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218)

Level 5. 메인 퀘스트 : 아빠 함락 (01)

그 광경을 목격한 이들에게는 함구령을 내려 두었다.

덕분에 루퍼스리안도 아나트리샤도 그때 카스톨트가 달려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

물론 아나트리샤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기에 주변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적어도 황녀궁의 궁인들은 믿을 만한 이들이니.’

‘그녀’가 직접 엄선한 이들이니 당연했다.

원래 황자궁 역시 비슷한 상태였다.

그런데 루퍼스리안이 태어났을 때부터 모시던 시녀장이 죽고, 몇몇이 석연찮은 이유로 쫓겨난 뒤 상황이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카렐만은 믿을 수 있는 자이니 괜찮겠지.’

잠든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다. 더는 끼어들거나 다가갈 자격이 없었다.

그에게는.

다시 그때처럼 애정과 존경 어린 시선을 받을 자격이 그에게는 없었으니까.

잠시 귀하디 귀한 딸과 아들을 바라보던 그는 소리 없는 한숨을 삼켰다.

몰래 아이들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그런 사치를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하러 왔을 뿐.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기의 둥그런 이마에 댔다.

비정상적인 열기가 느껴졌다.

어린 몸은 마력 폭주의 잔재를 제대로 감당해 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루퍼스리안도 비슷한 상태였지만, 카스톨트가 펼친 치료 한 번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하지만 훨씬 어린 아나트리샤는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매일 밤마다 마력 치료를 했음에도.

카스톨트는 미량의 마력을 아이의 몸 안으로 부어 넣어 섬세하게 움직였다.

딸의 몸에 남은 폭주 마력의 잔재를 지우고 재생을 돕는다.

대륙에 마력을 가진 이들은 많지만, 이런 기예에 가까운 마력 제어와 치료를 구현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카스톨트 황제는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이였다.

그는 새벽녘까지 딸의 몸에 마력을 쏟아붓다가 소리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침내 아나트리샤가 눈을 떴다.

***

깜빡깜빡.

눈을 뜨니까 천장이 보였다. 베이지색 바탕에 이름 모를 노란 꽃무늬가 수놓아진 비단 벽지.

아는 천장이다.

잠깐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맞아! 오빠!’

오빠의 마력 폭주는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다.

내 대처가 제대로 먹혔는지 확인해야 했다.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려다 장렬하게 실패했다.

“으, 아우……!”

허우적허우적.

내 짤따란 팔다리는 허망하게 허공을 휘저을 뿐.

아, 맞다. 지금 나 아기였지.

아기 경력이 아직 짧다 보니 자꾸 까먹게 된다.

게다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팔다리가 젖은 솜덩어리처럼 무거웠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빙글 구른 다음, 아기 침대 울타리를 지지대 삼아 잡고 일어나려 했는데.

떽데굴, 폭!

“웅?”

왜 내가 오빠 품속으로 굴러 들어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 인간이 왜 여기 있어?

……소름 끼쳐 하기 전에, 일단 오빠 놈의 마력 상태부터 확인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마력 폭주가 진정이 되었느냐니까.

다행히 오빠의 마력은 안정되어 있었다. 양쪽 속성의 마력 모두.

‘다행이다.’

조금 걱정했었는데.

전생의 내게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지금 내게는 무리한 일이었다.

두 살 아기의 몸으로 폭주 중인 마력을 진정시키는 건 말이다.

‘전생의 내가 들으면 미쳤냐고 하겠지.’

하지만 난 해냈다!

절로 두 팔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만셰!”

역시 난 대단해!

내가 품속에서 난리를 쳐서인지 오빠 놈이 눈을 떴다.

“……리샤?”

커다란 눈이 끔뻑거리며, 사파이어 같은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직 일곱 살짜리인데도 콧날도 오뚝하고 턱 선도 예술적으로 갸름하다.

이렇게 코앞에서 보고 있는 건 좀 부담스럽긴 한데.

그래도 새삼 잘생기긴 했다.

진짜 뉘 집 아들이래. 아, 우리 집 아들이지. 우리 엄마 아빠 아들…….

‘진짜 이 화상!’

지금은 알겠다. 왜 오빠 놈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황녀궁에 발걸음을 끊었는지.

‘마력 폭주의 전조를 느낀 거야.’

내가 위험해질까 봐 일부러 안 온 거다.

어쩌면 황자궁에서 사람을 전부 내친 것도 그래서일 수도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위험하니까.

“위험…….”

“리샤를 데리고 나가! 어서!”

나는 심통이 나서 감히 아픈 걸 숨긴 오빠 놈에게 마땅한 응징을 가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오빠 놈의 코를 온 힘을 다해 꼬집었던 것이다.

“떼끼!”

“우악!”

마력도 쪼금 써서 꽤 아팠는지 오빠는 비명을 질렀다. 하얗던 코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오빠만이 아니라 내 입에서도 비명이 나왔다.

“아우.”

몸이 안 좋긴 한지 마력 조금 써서 손가락 힘 좀 강화했다고, 팔까지 저릿저릿했다.

빨리 마력을 빼 버리고 아픔을 삭이고 있자니, 오빠의 뒤늦은 반응이 터져 나왔다.

벌떡 일어나더니.

“리샤?! 리샤! 일어났어?! 꿈이 아니었어!”

오빠 놈은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재 본다, 내 몸 상태를 확인한다, 온갖 호들갑을 다 떨어댔다.

“진짜 일어난 거지? 열 없지? 안 아픈 거 맞지?”

마침내 내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오빠 놈은 얼굴 가득 기쁨을 만개시켰다.

그야말로 백합 꽃밭이 일시에 피어나는 것 같은 환한 미소였다.

오늘은 백합이긴 한데, 빨간 백합이다. 코만 빨간 게 아니라 뺨도 발갛게 상기되어 있어서다.

아, 눈도 빨갛네. 눈두덩이도 퉁퉁 부어 있었다. 꼭 운 사람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웅. 앙 아파.”

“다행이다!”

오빠는 두 팔로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 걱정 가득한 소리를 내질렀다.

“왜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한 거야!”

이게 뭔 소리야?

아빠 아들놈은 감히 나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그때 나 마력 폭주 상태였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

“아라. 아라.”

나는 귀가 간지러워서 후비면서 대충 대꾸했다.

뭐래.

“알면 바로 도망쳐야지! 나한테 달려오면 어떡해! 아무리 오빠가 좋아도 그렇지!”

“…….”

뭐라는 거야, 이 바보가.

“너 그 여파로 나흘 넘게 열이 펄펄 끓었어! 죽는 줄 알았다고! 이 오빠가 옆에서 간호해서 다행히 나은 것 같지만, 앞으로는 절대 그런 위험한 짓 하면 안 돼. 알겠지? 아무리 세상에 하나뿐인 오빠가 좋고 걱정되어도 절대로 그러면 안……!”

퍽!

“컥!”

짜증 나서 계속 주절거리는 오빠 놈의 입을 퍽 쳤다. 아주 조금 마력도 써서.

아야야. 역시 아프다. 한동안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건 자제해야겠다.

입을 부여잡고 아픔을 삭이는 오빠 놈을 제쳐 놓고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팔이 너무 짧아서 기지개를 켜도 머리끝에 다 안 닿았다. 진짜 이래서는 언제 다 큰담.

“으아함.”

하품을 하고 있자니 오빠가 옆에서 바보같이 중얼거렸다.

“리샤 하품 귀여워!”

……왜 환생하면서 바보가 된 것 같지. 아, 아닌가. 원래 바보였나.

오빠 놈은 거의 네 발로 기며 외쳤다.

“너무 귀여워! 한 번만 더 해 줘! 응?”

……더 바보가 된 거 맞는 거 같은데.

어쩌면 마력 폭주의 여파가 전부 머리로 간 걸지도 모르겠다.

난 진지하게 걱정이 되어서 오빠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혹시나 열이 있지는 않나.

마력 폭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특히 머리 쪽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우리 리샤, 오빠 걱정해 주는 거야? 오구오구.”

헤벌쭉한 표정을 보니 내 걱정이 더 바보 같아졌다.

나는 예정된 아픔을 무릅쓰고 마력을 팔에 집중했다.

퍽!

“우악!”

오빠 놈은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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