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218)

Level 5. 메인 퀘스트 : 아빠 함락 (06)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아빠의 눈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공에 동동 떠 있는 걸 그만두고 테이블 위에 톡 내려앉았다.

그리고 끙차끙차 기어서 아빠의 무릎 위로 내려간 다음.

아빠를 올려다보면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아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내 탓이다. 전부. 내 잘못이야.”

“…….”

“내 잘못으로, 내 죄로 너희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게 되었는데. 전부…… 내 죄다.”

그렇게 말하는 아빠의 표정은 슬픔과 고통으로 꽉 차 있었다.

아빠의 아우라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구로묜 왜 리샤랑 어빠를 앙 보려구 하신 고에요?”

(그러면 왜 나랑 오빠를 안 보려고 하신 거예요?)

희고 길쭉한 손가락이 아빠의 눈을 가렸다.

“내게 자격이 없으니까.”

고개를 갸웃했다.

자격? 무슨 자격?

“사랑스러운 너희의 곁에 다가갈 자격도 너희를 사랑할 자격도 사랑받을 자격도 없으니까.”

아빠의 고통스러운 고백이 이어졌다.

“나 같은 죄인에게는…….”

가슴이 뭉클거렸다.

그러니까 아빠는 나랑 오빠가 싫거나 꺼려진 게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우리가 엄마와 이별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거다.

뒤늦은 깨달음이 왔다.

아빠가 엄마를 잃은 지 이제 겨우 1년 반이 지났을 뿐이라는 걸.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아빠보다 지금의 아빠는 훨씬 나이가 어렸다.

더 미숙할 게 틀림없다.

가슴이 뭉클거리고 아빠에 대한 안쓰러움이 번지는 한편으로.

조금 화도 났다.

나는 아빠의 무릎 위에서 발딱 일어섰다.

그러자 아빠의 눈이 성큼 가까이 다가왔다.

짤따란 두 팔을 허리에 집은 채 엄숙하게 말했다.

“구래서 우리도 벌쥬는 거에여?”

(그래서 우리도 벌 주는 거예요?)

“……뭐?”

아빠의 눈이 지금까지 중 가장 커다랗게 벌어졌다.

나는 엄숙하고 어른스럽게 아빠를 혼낼 생각이었다.

아빠의 상처와 자책은 이해하지만 그것 때문에 나랑 오빠를 버려 둔 건 말도 안 된다고.

그렇게 어른스럽게 꾸짖고 화를 낼 생각이었는데.

말이 이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구차나여. 구래셔… 나두… 어빠도 안 보려구 하구…….”

(그렇잖아요. 그래서 나도 오빠도 안 보려고 하고…….)

눈가가 뜨끈뜨끈해지더니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결국 나는 아기답게 울어 버리고 말았다.

“나눙… 아빠하테 션무도 주꼬…… 어빠랑 아빠랑 가치 놀구 싶었, 킁, 눙데……. 아빠눈 장난하지 마라고…… 흐에에엥!”

솔직히 너무너무 서러웠다.

“……아가.”

눈앞이 온통 흐렸다.

조금 전 아빠 아들놈이 유치하다고 할 게 아니었다.

나도 결국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압빠 미어!! 우에에엥!”

참았던 서러움과 서운함이 마구마구 튀어나왔다.

내가 아빠를 다시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데!

전생에 열두 살에 헤어졌을 때, 시신도 못 찾아서 빈 관으로 장례식을 치르면서 나랑 오빠랑 엄마랑 얼마나 울었는데!

그랬던 아빠랑 다시 만난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아빠가 나한테 차갑게 대했어!

나 무시했어!

엄마한테 이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이제 겨우 대화가 가능해진 아빠 앞에서 토해 놓을밖에.

아빠 옷에 눈물 콧물 다 바르면서 목 놓아 울어 버렸다.

지금 내 정신적인 나이가 25+α라는 건 잠시 잊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가 나를 피하고 외면하고 차가운 말을 하던 게 전부 떠올랐다.

서러웠다. 서럽고 슬프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기두온 아찌도 나 죠타고 노라젼눈데! 어떠케 압빠가아 그러쑤가 이써어우우아아엥!”

우명 삼촌도 전생이랑 똑같이 날 대해 줬다고!

“애 우이아 버를 바다야하눙 곤데여후에엥엥엥!”

(왜 우리가 벌을 받아야 하는 건데요!)

아빠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바가 우리항테서 압빠를 빼사가버리묜 오또케! 아쁘아가 오또케 그러슈가 이써! 미어! 크흥, 으흐어엉!”

이건 말도 안 돼.

아빠가 우리한테서 아빠를 빼앗은 거잖아.

나는 그렇게 첫 생일날 처음으로 깨어나 아빠를 보았을 때보다 더욱 서럽게 울었다.

아빠의 금 자수 예복이 완전히 푹 젖어 버릴 때까지.

아빠는 나를 조심스레 안고 속삭였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가. 정말……, 미안하다.”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아빠는 그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

지독한 열패감에 시달리며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힘없이 황후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황후궁은 그녀의 성이었다.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황후 자리가 비어 있는 지금은 천재일우의 기회였으므로.

‘내가 어떻게 이 기회를 만들어 냈는데!’

그런 그녀의 앞에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와장창!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더니, 황자가 본궁 3층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헉!”

“세, 세상에!”

경악한 건 다브네스 후작 부인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와 하녀들.

본궁의 시종들. 정원사들까지.

모두가 굳은 사이.

놀랍고 다행하게도 황자는 멀쩡하게 정원에 착지했다.

그야말로 고양이처럼 안정적이고 유연한 자태였다.

그제야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황자가…… 마력을 각성했다고 했지.’

폭주가 있었다고 해서 제대로 마력을 쓰지 못하는 것인가 했다.

하지만 저걸 보면 그건 아닌 듯싶었다.

황자의 마력은 아주 멀쩡했다.

그건 즉, 황위 계승권이 굳건하다는 소리였다.

황자는 위쪽을 향해 빽 외쳤다.

“리샤 미워!”

서럽고 원망스러운 목소리.

그렇게 말하는 루퍼스리안 황자의 눈가에는 분명히 눈물이 한 방울 어려 있었다.

다다닷!

그리고 황자는 순식간에 달려서 사라졌다.

황자궁 방향으로.

황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쿨쩍.”

정신이 든 건 한참 지나서였다. 눈이 퉁퉁 부어서 앞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내가 콧물을 훌쩍거리자 아빠가 자기 셔츠 소매로 코를 닦아 주었다.

그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자, 흥.”

나는 맘껏 흥했다.

“패앵!”

아빠의 윗옷은 물론이고 소매까지 다 젖어 버렸지만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빠는 나를 폭 안아다가 푹신푹신한 소파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가.”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아직 덜 풀려서였다.

아빠는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죄인이란다.”

“…….”

“그래서 너와 루퍼스에게 다가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 너희들에게서 엄마의 품을 빼앗은 죄인이, 감히 너희와 함께 하는 행복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외면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절로 툭 하고 대답이 튀어나왔다.

“마됴 앙대. 바버가튼 소리야.”

그러자 아빠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아빠가 바보였구나.”

아빠의 커다란 손이 내 자그마한 손을 감싸 안았다.

“네 말대로란다. 나에게 벌을 주는 거라고 하면서, 정작 너희들에게서 아버지까지 빼앗아 버리다니. 너희에게까지 내 잘못을 짊어지게 한 꼴이야.”

아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볼 수 있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우리 아빠의 눈빛을.

죄책감이나 슬픔으로 나와 오빠를 피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정하고 상냥하게 우리에 대한 애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던 아빠를.

“아빠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우리 딸. 우리 아가.”

아빠는 용서해 달라고는 하지 않았다. 성격상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나는 다시 훌쩍거리면서 물었다.

“그름 떠 몬뗀 말 안 할꼬야? 크흥!”

“그래. 절대로.”

나는 못이기는 척 두 팔을 뻗었다.

이번에 아빠는 망설임 없이, 그리고 명명식 날처럼 죄책감이나 불안감 없이, 전생에서처럼 나를 안아 주었다.

따스하고 든든한 품.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겨우 전생의 아빠를 되찾았다는 걸.

“에헤헤헤.”

그래서 바보처럼 웃으며 아빠의 품에 뺨을 비볐다. 

비비적거리다가 아까 내가 적신 데가 차가워서 옆쪽으로 돌아 안겼다는 건 비밀이다.

***

진정하고 아빠가 세수를 시켜 주고.

“자, 리샤. 흥.”

“크흥!”

아빠도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아, 맞다. 우리 삐돌이.’

‘리샤 미워!’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이며 도망간 아빠 아들을 찾으러 갈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시야 구석에서 삐롱삐롱하는 메시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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