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218)

Level 6. 메인 퀘스트 : 다시 친해지기 바라 (03)

헤벌쭉.

분명히 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난 리샤만 있으면 충분해!”

오빠놈…, 아니, 아니지. 

저 말에 대한 상으로 한동안 ‘오빠 놈 방지권’을 주기로 했다. 

‘우리 오빠’는 멍하니 나와 아빠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리고 한발 늦게 반응이 왔다.

화르륵!

“아, 아냐! 이, 이건……!”

얼굴이 말 그대로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마력이 불꽃 속성이라고 얼굴에도 불꽃을 피울 작정인가.

나는 헤죽헤죽 웃으며 손뼉을 쳤다.

짝짝짝.

“어빠의 징신 쟈 드러써.”

(오빠의 진심 잘 들었어.)

그리고 윙크하면서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올려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척!

아주 칭찬해.

윙크했다고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스킬이 제멋대로 켜지려고 했다.

[대상 정보 분석중. …완료.]

[이름: 루퍼스리안 루스템(안서운)

지위: 루스템 제국 1황자, 하스티아……]

에헤이, 스탑스탑!

그거 아니야! 넣어둬! 넣어둬!

뭔 놈의 시스템이 융통성이 없어!

……아, 원래 없나.

어쨌든 복잡한 시스템 정보를 중간에 꺼 버렸다.

그러자 수치심으로 불타 죽기 직전인 오빠가 다시 제대로 보였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신기하네. 목이야 그렇다 치고, 어떻게 손끝까지 저렇게 빨개지지?

내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이, 수치심에 시달리던 오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깨장창!

이번에는 황자궁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황자궁 안으로 도망친 것이다.

저, 저, 민폐 오빠.

내가 혀를 차려다가 실패하고 있는 사이.

오빠의 급발진에 모두가 멍해 있는 동안, 누군가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흐, 흑…, 폐, 폐하…….”

가련한 듯 흐느끼는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아빠 근처까지 접근한 ‘그 여자’가 있었다.

“전하께서 저를…….”

바닥에 엎어져서 5카르(=M)는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엉덩이 걸음으로 꿈실꿈실 쫓아온 모양이다.

어린애가 그러면 귀엽기라도 하지. 아줌마가 주책이야.

나는 혀를 찼다. 이번에는 성공, 하나 싶었는데.

“쮸.”

혀를 차긴 했는데 나온 소리의 결과물이 이상했다.

“…….”

“…….”

그 여자에게 모였던 시선이 이번에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다들 ‘설마? 내가 들은 게 맞나?’ 이러는 표정들.

나는 입술을 앙 물고 다시 시도했다.

이번엔 제대로 성공하고 말겠어. 혀 차기!

“쯋쮸!”

“…….”

“…….”

으아악! 끄악! 아아악!

이놈의 짧은 혀! 다 안 자란 근육들!

잠시 유리창을 사망시키고 도망친 오빠의 수치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수치심에 익사할 뻔했던 것이다.

그 사이 아빠는 나를 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우리 뒤를 따라온 유모와 시녀 언니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허억! 억!”

“수, 숨 쉬는 것도 잠시 잊었네!”

그건 잊으면 안 되는 거잖아!

셀리나 진짜 저러다가 진짜 기절 한번 하는 거 아닌지 몰라.

“꺄아아악! 아기님! 한 번, 한 번만 더 해 주세요!”

모냐는 왜 그래. 왜 너까지 그래. 

평범하게 주책 떨어 주면 안 될까. 설마 셀리나에게 옳은 건 아니겠지.

“세상에. 혀를 차시다니. 너무너무 귀여우셔라…….”

그래. 그나마 유모는 정상적으로 나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그래도 내 주변에 정상인이…… 나 말고도 한 명은 더 있어야지.

주변의 주접에 내가 해탈해 있는 사이.

다시 주변 눈치를 살살 보던 이상한 여자가 다시 아빠에게 들러붙으려고 했다.

아무리 봐도 싸한 여자야.

아빠에게 질척대는 것도. 오빠에게 엄마인 척 들러붙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아까 듣지 않았나.

“왜 네가 어머니의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진짜 엄마에게 받은 걸 수도 있겠지만.

내 촉이 말하고 있었다.

뭔가 있다. 경계해야 한다.

아마 난 감만으로도 이 여자를 경계했을 거다.

그런데 이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라는 여자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까 난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 스킬로 저 여자의 정보를 확인했다.

특성에 [야심가], [계략가], [이기주의] 같은 게 잔뜩 붙어 있었고.

협력자 리스트에 분명히 벨론드 대공 부부가 있었다.

그걸 보고도 이 여자를 조금이라도 믿으면 그건 바보지!

오빠도 안 속아 넘어가지 않았나. 하물며 내가 넘어갈까.

내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세상 가련한 표정으로 아까 오빠에게 내쳐진 손을 쥐고 훌쩍거렸다.

“아아, 저는 괜찮… 괜찮습니다.”

아마 아빠가 괜찮으냐고 물으며 일으켜 주기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과 움직임이다.

일곱 살짜리가 손 좀 쳐냈다고 부상이라도 입은 척하다니.

너무 한심해서 절로 혀 차는 소리가……,

“쮸.”

“…….”

다시 아빠의 입가와 눈가가 흐물흐물해졌다.

아악! 이놈의 짧은 혀 근육! 훈련하고 말 거야. 늘려 주겠어! 쭉쭉 잡아 늘리고 말 거야!

반드시 특훈해서 혀짤배기소리 빨리 졸업하고 만다!

내 수치심과는 별개로, 내가 “쮸!” 소리 한번 낼 때마다 주변인들의 모든 주의가 나에게 몰렸다.

덕분에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꼴이 되어, 모두의 뇌리에서 잊혔다.

악담보다 나쁜 게 무관심이라고 했나.

그렇게 본다면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최악의 반응을 받은 셈이다.

나는 아빠의 든든하고 너른 가슴팍에 안겨서 찡얼거렸다.

“압빠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쌩무시로 간다!

“그래. 우리 아가.”

아빠의 목소리가 녹진녹진하게 녹아 내린 꿀이나 초콜릿 같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어빠가 부끄러우가 바여.”

누가 봐도 아까 오빠는 부끄러워서 도망친 거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닌가 싶구나. 내 죄가 깊어서…….”

여기 눈치를 외모와 바꿔 먹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우리 아빠래요!

아빠는 조금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좀 더 천천히 루퍼스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앙대!”

그건 절대 안 돼!

내가 목 막혀서 죽어! 

시원하고 톡 쏘는 음료수가 필요해질 것 같은 아빠의 반응에, 나는 전력으로 태클을 걸었다.

“시로여.”

“하지만 리샤. 루퍼스의 의견도 존중을 해 줘야…….”

그런 존중은 필요 없다고요!

안 그래도 내 시야 구석에서 깜빡거리고 있는 메시지도 있었고.

[연계 퀘스트 : ‘친해지길 바라’ 진행 중]

‘아빠 함락’ 퀘스트에 이은 연계 퀘스트가 진작 떠 있었다. 당연히 수락해 둔 상태.

퀘스트 완료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아빠랑 오빠의 화해!’

그렇다고 퀘스트 때문에 둘을 빨리 화해시키려는 건 아니다.

없어도 빨리 화해시키기 위해 애를 썼을 거다.

근데 전부터 느낀 거지만 퀘스트 내용들이 어째 내가 원하거나, 내게 유리한 방향인 것 같은데.

역시 에러 나서 그런가?

이 에러는 역시 착한 에러야.

어쨌건 나는 대의를 위해 잠시 수치심을 버리기로 했다.

내 자존심이나 존엄보다 세상에 중요한 건 거의 없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눈가를 촉촉하게 만들어서, 아빠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면서.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똑바른 발음을 내려고 애쓰던 걸 포기하고, 편하게 혀짤배기소리를 냈다.

“리샤누운……, 압빠랑 어빠랑 세시 칭하게 행버카케 살구 시픈데…….”

(리샤느은……, 아빠랑 오빠랑 셋이 친하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고개를 갸웃, 했다.

“앙대여?”

“…….”

다음 순간.

와장창!

아빠는 나를 안은 채 그대로 황자궁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마력으로 친 방어막이 나와 아빠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안녕, 안녕, 그는 좋은 유리창이었습니다.’

황자궁의 유리창이 하나도 남아나질 않겠네.

가련한 황자궁 유리창 파편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나와 아빠는 이미 황자궁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전력으로 도망치던 오빠는 바로 아빠에게 잡혔다.

***

박살 난 유리 조각이 햇살 아래 보석처럼 빛났다.

남겨진 이들은 멍한 얼굴로 그걸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엘제를 비롯한 황녀의 궁인들과, 황제의 수행원, 그리고 황자궁 관리를 명받은 카렐만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황녀님!”

“폐, 폐하!”

“헉! 어, 어서 두 분을 따라가야 해!”

“방향상 응접실 쪽인 듯하오. 어서 깨진 유리창을 치우도록 해라!”

궁인들은 각자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황제와 황녀의 수행원들이 우르르 사라지고.

황자궁에 새로 배속된 궁인들은 난장판이 된 정원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휘하던 카렐만은 닭 쫓던 개꼴로 멍하니 주저앉은 여자를 보고 혀를 찼다.

“쯧. 이렇게 큰 방해물이라니.”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커다란 방해물 취급을 받으며 황자궁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황자궁 밖 벽에 폐기물처럼 버려진 뒤였다.

“아아악!”

그녀는 부러진 손가락을 쥔 채 악을 썼다.

아나트리샤는 엄살이라고 생각했지만, 루퍼스리안이 쳐낸 그녀의 손은 실제로 꽤 큰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멀쩡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이게, 이게 대체 뭐야!!”

그러나 놀랄 만큼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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