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218)

Level 6. 메인 퀘스트 : 다시 친해지기 바라 (02)

루퍼스리안 황자는 거의 살기까지 띠고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했다.

‘외로운 아이라면 곁에 없는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 앞에서는 약해져야 정상 아닌가?’

“저, 전하?”

등줄기가 오싹했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게 된다.

루퍼스리안이 한 발자국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것만으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절로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라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했다.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야. 내가 어머니의 물건을 훔친 도둑을 살려 줄 마음이 들게 하려면.”

소년의 몸 주변으로 흰빛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저 마력의 색을 잘 알고 있었다.

루퍼스리안의 모친 이젤리아 황후가 가졌던 마력의 색과 꼭 같았다.

북쪽 끝. 눈과 얼음의 나라 하스티아의 왕족들이 대대로 물려받은 마력의 형질.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저 머리 색과 외모만 물려받은 게 아닌 것이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마도 이건 절대 착각이 아니리라.

몇 걸음 더 뒷걸음질 치던 그녀는 다리가 꼬여 꼴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아!”

루퍼스리안이 흉흉한 태도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다급하게 외쳤다.

“훔치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재미없는 변명이야.”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황후, 황후 폐하께서 제게 주신 겁니다! 마지막 선물이라며 하사해 주시고 가셨습니다!”

멈칫.

그 말에 루퍼스리안의 살기가 잠잠해졌다.

있을 법한 일이었다.

윗사람이 자신이 입던 옷이나 쓰던 장신구를 아랫사람에게 하사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루퍼스리안이 기억하는 어머니는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걸 아끼지 않았다.

지금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입은 옷은 황후의 옷 중에서는 수수하고 오래된 편인 것이기도 했으므로.

루퍼스리안은 낮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다. 이만 가 봐.”

그는 후작 부인에게서 주의를 거두고는 다시 카렐만에게 짜증을 냈다.

“너도 빨리 꺼져.”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안도했다.

‘일부러 수수한 걸 골라 입어서 다행이야.’

방금 그녀가 한 변명은 전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황후궁이 빈 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황후가 남긴 물건들을 제 것인 양 사용했다.

물론 정말 중요하고 귀한 물건들은 황후궁 밖으로는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타인의 눈에 띄었다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귀한 것들은 남몰래 걸쳐 보고 황홀해했고.

이렇게 변명할 수 있는 수준의 물건들만 가끔 입고 나왔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변명이야.’

정말 황후가 그녀에게 준 것인지 확인하긴 어려웠으니까.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비슬비슬 일어나 루퍼스리안에게 접근했다.

‘옷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잖아. 아직 어린애니 당연하지. 내가 그 틈새를 파고들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황제의 적장자이자 유력한 황위 계승권자인 루퍼스리안이다.

이 소년을 손에 넣으면 그녀가 꿈에서도 바라던 것이 손에 들어올지 몰랐다.

지금은 도둑처럼 숨어서 몰래 걸쳐 볼 뿐인 저 황후의 의복과 보석들을, 당당하게 제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나이 들고 못생겼던, 지금은 죽어 버린 남편과는 전혀 다른 저 빛나는 남자 옆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간절히 바라오지 않았던가.

욕망은 이성과 두려움마저 마비시켰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용기를 내어 다시 루퍼스리안에게 접근했다.

“전하…….”

여전히 카렐만에게 화를 내고 있던 황자는 다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서 가라 하지 않았나?”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간곡하게 말했다.

“전하가 걱정되어 차마 갈 수가 없습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루퍼스리안마저 바로 화를 낼 수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얼마나 걱정하셨는데요. 저에게 황자 전하를 돌봐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셨으니, 저는 이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거짓 눈물까지 짜내었다.

루퍼스리안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가… 나를……?”

“예, 전하.”

“……리샤는 빼고, 나만?”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머릿속에 조금 전 루퍼스리안이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

“리샤 미워!”

부모의 애정을 두고 경쟁하는 형제자매는 흔하다.

특히나 지금의 황자는 제 누이와 황제에게 마음이 상해 있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당연하지요. 황후께선 황자 전하만 사랑하셨답니다. 그래서 제게 전하만을 부탁하셨어요.”

황자는 이번에는 위협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원하던 대답인 모양이다.

그녀는 쾌재의 미소를 삼켰다.

역시 황자에게는 모친이 약점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건 거짓말도 아닌걸.’

실제로, 이젤리아 황후가 그리 부탁했으니까.

물론 황자만 돌봐달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 차이는 없으니 상관없다.

자신은 옛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것뿐이다.

그녀는 그리 합리화를 하며 황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황후 폐하를 대신해서 황자 전하를 사랑해드릴게요.”

황후의 다정한 손길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 내면서.

“황제 폐하나, 황녀 전하보다 더요.”

***

오빠의 짜증 가득한 외침이 꽤 멀리서도 잘 들렸다.

“저리 꺼져!”

아빠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카렐만이 와 있었군.”

“카레만? 뉴구에여?”

“본궁의 부시종장이다. 루퍼스의 상황을 듣고 내가 보냈다.”

나는 활짝 웃으며, 아빠의 뺨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자래써여!”

그러자 아빠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정수리가 보이도록 가까이 들이댔다.

제대로 머리로 쓰담쓰담을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

꼭 아빠 아들이 하던 행동이랑 똑같았다.

‘누가 가족 아니랄까 봐.’

나는 아빠의 머리를 쓰담쓰담해 주었다.

그래도 내가 혼내기 전에도 아빠가 오빠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구나.

조금 대견(?)했다.

우쭈쭈, 잘했어요, 우리 아빠. 다 컸네.

그리고 황자궁 바로 앞에서 나와 아빠는 이상한 광경을 마주했다.

“웅? 저 아줌마 왜 여기찌?”

아까 본궁에서 주제넘게 나서던 아줌마다.

아빠의 식사를 챙기려던 거나 거만한 태도가 싸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째서 여기까지 쫓아와 있는 거야?

그것도.

‘왜 오빠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해?’

그 여자는 애잔한 미소를 지은 채, 오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탁!

오빠는 여자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쳐냈는지 성인이 나동그라질 정도였다.

“꺄악!”

오빠는 차갑게 말했다.

“거짓말쟁이.”

“저, 전하!”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 없어!”

“아니요. 황후 폐하께선 분명히……!”

“웃기지 마! 엄마가 리샤는 안 사랑하셨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오빠니까 아기인 리샤를 지켜 줘야 한다고 하셨단 말이야!”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감히 엄마 흉내를 내면서 거짓말을……!”

오빠는 대놓고 살기를 내보였다.

두 종류의 마력이 동시에 일어나 주변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너 따위는 필요 없어! 난 리샤만 있으면 충분해!”

그동안 루퍼스리안은 여동생의 존재에 기대 버텨 왔다.

그런데 감히 뭐라고?

아나트리샤보다 더 자신을 사랑해 주겠다니.

그것도 어머니를 흉내 내는 거짓말쟁이 따위가.

“리샤가 날 미워하더라도 너 따윈 필요 없어!”

루퍼스리안이 버럭 외치면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정원 구석에 이 자리에 절대 있으면 안 되는 두 명이 서 있었다.

멍하니 선 카스톨트 황제와, 그 품에 안겨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동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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