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218)

Level 5. 메인 퀘스트 : 아빠 함락 (04)

이젤리아 황후는 더없이 아름답고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황후궁에서 일하는 내내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이젤리아 황후는 그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넘치는 아랫사람 중 하나로 볼 뿐.

조금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이젤리아 황후의 행복과 영광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결국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내게 기회가 왔지. 아니, 내가 만들어 낸 기회가.’

벨론드 대공 부부의 음모만 아니었다면, 그 기회는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되었으리라.

그랬다면 지금 황후의 자리는 진작에 자신의 것이었을 텐데.

아니다. 늦지 않았다.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스스로를 타이르며, 그녀는 자신을 다잡았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지지 않겠다는 듯 결연하게 황녀를 직시했다.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환하게 웃으며 포르륵 날아올랐다.

“가쟈!”

아기 황녀를 필두로 한 무리가 우르르 집무실로 사라졌다.

그녀는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휑하니 남겨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멍하니 텅 빈 복도를 보았다.

‘나를… 나를…… 무시한 거야?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제 어미, 이젤리아 황후처럼.

절로 패배감과 열등감, 분노가 치밀었다.

황후궁이 빈 직후부터 가졌던 기대와 희망이 매 순간 깎여 나가며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혀 온 감정들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소용없을 거야. 황제가 얼마나 무심한데.’

그는 황후가 없어진 이후 삶의 즐거움이나 육친의 애정 따위는 모르는 목석처럼 살고 있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몇 번이나 접근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할 정도로.

그녀가 황제의 식사나 차 시중을 들려 시도하다가 실패한 횟수는 손으로 셀 수도 없었다.

황녀라고 다를 건 없다.

황제는 특히 제 자식들을 타인보다 더욱 피하려 들고 있었으니까.

‘제 아비에게 거절당하고 꼴사납게 울어 보라지.’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심술궂은 미소를 숨겼다.

***

“이게……, 뭐지?”

카스톨트 황제는 멍하니 집무실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물었다.

시종장은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루퍼스리안은 구석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시종들과 트롤리 군단의 가장 앞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그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언제 봐도 경이적인 마력 양과 제어 능력을 자랑하며 허공에 동동 떠 있는 아기.

아나트리샤가 짤따란 두 팔을 만세 하듯 들어 올리자, 트롤리의 뚜껑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압빠 맘마 머겅!”

다섯 개의 트롤리에는 고기가 가득한 식사가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황제의 파란 눈동자가 커졌다.

딸과 꼭 같은 눈빛을 가진 ‘그녀’가 몇 번이나 직접 챙겨 왔던 그때와 거의 비슷한 식단이었다.

“당신은 고기 없으면 밥을 안 먹잖아.”

고기가 가득한 접시들이 우르르 날아올라서 카스톨트의 앞에 차례로 안착했다.

아기는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테이블 위에 올라앉았다.

아기의 옆에 놓인 클로버가 바람을 타고 한들한들거렸다.

아나트리샤는 자그마한 손으로 직접 포크를 집었다.

“읏챠!”

무거운지 마력으로 손힘을 강화하는 것이 보였다.

카스톨트는 저도 모르게 아기의 손에서 포크를 뺏어 들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또 마력을!’

포크를 빼앗긴 아이는 놀란 눈을 하더니, 곧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압빠는 혼쟈서도 잘 멍는구나!”

그러더니 동동 떠올라 황제의 머리를 쓰담쓰담하기 시작했다.

“아이 차캐! 차카다!”

주변에 경악이 내달렸다.

‘세, 세상에!’

‘지금 분명히 폐하께 머리 쓰담쓰담을……!’

‘저, 저도 해 주세요, 황녀님! 저도 쓰담쓰담!’

중간에 이상한 마음의 언어가 들리는 듯했지만, 다들 의식적으로 무시했다.

‘폐하께서 그냥 넘기실까요?’

무력해지기 전까지 황제는 그 냉정함으로 널리 알려진 이였다.

노회한 대귀족이나 타국의 왕족이라도 황제의 차가운 표정 앞에서는 공포를 느끼며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런 황제를 이렇게 막(?) 대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전에는 단 한 명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없지 않은가.

그 뒤로 황제를 이렇게 취급하는 건 이 멋모르는 아기 황녀가 처음이었다.

아나트리샤는 빙글 날아올라 황제의 손에서 포크를 뺏어 들었다.

“그래두 리샤가 먹여주께여! 차칸 압빠니까! 트뼈 서비수!”

(그래도 리샤가 먹여 줄게요! 착한 아빠니까! 특별 서비스!)

모두가 두려움과 기대감이 범벅이 된 채 황제와 아기 황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조금 늦게 본궁 집무실에 도착했다.

바로 따라왔다간 황녀 일행과 함께 온 것으로 황제가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황녀가 황제에게 거부당하고 시무룩해져서 물러가는 걸 지켜본 뒤에 접근할 생각이었다.

황녀의 실패를 고소하게 즐겨 준 뒤에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폐하를 얻고 말겠어…….’

애초에 그녀가 벨론드 대공 부부와 손을 잡은 것도 큰 꿈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원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했다.

벨론드 대공 부부의 배반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황제의 마음에 아직도 단 한 명의 여인만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황후궁의 침실에 발걸음 한 황제를 보고 새삼 깨달았다.

‘황제는 아직도 잊지 못한 거야…….’

그래서 지난 시도가 수없이 실패한 뒤, 그녀는 최근에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유일한 여인을 따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머리 스타일과 옷, 화장법, 그리고 직접 남편의 집무실로 식사를 챙겨다 주는 행동까지.

황녀는 황후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황자는 아닌 듯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바뀐 차림새를 보고 유난히 불쾌해하던 걸 보면.

‘그만큼 내가 자신의 어머니를 닮았다는 거겠지.’

그녀는 만족감과 기대감에 찬 채 집무실에 도착했다.

‘어디, 건방진 황녀가 잔뜩 풀 죽은 꼴을 볼까?’

다행히 집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황녀 일행이 데리고 들어간 시종 군단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시종들의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후작 부인은 경악하고 말았다.

***

“압빠, 아-.”

황제의 얼어붙은 듯 냉랭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린 딸이 어설프게 내미는 포크를 향해 고개를 내밀어 입을 여는 태도는 표정과는 반대였다.

황제가 아, 하고 얌전히 벌린 입으로 두툼한 양고기 스테이크 세 조각이 한 번에 들어갔다.

그러자 아기 황녀는 동동 떠올라 조가비 같은 손을 뻗었다.

“자래써여. 차캐여.”

쓰담쓰담.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

내가 쓰담쓰담을 시전했을 때. 똑똑히 보았다.

아빠의 아우라가 요동치는 것이.

눈을 녹이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부드러운 움직임.

기쁨.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아빠의 아우라가 기쁨과 애정만으로 가득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이 쉽게 되지는 않았다.

기분 좋게 흔들리는 기쁨의 아우라 주변에, 찌꺼기처럼 남은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감정은 간단했다.

죄책감. 슬픔. 걱정.

새삼 의문이 들었다.

왜 아빠는 우리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떨지 못하는 걸까?

아빠와 오빠의 사이가 멀어진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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