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218)

Level 3. 메인 퀘스트 : 아빠 공략(02)

한 번도 표현한 적 없지만 소년은 동생을 찾아올 때마다 두려웠다.

어린 여동생이 침대에서 싸늘하게 식어 있을까 봐.

그럼에도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 외에 소년을 반겨 줄 이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루퍼스리안에게 의미 있고 소중한 존재는 지금 단 하나뿐이었다.

‘리샤. 내 동생. 내 하나뿐인 가족.’

그 외에는 관심도 없었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한때 따르고 좋아했던 아버지도 예외는 없었다.

‘그 날’ 이후, 그의 아버지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몸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은 셈이다.

이미 죽은 아버지에게는 유감도 호감도 없었다.

하지만 여동생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얼굴이 굳는 걸 다 감추지 못했다.

“압빠가 이눔 하꼬야!”

아기의 짧고 통통한 팔이 위로 올라가 앙증맞은 주먹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빠가 혼낼 거라는 표현인 모양이다.

파닥파닥.

당연히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고, 아주…… 아주, 귀여웠다.

굳었던 입가와 눈매가 절로 흐무러질 만큼.

그 움직임에 아기의 등에 매달린 분홍색 나비 날개가 팔락팔락 흔들렸다.

오늘의 머리쿵 방지 베개는 분홍 나비였던 것이다.

이제 리샤가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는 일은 없었지만.

리샤의 유모와 시녀들은 계속 머리쿵 베개를 매 주었다. 사심 100%임에 틀림없다.

‘역시 리샤의 유모와 시녀들은 대부분 괜찮단 말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런 센스도 아주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성심성의껏 아나트리샤를 돌보고 있다는 거다.

황자궁의 궁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이 마력을 각성한 그 날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루퍼스리안이 뒤늦게 마력을 각성하자 황자궁의 궁인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다.

뻔뻔한 자들.

‘누군가’가 일부러 그런 자들만을 채워 놨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이제 당당히 황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으시겠군요. 황자님.”

“저를 잊지 않으셨지요?”

유모, 시종, 교사, 하녀까지.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황자궁의 궁인들도 모두 정상적으로 황자를 돌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가 무너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황자궁의 대부분은 벨론드 대공 일파에게 매수당한 이들로 채워졌고, 지금은 적어도 그쪽이 황위 계승자로 유력하다고 판단하고 줄을 바꿔 잡은 이들뿐.

그들은 루퍼스리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대공가에 고해바쳤다.

루퍼스리안은 그들이 대공가에 충성을 표현할 수단에 불과했다.

소년이 그걸 지금껏 참아 넘긴 건 관대해서가 아니었다.

그럴 가치가 없어서였지.

루퍼스리안은 이제야 성실한 아랫사람인 척 구는 이들을 깔아보다가 얼음보다 서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이 쓰레기들, 치워.”

궁인들은 경악했다.

“예, 예? 지금 무슨 말씀을……?”

“하하.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입니다, 황자님.”

루퍼스리안이 말한 이는 그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쓰레기들이 아니었다.

마력 각성 소식을 듣고 황자궁에 찾아온 황제의 시종장, 웨인 백작에게였다.

“명을 받듭니다, 황자 전하.”

시종장을 따라온 본궁의 시종들이 황자궁의 쓰레기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황자님을 어찌 모셨는데!”

“용서해 주세요!”

황자궁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루퍼스리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웨인에게 말했다.

“대부분 벨론드 대공의 끄나풀들이야.”

“혹여 저들 중 자비를 베풀 이가 있으신지요?”

“아니. 없어.”

이걸로 끌려간 궁인들의 처분은 결정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죽거나 종신 노역형에 처해질 것이다.

감히 루스템 제국 황족을 능멸한 죄로.

하지만 루퍼스리안이 그들에게 가혹한 처분을 내린 건, 자신에게 무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리샤의 앞에서도 아키러스 따위에게 아첨하려 한 놈들이니.”

그들은 아나트리샤 앞에서까지 아키러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루퍼스리안을 비난하려 들었다.

그냥 놔뒀다면 나중에는 아나트리샤에게까지 무례하게 굴었을지도 몰랐다.

그 일말의 가능성조차 소년은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웨인은 루퍼스리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황자궁이 이토록 어지러움을 미처 몰랐습니다. 벌해 주십시오.”

황제는 현재 정무 외에 황궁 내부의 일에는 관심을 끊은 상황. 스스로의 건강을 돌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자식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결과가 이번 사태였다.

웨인 백작은 황제의 시종장이니, 엄밀히 말하면 황자궁의 관리 책임이 없었다.

황자, 황녀를 모시는 궁인들은 황후와 황후궁의 시녀장에게 감독을 받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루스템 제국의 황후 자리도, 그 시녀장 자리도 비어 있었다.

부시녀장이 임시로 살림을 맡고 있지만, 제대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무언가가 이상하군.’

시종장은 상황을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웨인의 사죄에 루퍼스리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다.

“네 잘못이 아니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볼일이 있어서 온 것 아닌가?”

웨인은 황제의 명으로 가져온 태양의 책을 내밀었다.

책은 마지막 장이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현 황제를 중심으로 한 계보도가 그려져 있었다.

황제 카스톨트의 옆자리 이름은 지워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 이름만이 적혀 있었다.

아나트리샤.

여동생의 이름이 새겨진 자리에는 자그마한 손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태어나자마자 태양석을 빛나게 했을 때 찍은 것일 터다.

설사 갓 태어난 아기라도 마력을 각성한 황족이 접촉하면, 책이 반응했다.

이름을 받지 못한 때에는 손자국만 남아 있다가, 이름이 정해지면 저절로 책에 새겨졌다.

그래서 황족의 손자국과 함께 이름이 계보도에 남겨지는 것이다.

“태양의 책에 손을 대 주십시오, 전하.”

루퍼스리안은 동생의 손자국 옆에 제 손을 댔다.

그러자 몸 안에서 불꽃의 마력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태양신의 신물(神物)에 마력이 반응하는 것이다.

뒤늦게 얻게 된 힘이 새삼스러웠다.

사실 루퍼스리안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다섯 살 생일을 넘긴 뒤 태양의 마력을 각성한 예는 없었으므로.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힘을 얻게 될 줄은 몰랐다.

마력을 각성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손톱이 다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작은 아나트리샤의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한입에 왕 하고 물어 버리고 싶게 귀여운 손이 루퍼스리안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궁디퍙퍙! 자래따! 자래따!”

퍙! 퍙!

엉덩이를 두드리는 소리마저 귀여웠다.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보다 신기한 건 그 칭찬을 받자마자, 루퍼스리안의 몸속에서 뜨거운 마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루퍼스리안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늘 답답함을 느껴 왔다.

몸속에 뭔가가 뭉친 덩어리 두 개가 콱 틀어박힌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이 상반되는 두 기운이 서로를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늘 신경질 날 정도로 답답했다.

그런데 아나트리샤의 ‘궁디팡팡’을 받고 나자, 이변이 생겼다.

굳어 있던 두 덩어리 중 하나가 녹아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안에 숨겨져 있던 강력한 에너지가 몸 밖으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바로 태양의 마력이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리샤가 내게 마력을 나누어 준 건가? 마력이 없다고 오빠가 무시 받는 게 불쌍해서?’

그래서 착한 마음으로 레몬 사탕을 나눠 주듯 마력을 나눠 준 건 아닐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일 수도 있었다.

마력이란 곧 생명의 힘이니까.

타인에게 마력을 나눠 주는 게 가능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이미 그렇다고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 따스함을 느껴 버렸으니까.

아기의 작은 손이 팡팡 두드린 순간.

그 작은 손을 통해 따스한 힘이 몸으로 흘러들어 온 게 분명하니까.

‘리샤…, 날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하다니…….’

본인이 들으면 배꼽 잡고 웃으며 바닥을 구를 착각이지만, 루퍼스리안은 진지했다.

소중한 여동생이 일깨워 준 태양의 마력이 화륵, 피어올라 태양의 책을 감쌌다.

일반적인 종이라면 재가 되었을 터였지만 이 신물(神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황자의 불꽃 세례를 받자 태양의 책 마지막 페이지에 붉은빛의 이름이 솟아올랐다.

루퍼스리안.

마침내 단둘뿐인 루스템 적통 황족의 이름이 모두 태양의 책에 새겨졌다.

웨인은 진심을 다해 축하의 인사를 올렸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그러나 루퍼스리안의 표정은 일곱 살짜리 아이답지 않게 싸늘하고 덤덤할 뿐이었다.

***

그때로부터 몇 주가 지났지만, 아버지는, 아니, 황제는 루퍼스리안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부르지도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다면 더 혐오스러웠을 테니까.

‘내가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다고 다정해졌으면 몇 배로 더 싫었을 거야.’

루퍼스리안은 환하게 웃으며, 땡땡이치면 아빠에게 혼날 거라는 여동생에게 대답해 주었다.

“괜찮아. 폐하께선 관심 없으실 테니까.”

아나트리샤가 흠칫했다.

‘폐하’라는 호칭의 싸늘함을 느껴서일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루퍼스리안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이는, 가족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으니.

그의 여동생.

아나트리샤뿐.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하지만 그 말까지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이 조그맣고 사랑스러운, 이제 하나뿐인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린 여동생은 행복하고 해맑게 자라기만 해야 했다.

하지만 아나트리샤의 표정이 묘해진 것을, 루퍼스리안은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