리였다.
‘썩어도 황족이라는 건가?’
하지만 내 압도적인 마력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노랑 대가리가 만든 불꽃의 방어막은 빛의 새가 가볍게 부리를 한번 톡, 쪼자 와장창 깨졌다.
“컥!”
놈은 피를 왈칵 토했고.
이제 그를 지켜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부하들은 이미 제 몸 하나 살겠다고 뿔뿔이 도망친 뒤.
방어막도 없이 빛의 새 앞에 던져진 콩나물 대가리의 눈에는 공포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황족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열 살짜리 어린애.
그놈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살려 줘! 엄마! 아빠! 으아앙!”
꼴사납고 유치한 비명과 울음.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영 흑역사로 남을 만한 수치스러운 꼴도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본때를 보여 준 셈인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심술을 부려서, 새의 부리가 노랑 대가리의 뒤통수를 ‘콕!’하고 찍었다.
“으아아악!!!”
콩나물 찌끄러기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지만 부상은 입지 않았다.
대신 뒤통수에 거한 땜통이 하나 생겼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나는 손을 흔들어 마력을 끊었다.
그러자 새는 빛의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콩나물 대가리와 부하들은 죽었다 살아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웅?”
분명히 마력을 다 거뒀는데 왜 이렇게 밝지?
다들 비슷하게 느낀 건지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유모가 위쪽을 가리키며 놀라 소리쳤다.
“헉! 태양석이 또!”
뭐야? 저건 또 왜 번쩍거려?
황궁 지붕에 왜 저런 게 있는 거야. 사이키 조명도 아니고.
***
경악이 황자궁 안뜰을 내달렸다.
태양석이 또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역사상 기록에 남을 정도로 환하게.
태양석을 빛나게 하는 황족이야 늘 나오지만.
태양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낸 황족은 몇백 년에 한 번꼴로도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1년 사이에 이런 일이 무려 세 번째.
게다가 그 세 번이 전부 한 사람으로 인한 것이었다.
엘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어설픈 팔짱을 낀 아기에게 모였다.
아마 어른들처럼 팔짱을 끼고 싶은 듯한데 팔이 짧아서 두 팔을 대충 겹친 모양새였다.
게다가 지금 아기 황녀는 병아리 머리쿵 방지 베개를 달고 있었다.
옷도 그에 맞추어 노랑노랑한 레이스의 호박바지.
“헹!”
자신만만하게 동글동글한 턱을 쳐들자, 등 뒤에서 노랑 병아리 날개가 까딱까딱거렸다.
압도적인 마력으로 유력한 황위 후계자로 촉망받던 아키러스를 눌러 버린 이의 모습이라기엔…….
‘귀, 귀여우셔!’
너무 귀여웠다.
그때 아기 황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헹. 오주싸개!”
(헹! 오줌싸개!)
아기 황녀는 아키러스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주변 모두의 시선이 아키러스에게 집중된다.
그제야 아키러스 본인을 비롯해 다른 이들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지, 지린 거야?’
소년의 비단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열 살짜리 아이가 죽을 뻔했으니 그 정도는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물론 황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지만.
태양신의 후손으로서 존경받는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늘 완벽할 것을 요구받았으니까.
수치 중의 수치였다.
게다가 아키러스를 지리게 만든 상대는 얼마 전 겨우 이름을 받은 아기였다.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아키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아, 아냐!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애써 젖은 바지를 가리려고 했지만 이미 모두 본 뒤였다.
이번 일에 대한 소문은 발 없는 말보다도 빠르게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을 아키러스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년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그의 살기 어린 눈이 아나트리샤를 향했다.
그러나 청자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키러스는 조금 전의 공포를 다시 느꼈다.
빛의 새는 간단하게 아키러스를 죽일 수 있었다.
아기의 비웃음 섞인 차가운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넌 죽일 가치도 없어.’
과한 생각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키러스는 황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도저히 황녀의 눈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여동생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루퍼스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저 반푼이 자식 때문에 내가 이런 꼴을!’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고 모욕을 줬다는 건 깔끔하게 잊은 듯했다.
아키러스는 분노와 수치심을 루퍼스리안에게 풀려 했다.
“그래 봤자 너는 반푼이야! 황자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루퍼스리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그렇다고 네가 내 동생에게 진 게 달라져?”
“이익!”
제 오빠와 아키러스를 한 번씩 보던 아기 황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루퍼스리안에게 다가가서 외쳤다.
“어빠! 칭챠네 쥬께!”
(오빠! 칭찬해 줄게!)
루퍼스리안은 화색을 띠며 고개를 숙였다.
아까처럼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니 한 것이다.
그런데, 아나트리샤의 조가비보다 작은 손이 향한 곳은 오빠의 머리가 아니었다.
엉덩이였다.
“궁디퍙퍙! 자래따! 자래따!”
퍙! 퍙!
워낙 작고 힘이 약해서, 소리조차 ‘팡팡!’이 아니라 ‘퍙퍙!’이라고 들렸다.
아나트리샤만 빼고 모두 굳어있는 가운데.
이변이 일어났다.
루퍼스리안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