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218)

Level 4. 돌발 퀘스트 : 일단, 오빠부터? (05)

“황자, 황녀께서 한꺼번에 마력 폭주를 일으키셨다네요.”

“세상에. 지금까지 마력 폭주를 경험한 황족들은 전부 끝이 안 좋지 않으셨나요?”

“그렇죠.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잘못되거나…….”

“심하면 광인이 되기도 하고.”

“특히 황녀께서 상태가 안 좋아서 며칠째 열병을 앓고 있다던가요.”

안 그래도 황녀는 태어나자마자 백치라는 소문이 있었고, 황자는 늦게 마력을 각성했다.

거기에 폭주 소식이 덧붙자 소문은 점점 와전되기 시작했다.

“황자께서 아예 마력을 잃으셨다죠?”

“뒤늦게 각성하신 것부터가 타고나신 마력에 문제가 있어서였다면서요.”

“황녀께선 벌써 사흘째 열이 안 내리셨다던데…….”

“설마 다시 백치가 되시는 건…….”

소문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바로, 다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벨론드 대공저였다.

대공비는 구름처럼 몰려든 귀족들 중심에서 흐뭇한 미소를 부채로 가렸다.

‘그래. 애초에 그 반푼이들을 내 귀한 아들딸과 비교할 수 있을 리 없지.’

조금 흔들릴 뻔했지만, 이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황녀와 황자에 대한 소문 대부분이 와전된 뜬소문이었지만.

한 가지만은 사실이었다.

사흘째 아나트리샤 황녀가 열병을 앓으며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황녀궁은 사흘 내내 비상사태였다.

여전히 나이에 비해 많이 작고 여린 아기였다.

그 아기가 하얗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엘제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키며, 찬물로 황녀의 얼굴과 몸을 닦아 주었다.

“빨리 나으셔야죠, 황녀님.”

엘제의 걱정 가득한 눈이 황녀의 옆자리에 닿았다.

그곳에는 창백한 얼굴로 아기의 손을 잡고 앉아 있는 은발의 소년이 있었다.

“황자 전하. 궁으로 돌아가서 좀 쉬시는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루퍼스리안이 동생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은 것이.

그동안 일곱 살짜리 소년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루퍼스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 없어.”

사실 황녀궁의 궁인들 대부분이 황자와 비슷한 상태였다.

다들 황녀가 쓰러진 뒤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상태보다 황녀와 황자를 더 걱정했다.

셀리나는 따뜻한 우유를 넣은 수프를 가져와 황자를 설득했다.

“아기님이 쓰러지시고 물 한 모금도 안 드셨어요. 조금이라도 드세요.”

“…….”

“아기님이 깨어나시면 오빠 얼굴이 이게 뭐냐고 화를 내실 거예요.”

“…….”

그 말에 겨우 루퍼스리안이 움직였다.

“시러어! 머거! …굴므묜 시러! 우엥!”

귓가에 아나트리샤의 울음이 쟁쟁하게 울렸기 때문이다.

이틀 밥 안 먹었다고 그렇게 화를 냈으니.

지금 루퍼스리안의 꼴을 보면 더더욱 분통을 터뜨리며 엉덩이를 때리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나트리샤가 다시 일어나기만 한다면 소년은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깨어났을 때 걱정하거나 화내는 건 싫었다.

소년은 억지로 수프를 받아 삼켰다.

하지만 겨우 몇 모금이 다였다. 목구멍에 돌이 꽉 들어찬 것 같아서 도저히 들어가지 않았다.

루퍼스리안은 자그마한 아기의 손을 잡은 채, 빌고 또 빌었다.

‘정말 태양신이 우리를 돌본다면 지금 기적을 보여 줘.’

외롭게 지낸 1년간 소년은 수도 없이 빌었다.

자신을 외로움에서 구해달라고.

하지만 태양신은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대신 대답해 주고 손을 내밀어준 이는 바로 동생이었다.

그에게는 동생이, 아나트리샤가 유일한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제발, 리샤…….”

오빠가 잘못했으니까.

뭐든 다 할 테니까, 눈을 떠 줘.

소년의 속삭임에도 아기의 굳게 감긴 눈꺼풀은 움직일 줄 몰랐다.

***

깊은 밤.

아기 황녀의 병상에는 계속 황자와 시녀들, 궁의들이 돌아가며 붙어 있었다.

한시도 황녀의 옆자리는 비지 않았다.

벌써 이런 상황이 나흘째였다.

루퍼스리안은 잠시 잊고 있던 분노를 다시 되씹었다.

창밖으로 여전히 불이 켜진 본궁의 집무실 창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딸이 죽어 가는데도 황제는 그대로였다.

‘냉혈한.’

잠시 사나운 눈으로 황제의 집무실을 노려보던 루퍼스리안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동생을 돌보는 데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가치 없는 분노에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여전히 불안정한 여동생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는데,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를 누가 옮긴 거지?’

루퍼스리안의 마력 폭주 때.

소년은 먼저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아나트리샤는 이렇게 위중하게 앓을 정도로 고생했다. 오빠의 마력 폭주를 잠재우느라.

그렇다면 마력이 휘몰아치는 황자궁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마력 폭주가 일어날 뻔한 사람을 옮기는 건 위험해.’

터지기 직전의 폭탄과 같은 상태가 그때의 루퍼스리안이었다.

아나트리샤가 자신의 마력으로 제 오빠의 폭주 직전 상태였던 불안정한 마력을 안정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폭주를 일으켰을지도 몰랐다. 그랬다간 돌이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운이 좋아야 불구로 끝났겠지.

그리고 위험한 것은 정신을 잃은 아나트리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이 함부로 건드렸다가 잘못하면 더 크게 휘말릴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아나트리샤는 안전하게 황녀궁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루퍼스리안 역시 동생의 침실 옆방에 누워 있었다.

이제야 겨우 그 의문이 떠오를 여유가 생겼다.

아나트리샤가 쓰러진 다음 날은 루퍼스리안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뒤에는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아나트리샤의 유모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유모, 그때 누가 우리를 옮……?”

루퍼스리안의 의문은 제대로 끝을 맺지 못했다.

그의 의식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소년은 맥없이 픽 쓰러졌다.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질 뻔한 소년을 받아 낸 손이 있었다.

“폐……!”

엘제가 놀라 손의 주인을 부르려다, 남자가 고개를 젓자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물러가도록.”

엘제는 군말 없이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그는 루퍼스리안을 안아 올려 아나트리샤의 옆에 눕혔다.

루퍼스리안의 마력이 안정되어 있다는 걸 확인한 후.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 침대 위에서 색색 잠든 아기에게 다가왔다.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손길.

“아가…….”

한숨 같은 목소리가 조용히 침실 공기를 울렸다.

차마 아기를 건드리지 못하는 손길과, 너무나도 조용한 목소리의 주인은 한 명이었다.

아기와 같이 붉은 빛 도는 금발을 가진 미남자.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걱정과 근심을 가득 담은 채 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의 그 위험하던 때보다는 나았다.

카스톨트 황제는 며칠 전의 그 아찔한 순간을 떠올렸다.

***

태양석이 폭발할 듯한 빛을 내뿜었다.

동시에 카스톨트는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폐하?”

시종장이 경악할 정도로 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불안정한 두 종류의 마력이 갑자기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마력의 속성은 불꽃, 그리고 눈과 얼음.

상극에 가까운 마력이 서로 반발하며 폭주하고 있었다.

‘루퍼스!’

그리고 더 집중하자 이를 감싸 안정시키려 애쓰는 다른 마력의 기운도 느낄 수 있었다.

‘리샤!’

카스톨트는 더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로 달려갔을 때, 황자궁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지붕에 구멍이 나 있었고, 벽과 계단이 완전히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기적적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다.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했다.

어린 딸이 오빠의 마력 폭주를 막아선 와중에, 사람들을 위한 결계까지 쳤기 때문이다.

“아으윽!”

자그마한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새어 나왔다.

이미 루퍼스리안은 기절한 듯했다.

아나트리샤는 제 오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카스톨트는 마력을 펼쳤다.

아나트리샤와 비슷한 속성을 가진 그의 마력은, 어렵지 않게 딸의 마력과 어우러질 수 있었다.

날뛰던 아들의 마력이 안정된 순간.

어린 딸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황제는 의식을 잃은 딸과 아들을 망연하게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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