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3. 메인 퀘스트 : 아빠 공략(03)
***
“괜찮아. 폐하께선 관심 없으실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오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표정이었다. 조금이지만 적의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폐하’라니?
너무나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이다.
전생에 오빠는 늘 아빠에게 ‘아빠’라고 불렀다.
어쩌면 성인이 된 뒤에는 낯간지럽다고 ‘아버지’로 호칭을 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아빠는 오빠가 성인이 되기 얼마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아빠는 날 사랑한다.
그리고 그만큼 아빠는 오빠를 사랑한다.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 법칙과 같은 의미.
특히나 아빠는 우리를 오히려 엄마보다 더욱 살갑고 다정다감하게 대해 주었다.
아빠를 잘 모르는 사람들조차 아빠가 ‘딸바보’이자 ‘아들바보’로 유명한 건 알 정도로.
그래서 난 오빠의 반응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빠랑 아빠 사이가 안 좋은 거야?!’
쿠궁!
머리 위로 무거운 돌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아빠가 나와 오빠를 사랑한다는 건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명제였다.
땅이 굳건하고 하늘이 높은 것만큼이나 흔들림 없는 사실.
그런데 그건 전생의 이야기였다.
아무리 같은 영혼을 가지고 환생했다 해도 모든 게 같을 순 없었다. 엄마의 부재처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겨우 인정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명명식 이후로 아빠가 한 번도 안 왔어!’
놀랍고도 충격적인 사실을.
‘말도 안 돼!’
내가 아는 아빠라면 그럴 리 없다.
나는 재빨리 떠올려 보았다.
이번 생에서 아빠와 재회한 날의 일을.
그때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내가 아는 아빠라면 당장 나를 끌어안고 둥개둥개하면서 물고 빨아도 이상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아빠는 어째선지 거리감 느껴지고 무뚝뚝한 태도였다.
나를 끌어안아 준 것도 명명식날 어색했던 그때뿐.
그리고 내 방을 나가기 직전에는, 내가 안아 달라고 바동거렸는데도 그냥 두고 가기까지 했다.
연달은 충격에 난 혼란에 빠졌다.
***
“먀도 앙대! 그러 리가!”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루퍼스리안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동생을 보았다.
하지만 바로 소년의 눈빛과 표정이 흐물흐물해졌다.
아나트리샤가 안 그래도 커다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조막만 한 두 손을 통실통실한 양 뺨에 대고 있었다.
전에 비해 눈에 띄게 통통해진 볼따구가 작은 손가락에 밀려 폭, 폭 들어가 있었다.
이제 분유도 이유식도 잘 먹게 되어서 그런지 얼굴도 팔다리도 포동포동해져서 보기 좋았다.
‘내 동생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귀여워.’
이건 절대 루퍼스리안의 눈에 여동생 전용 콩깍지가 두텁게 껴서가 아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등 뒤에서 리샤의 유모와 시녀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보, 보, 보셨어요?! 봤어요! 황, 황녀님 볼!”
“마, 말랑말랑해 보여!”
“정말이지 보기 좋게 살이 오르셨구나.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이 컸는데…….”
유모는 다시 감격이 북받친 듯했다.
리샤는 잘 먹지도 않고 잘 울지도 않은 채 잠만 자던 아기였다. 그나마 먹은 것도 토하기 일쑤였다.
제대로 자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겨우 몇 달 만에 이렇게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눈에 띄게 자라기 시작했다.
유모의 입장에선 감개가 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시녀 모냐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키도 확실히 자라셨고, 안으면 묵직하시다니까요!”
셀리나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하악, 황녀님 볼따구 빨아 먹고 싶…….”
평소였다면, 아나트리샤는 셀리나의 광기 어린 주접에 움찔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다.
루퍼스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저리 충격일까.
그때, 아나트리샤가 충격을 수습하고 루퍼스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빠.”
“응, 리샤.”
루퍼스리안은 여동생의 앞에서만 보여 주는 다정한 오빠의 미소를 완벽하게 그렸다.
동생의 사랑스러운 청보라색 눈동자가 소년을 올곧게 향한다.
“가쟈, 어빠.”
“그래, 가자. 어디 갈까?”
동생이 가자는 곳이라면 어디든 같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기의 입에서는 예상 못 한 말이 나왔다.
“압빠하테!”
“…….”
루퍼스리안은 간신히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동생 앞에서 아까처럼 대놓고 티를 내서 불안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띠고서 말을 돌렸다.
“리샤, 우리 인형 놀이 할까?”
방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강아지, 고양이, 토끼 인형을 들고 와서 동생 앞에 놓았다.
사람을 홀리는 사근사근한 미소는 당연히 얼굴에 장착된 채였다.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발칵 화를 냈다.
“시러! 압빠하테 가쟈!”
일부러 말을 돌리려고 한 걸 눈치챈 건지, 볼이 불만으로 퉁퉁해졌다.
정말이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다.
‘역시 우리 리샤는 화나도 귀여워.’
다른 일이라면 루퍼스리안은 여동생의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문제가 달랐다.
그래서 처음으로 루퍼스리안은 동생에게 거부를 표했다.
“다음에 가자, 리샤.”
오빠에게 처음 듣는 거절의 말에, 동생의 조그만 입이 세모꼴로 벌어졌다.
대충 ‘어떻게 그럴 수 있어!’를 온몸으로 표현 중이다.
저렇게까지 충격을 받으니 좀 미안하고 걱정이 됐다.
‘혹시 내가 거절했다고 리샤가 날 싫어하면 어떡하지?’
소년은 이미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거절당한 경험이 있었다.
그 와중에 단 하나 변치 않는 기둥이 되어 준 이가 바로, 이 작고 소중한 누이였다.
여동생에게만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잠시 망설이던 사이.
이 작지만 행동력 넘치는 동생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파의 등받이를 잡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끄응차!”
통통한 엉덩이가 몇 번 꿍싯거리더니.
확실히 전에 비해 힘 있는 움직임으로 아나트리샤는 일어서는 데 성공했다.
“죠와써!”
그리고 끙끙대며 소파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퍼스리안이 손을 뻗어 잡아 주려 했다.
“리샤, 위험……!”
하지만.
탁!
동생의 아기 조가비 같은 손이 루퍼스리안의 손을 쳐냈다.
“리, 리샤?”
동생이 제 손을 쳐냈다는 데에 루퍼스리안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설마, 진짜로?
그의 머릿속에 ‘어빠, 시러!’라고 외치는 동생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하쑤 이써!”
아나트리샤는 끙차끙차 소파에서 내려갔다.
의자에서 내려가는 거라기 보단, 바위산을 위험천만하게 맨손으로 내려가는 듯했다.
루퍼스리안과 유모, 시녀들 모두 긴장한 채로 아나트리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넷 다 즉시 달려들 태세였다.
그리고 그들이 나설 기회는 없었다.
“끙, 차! 쬬아! 대따!”
아나트리샤는 다행히 무사히 등반을 마치고, 바닥에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음걸이도 당당하게 아기 황녀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뽀짝뽀짝.
소리는 없었는데, 그런 효과음이 귀에 들리는 듯한 건, 착각일까?
앙증맞은 걸음걸이를 따라, 분홍색 호박바지가 꿍싯꿍싯 움직였다.
셀리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수, 숨이! 너무 귀여우셔서 숨을 쉴 수가 없어!”
정말 숨이 막혀 오는 듯 꺽꺽거렸지만 이젠 세 사람 모두 셀리나의 이 정도 주접은 바람 부는 소리처럼 가볍게 무시했다.
잠시 동생의 귀여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루퍼스리안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소파에서 뛰어내려 두어 걸음만에 동생을 따라잡는 데에 성공했다.
“어디 가는 거야, 리샤?”
그러자 잔뜩 볼을 부풀린 아나트리샤가 대답했다.
“압빠하테 가꼬야!”
“…….”
“나 혼쟈 가쑤 이써!”
그리고 아기 황녀는 뽀짝뽀짝 발걸음을 재촉했다.
쫑쫑쫑.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쉰 루퍼스리안은 동생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절대로 이 어린 여동생을 이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