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3. 메인 퀘스트 : 아빠 공략 (09)
“…뭐라고?”
나도 아빠랑 같은 심정이었다.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야?
“지난번 황자궁의 궁인들에 문제가 있어 전부 벌하고 교체하였습니다만. 그 뒤로 새로 보내는 궁인들을 전부 돌려보내고 계십니다.”
“매일?”
“예. 오늘 아침에도 새로 보낸 이들을 전부 돌려보내셨습니다.”
놀라운 소식에 잠깐 굳었다가, 나는 곧 깨달았다.
시종장 할아범과 눈빛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능구렁이처럼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꼭 내가 도와줄 거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두 분께서 직접 왕림하시어 황자궁의 상황을 살피시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시종장은 진짜 황자궁의 상황을 모르거나, 무관심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오늘까지 궁인들을 되돌려 보내고 있다는 걸 알 리 없다.
무엇보다, 난 오빠가 오늘만이 아니라 어제도 안 왔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다는 건, 황자궁, 황녀궁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시종장이 굳이 이러는 이유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빠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흐리게 일렁거리는 아빠의 아우라.
걱정의 감정이 짙어지고 있었다.
역시 아빠는 나와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시종장도 그걸 알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렇게 돌려서 오빠에게 가 보라는 말을 아빠에게 하는 거겠지.
나에게 그걸 도와달라는 무언의 요청도 하면서.
“…….”
아빠의 아우라가 강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쉽사리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도 않았다.
나는 두 손을 말아 쥐었다.
좋아, 내 차례다!
나는 자그마한 손을 뻗었다. 아빠의 머리카락을 쿡 잡아당겨 시선을 끌어왔다.
“압빠아…….”
일부러 말꼬리를 끌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절대 혼잣말이 아닌 말을.
“어빠 아야하며 어떠케?”
(오빠 아픈 거면 어떡해?)
아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는 더더욱 불쌍하고 처연하게 연속 공격을 넣었다.
“어빠 혼쟈 아야하고 이쓰묜…… 부쨩한데…….”
(오빠 혼자 아프면 불쌍한데…….)
그리고 일부러 촉촉하게 만든 눈을 들어 올려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전생에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고양이처럼 간절하고 불쌍해 보이는 눈빛으로.
‘같이 가 봐요, 네?’
아빠도 사실 가고 싶잖아. 걱정되잖아.
나는 필살기를 썼다. 엘제나 시녀들, 오빠도 당하면 바로 녹다운 당하는 강력한 기술.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우웅? 압빠?”
아빠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찌.”
아직 작고 덜 자란 입과 혀는 제대로 ‘쳇.’ 하는 소리를 만들지 못했다.
약하게 바람 빠지는 귀여운 소리가 울리자, 뒤를 따르는 시녀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걸 애써 참아야 했다.
엘제의 품 안에 안긴 황녀의 작은 뺨이 사탕을 문 것처럼 통통해져 있었다.
잔뜩 심통이 난 것이다.
‘분명히 공격은 제대로 들어갔는데?’
황제의 아우라가 마구마구 떨리고, 표정도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성공인 줄 알았는데.
‘아빠의 가드가 생각보다 단단해.’
하루 이틀 만에 바로 무너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질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벽을 치자, 조금 짜증이 났다.
아나트리샤의 필살기에 맞은 직후.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녀도 시종장도 그가 혹시 그대로 같이 황자궁으로 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딸을 달랑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잊고 있던 일이 있었군.”
누가 들어도 어색한 변명을 허공에 던진 뒤, 황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니까,
‘아빠, 도망갔어!’
아나트리샤는 단단하게 삐졌다.
“훙. 피. 찌.”
단단히 삐진 아기 황녀는 효과적이고 잔인한 복수를 계획했다.
그래서 본궁 어딘가에 숨어 있을 아빠가 들으라는 듯이 커다랗게 소리쳤다.
“어빠랑만 노꼬야! 압빠랑은 앙 노꼬야!”
(오빠랑만 놀 거야! 아빠랑은 안 놀 거야!)
***
아기는 심통으로 볼이 통통 부은 채로 돌아갔다.
유모의 품에 안긴 채 제 오빠랑 놀겠다고 외치더니.
곧 마력으로 포르륵 날아올라 황자궁 쪽으로 사라졌다.
시녀들이 놀라 딸의 뒤를 쫓아가는 모습을, 황제는 황후궁 침실의 창문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울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눈가가 부어 있거나 빨갛지 않은 걸 멀리서나마 확인할 수 있었으니.
지난번 아이가 우는 걸 봤을 때는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다시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딸을 밀어내고 도망쳐 와 놓고는 이런 걱정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에게는 걱정할 자격도, 아버지로서 딸을 대하고 사랑을 주고받을 자격도 없었다.
그걸 모르니 저 어린아이가 계속해서 제 아비에게 치대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비의 죄를 고백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다.
루퍼스리안조차도 아직 어리건만.
아들을 떠올리자, 딸이 한 말이 귓전을 울렸다.
“어빠 혼쟈 아야하고 이쓰묜…… 부쨩한데…….”
(오빠 혼자 아프면 불쌍한데…….)
설마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불안과 걱정이 가슴 속에서 부피를 키웠다.
결국 황제는 등 뒤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선 시종장에게 명했다.
“황자궁이 비어 있다고 했나?”
“예. 이전의 궁인들이 황자 전하께 무례하게 굴면서, 전하의 일을 벨론드 대공 일파에게 넘기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전부 처벌하고 새로 뽑아 보내고 있지만, 매번 되돌려 보내십니다.”
시종장은 다시 한번 황자궁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고 보면 부자답게 황제와 황자의 공통점이 있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답답할 정도로 굳게 지키려 드는 것.
황제가 스스로를 벌주겠다며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나.
황자가 그리 따르던 아버지에게 마음을 닫은 뒤로 저리 냉정한 것도.
정말이지 꼭 닮은 부자였다.
“……카렐만을 보내라.”
카렐만은 본궁의 부시종장으로서 시종장 다음가는 황제의 심복이었다.
1년여 전 황후궁이 빈 뒤에 황제가 자식들에 대해 먼저 입을 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종장은 가타부타 말없이 깊이 고개 숙여 명을 따랐다.
“예, 폐하.”
시종장의 입가에는 흐릿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시종장이 물러가고 난 뒤.
한참을 창가에 기대어 있던 황제가 천천히 뒤돌았다.
이곳은 황제 부부를 위한 황후궁의 침실.
황후궁은 본궁과 나란히 고개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이 방이 빈 뒤 근 1년간 이곳에 단 한 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장소에 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딸에게서 도망치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와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뻔뻔한 자였다. 자신이라는 남자는.
침실 가장 안쪽에는 비단으로 가려진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차마 마주 보기 고통스러워 가려 둔 그림.
그럼에도 간절히 보고 싶은 얼굴이 담긴 흔적.
망설이다 다가간 황제는 천천히 비단을 벗겨 내려 했다.
그때 예고 없이 문이 열리며 등 뒤에서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