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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2/218)

Level 3. 메인 퀘스트 : 아빠 공략 (08)

이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아기 토끼풀은 그대로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릴 것이다.

지난 1년간 황제가 해 왔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는 그럴 생각이었다.

해 왔던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게 바로 죄인에게 어울리는 대가였으니까.

하지만.

“……!”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손이 움직인 뒤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바람결에 날아갈 뻔한 아기 토끼풀이 소중히 쥐어져 있었다.

팔랑거리는 자그마한 이파리가, 마치 그 아이의 살랑거리던 고수머리를 연상시켰다.

저도 모르는 사이 손을 뻗어 버린 모양이다.

감히.

자격 없는 주제에.

그럼에도 황제는 자그마한 토끼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참 무언의 실랑이가 이어진 끝에 결국 카스톨트는 항복했다.

제 손안에 소중하게 쥔 토끼풀 세 줄기를 찻잔에 담아 둔 것이다.

잔에 깨끗한 물을 채워 주고, 시들지 않도록 마력을 부어 주기까지 했다.

이를 지켜보던 시종장은 놀람으로 크게 뜬 눈을 곧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역시. 시종장의 희망 어린 예감은 아마도 맞아떨어질 모양이다.

드디어 1년 넘게 이어진 긴 겨울이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

아빠한테 가서 토끼풀을 전해 주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꼬까옷을 입고, 엘제가 해 준 노란 턱받이를 하고 이유식을 받아 들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과정이다.

그런데 막 크램차우더를 한술 뜨려다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늘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던 얼굴이 없었다.

“웅? 어빠눈?”

그러자 엘제가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해 준다.

“오늘은 좀 늦으시는 모양이에요.”

늘 오빠 놈은 새벽부터 황녀궁으로 오곤 했다.

날 직접 깨우는 경우도 많았고, 좀 늦더라도 아침 식사는 꼭 함께하곤 했다.

그래서 황녀궁의 주방에서는 세 끼 식사를 전부 오빠 몫까지 준비했다.

오늘도 그랬다. 내 맞은편에는 오빠 게 분명한 고기 가득한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식사의 주인은 자리에 없었다.

딱 한입 먹은 크램차우더는 아주 맛있었다.

하지만 그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데?’

스푼을 앙 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옆에서 셀리나가 ‘허윽! 제 손가락도 물어 주세요!’ 하는 헛소리를 한 것 같지만 착각이겠지.

촉이 온다.

뭔가가 싸했다.

오빠 놈의 성향상 오늘 일이 있어서 늦거나 하면 반드시 미리 말해 줬을 거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다면 사람이라도 보냈겠지.

저번에 말없이 하루 안 온 건 내가 엄마를 언급해서였고.

“어빠가 는는다구 전해죠써?”

“아니오. 아마 잠깐 잊어버리셨겠죠.”

아니다.

전생 25년, 현생 약 1년 하고도 몇 달, 도합 26년이 넘는 호적 메이트로서의 경험이 말하고 있었다.

뭔가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오빠 놈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폐하가 좋아?”

그때 분명히, 오빠 놈은 서운해하고 있었다.

설마?

그리고 내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아침을 다 먹고 꽤 기다리다가 본궁으로 갈 때까지 오빠 놈은 머리카락 하나 비추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날 하루 종일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

카스톨트 황제의 일상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가 딸이 준 토끼풀을 보관하기로 했다고 해서 뭔가 격변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공무와 정무로만 이루어진 쳇바퀴 같은 일상.

의무 외에는 어떤 인간적인 즐거움이나 온기, 휴식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죄인을 가둔 감옥과 같은 일과표.

하지만 분명히 변화는 시작되어 있었다.

작은 돌이 쳇바퀴 사이로 굴러들어와 달그락달그락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주 자그마하고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돌멩이가.

“…….”

“…….”

타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황제를 맞이한 것은, 작고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그 존재였다.

카스톨트는 말을 잃은 채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의자 한가운데, 동그마니 잠든 아기가 있었다.

옆에서 시종이 조심스레 설명했다.

“폐하를 기다리시다가…… 그만 잠이 드셨습니다.”

“그렇……군.”

그냥 봐도 알 수 있었다.

아기가 황제의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나.

아기가 너무 귀여워서 그 철두철미한 시종장의 입가 근육이 흐물흐물 풀리려 한다든가.

황제는 옆으로 새려는 상념을 다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다시 아기에게로 향했다.

‘왜…… 굳이 저런 자세로 자는 거지……?’

저 자세로 잠이 드는 게 가능한 건가? 불편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들 정도로 기묘한 자세였다.

머리가 무거워서인지 아기는 의자 시트에 머리를 콕 박고 있었다. 짤따란 두 팔은 이마 아래 받친 채로.

대신이랄까. 통통한 엉덩이가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는지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황제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아기의 머리가 향한 방향에 ‘그것’이 있었다.

딸이 가져온 작은 선물.

그가 일순의 변덕으로 찻잔에 담아 둔 토끼풀 세 줄기가.

카스톨트가 놓아둔 위치에서 미묘하게 앞으로 나와 있었다.

아기가 보기 쉬운 위치로.

절로 상상이 갔다. 해사하게 웃으면서 찻잔을 가까이 끌어다 놓고 보는 아기의 모습이.

“압빠, 죠아!”

가슴이 지끈거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해로울 정도로 귀엽… 아니, 이상한 자세로 잠이 든 거고.

“…….”

카스톨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마침내 아기가 낮잠에서 깨어났다.

커다란 눈이 꿈뻑꿈뻑거리다가 뺨이 통통한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압빠!”

세상의 모든 그늘을 깨끗하게 지워 내 버릴 듯 태양을 닮은 미소였다.

***

‘뭔가가 이상해.’

2회 차 인생을 시작하고, 오빠를 이틀 연속 보지 못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뭐지? 진짜 무슨 일 있나?

아니면……?

내가 아빠 무릎 위에 앉아서 고개를 갸웃갸웃하고 있었더니 시종장이 물어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황녀님?”

나는 고개를 꾸닥거리며 아빠 무릎이 꺼져라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내가 올라앉은 근육 탄탄한 무릎이 살짝 떨리는 게 느껴졌다.

“어빠가 앙 보여.”

(오빠가 안 보여.)

“황자님이요?”

“웅. 만날 만날 와써능데 앙와.”

(응 맨날 맨날 왔었는데, 안 와.)

“황자님이 매일 황녀궁에 가셨단 말입니까?”

시종장의 눈은 놀람으로 커졌다. 그렇게 놀라울 일인가.

“웅. 만날 와써. 긍데 어늘 앙 와써.”

(응. 맨날 왔어. 근데 오늘 안 왔어.)

아빠는 내 방해에 서류에 집중하지 못한 채 멀뚱히 앉아 있었다.

날 무릎 위에 오도카니 올린 채로.

내가 막무가내로 무릎 위로 올라와 앉자,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굳어 있는 거다.

‘계획대로야!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어!’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화려한 꽃이 담긴 고급스러운 화병이 사라지고.

작은 찻잔에 토끼풀 세 줄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분명히 아빠의 마력이 토끼풀을 보호하고 있었다. 시들거나 파손되지 않도록.

그걸 보고 확신했다.

아빠는 날 밀어내지 못할 거라고.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덕분에 아빠의 무릎은 내 방석이 되었다.

‘일보, 아니 이 보 전진! 아싸!’

그러니 내친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였다.

난 아빠 들으라고 시종장과 대화를 이어 갔다.

“어빠 아픙 고 아니까?”

(오빠 아픈 거 아닐까?)

아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역시 걱정되는 거다, 아빠도.

그런데 왜 저렇게 티를 안 내려고 할까.

일부러 멀리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럴 이유가 대체 뭘까?

“하라바지눈 아라?”

(할아버지는 알아?)

황후 자리가 비어 있고, 황제인 아빠는 이 상태.

나는 아직 아기이니 황궁 내부의 살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게 아마도 시종장일 거다.

그런데 시종장은 고개를 저었다.

“황공하지만 저도 황자님께서 어제오늘 황녀궁으로 안 가신 연유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황녀님.”

“웅? 하라버지눈 시졍 대빵이자나?”

(응? 할아버지는 시종 대장이잖아?)

황자궁의 시종들을 통해서 최소한의 정보는 확인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 말씀대로입니다. 과연 영명하십니다.”

아니, 지금 아부하고 있을 테냐고!

내 눈매가 사나워졌다.

오빠 궁 궁인들 상태가 이상했는데. 설마 본궁 시종장까지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내 머리 위에서 생각지 못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황궁 내부 살림은 그대에게 일임하고 있지 않나?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지금 아빠는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시종장 할아범은 희미하게 웃더니 무릎을 꿇었다.

“전부 소인의 무능 탓입니다. 벌해 주십시오.”

“당장 확인해 보도록.”

그러자 시종장이 고개를 들었다.

“황자님께서 매일 본궁에서 뽑아 보내는 궁인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계신지라, 저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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