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218)

Level 6. 메인 퀘스트 : 다시 친해지기 바라 (07)

***

훌찌럭. 훌쩍훌쩍.

한참을 목 놓아 울어댔더니 나나 오빠나 엉망이었다.

나는 붕어눈으로 비슷한 꼴인 오빠를 보고, 여전히 침착하지만 이제 다정함을 숨기지 않는 아빠를 보았다.

한 손에는 아빠.

다른 손에는 오빠.

그래. 드디어 되찾았다. 내 가족. 내 행복.

아빠가 한 말이 떠올랐다.

“너희가 내게 남은 가장 큰 행복이라…….”

그건 나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전생의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싸웠다.

싸움의 목적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내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내 가족, 내 친구, 동료들.

하지만 전생의 나는 결국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

아빠와 엄마는 일찍 전사하셨고, 오빠는 나를 지키다 죽었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대다수는 죽었고, 일부는 배반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중한 사람들이 다시 곁에 있었다.

조금씩 달라진 모습, 달라진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이었다.

세계가 한번 멸망하고서야 한번 잃었던 이들을 겨우 되찾았다.

이런 기회가 또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결심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또 잃지 않을 거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누가 방해를 하더라도 나는 이 맹세를 지킬 거다.

내 결심에 호응이라도 하듯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퀘스트 완료!]

[부디 네 맹세가 지켜질 수 있기를.]

‘뭐?’

내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저게 무슨 소리지?

전생에는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말을 거는 것처럼 메시지를 띄운 적이 없었…, 아니. 아니다.

딱 한 번 있었다.

전생에 내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 그래서 *7& 싫*& #@나야?]

‘그래서 싫어, 서나야?’

분명히 시스템은 나에게 그렇게 물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면서.

시스템은 인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전생에 헌터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의문과 의심으로 가득 차서 시스템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려는데.

[System Error!]

아니나 다를까. 늘 나를 짜증 나게 하는 메시지가 그대로 떴다.

한숨이 포옥 나왔다.

시스템이 어쨌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다.

양손에 붕어눈 상태인 아빠와 오빠를 꼬옥 붙잡은 채, 나는 기이한 불안감과 두근거림을 애써 억눌렀다.

설사 시스템이 내 적이라 해도, 혹은 더 강력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지금 내 양손에 쥔 가족의 온기는 너무나도 선명했으니까. 

나는 모든 걸 바쳐서라도 이 온기를 지킬 것이다.

***

루스템 제국의 동쪽. 비밀과 그림자에 싸인 용의 나라, 나스카 공국.

나스카의 몇 안 되는 수족들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제단을 올려다보았다.

나스카의 공왕성 가장 깊은 곳의 이 방은 전체가 마력석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수십 겹의 마법진이 제단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

제단 위에 잠든 한 소년을 살리기 위해.

겨우 대여섯 살 되었을까 싶은 작은 소년이었다.

핏기 하나도 없는 흰 얼굴이 마치 사람이라기보단 조각상 같았다. 

밤의 장막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더욱 도드라지는 흰 피부색.

아주 느리게 소년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지 않았다면, 살아 있는 존재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으리라.

땅에 닿은 적 없는 나스카의 공왕성은 약 5년 전부터 지상에 내려앉아 움직이기 못했다.

바로 이 소년 때문이다.

그들의 긍지인 공왕성의 마력과 일족 모두가 짜낸 마력과 비술이 이 소년에게 모여 있었다.

태어난 직후부터 죽어 가고 있는 하나뿐인 주인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명시키기 위해.

그러나 그들의 발버둥은 소년을 살려 내는 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소년의 상태는 점점 악화될 뿐이었으므로.

“왕자님…….”

나스카의 늙은 가신의 주름진 뺨에 눈물이 어렸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틈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단 위에 마치 제물처럼 놓인 소년의 눈이 희미하게 뜨였다.

희게 질린 입술이 자그맣게 움직여,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나―.”

지금은 아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이름을.

제대로 소리가 되지 못한 당부가 이어질 뻔하였으나.

“부디―.”

소년은 다시 죽음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나는 조금 뒤에 깨달았다.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운 사태에 두 팔로 머리를 짚었다. 마치 전생에 본 절규하는 그림처럼.

하지만 팔이 너무 짧아서 머리에 닿지 못했다. 대신 양 뺨을 쥔 꼴이 되었다. 

폭, 폭, 뺨의 살이 좀 올라서 짤따란 손가락이 통통한 볼살에 파묻혔다.

옆에서 오빠가 코맹맹이 소리로 바보같은 말을 했다.

“앗. 리샤 뺨 귀여워. 마시멜로 같아. 나도 뺨 만져 봐도 돼?”

옆에서 아빠가 근엄한 목소리로 오빠랑 비슷하게 바보같이 말을 받았다.

“너무 울고 비벼서 리샤 뺨이 빨개져 있다. 지금 만졌다간 여리고 말랑말랑한 뺨이 다칠지도 모른다.”

“그렇, 군요. 자제하겠습니다.”

뭐야. 왜 저런 바보 같은 대화가 스무스하게 통하는 건데?

조금 전까지 서먹한 정도가 아니라 둘 사이의 공기가 시베리아보다 싸늘하던 부자 아니었어?

왜 갑자기 죽이 척척 맞고 그러는 거지?

어쨌건 지금 난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냬 케스트 보샹!”

그렇다. 아빠랑 오빠를 화해시키라는 퀘스트.

저렇게 그럴듯한 말만 남기고 정작 보상을 안 줬다!

먹튀라니! 내가 먹튀를 당하다니!

“아아앙!!!”

***

“크흥. 흐으응…….”

아나트리샤는 자그마한 고개를 깊이 떨어뜨린 채, 작게 신음했다.

그걸 보고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 황자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소중한 딸이자 여동생이 갑자기 “냬 케스트 보샹!”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명을 빽 지르더니, 급격하게 풀이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가족이랑 얼싸안고 우느라 눈이 새빨개지고 퉁퉁 부어 있어서 안쓰러운 얼굴인데.

기까지 팍 죽자 너무나도 안쓰러워 보였다.

“왜 그래, 리샤? 배고파? 아니면 목말라?”

“그, 그래! 카렐만! 어서 요기할 만한 것을 가져와라! 음료도! 어서!”

“단맛이 나는 디저트도! 리샤는 단 걸 좋아해!”

두 부자는 언제 사이가 서먹했던 적이 있냐는 듯이 죽이 아주 잘 맞았다.

게다가 루퍼스리안은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쫓아내려던 카렐만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얼렁뚱땅 카렐만이 황자궁의 새로운 시종장으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카렐만은 솜씨 좋고 빠르게 식사와 음료, 디저트를 공수해 왔다.

며칠 전 루퍼스리안의 마력 폭주로 성 대부분이 거의 반파된 상태인 데다, 궁인 정리가 덜 끝난 황자궁에서는 마련하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덕분에 꽤 그럴듯한 애프터눈 티 상차림이 아나트리샤의 앞에 대령되었을 때.

루퍼스리안은 진심으로 놀랐다.

‘본궁 부시종장 출신이라더니…….’

새삼 부친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사람을 보내 주었음을 루퍼스리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내내 아릴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던 가슴속의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듯도 했다. 아주 조금.

완전히 녹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터였지만.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시들시들한 아나트리샤는 “머티, 머티라니…….” 따위의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오빠랑 아빠를 먹이겠다고 본궁과 황자궁으로 쳐들어갈 정도로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가.

눈앞에 휘황한 다과상이 벌어졌는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루퍼스리안은 참지 못하고 직접 간식을 집어 동생의 입에 들이밀었다.

“리샤. 자, 네가 좋아하는 산딸기 젤리야.”

“아-.”라고 달래듯이 말하자.

다행히도 자그마한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리고 오빠가 주는 간식을 옴뇸뇸하고 잘 받아먹었다.

조그만 입술이 부지런히 오물거리는 걸 보고, 루퍼스리안도 카스톨트도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카스톨트 황제는 아들을 본받아, 말랑말랑한 마쉬멜로를 띄운 코코아가 든 잔을 딸의 작은 입술에 대 주었다.

꼴깍꼴깍.

정말 다행히도 이번에도 아나트리샤는 코코아를 잘 받아먹었다.

두 남자 사이에 무언의 시선 교환이 오고 갔다.

‘이 여린 아이가 얼마나 심하게 충격을 받은 것인가.’

‘리샤는 내가 마음을 열 때까지 자기가 받은 충격도 감추고 의연하게 군 거야!’

많이 닮은 두 부자는 가슴이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가장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가 그들을 돌보고 구해 준 것이다.

제 나이에 비해 강하고 의연해 보였지만, 얼마나 큰 노력으로 만들어 낸 모습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겨우 안도할 수 있게 되자 이렇게 넋이 나가 버릴 정도로.

두 남자는 결심했다.

‘절대로 다시 아가가 상처받을 일은 없게 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마음에 들지 않아도, 리샤 앞에서는 티 내지 말자. 리샤가 그걸 바랄 테니까.’

루퍼스리안은 아직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가 덜 풀렸지만, 그걸 아나트리샤 앞에서 티 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여동생 앞에서만은 사이좋은 부자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여기 레몬 마들렌도 먹어 봐.”

뇸뇸.

“너무 단것만 먹으면 좋지 않으니, 이 샌드위치도 먹으려무나.”

카스톨트는 샌드위치를 딸의 작은 입에도 들어갈 수 있도록 잘게 잘랐다.

워낙 아기의 입이 작다 보니, 어른의 손톱만 한 크기로 섬세하게 잘라야 했다.

무딘 나이프로 가능한 작업이 아니었으나, 나이프에 미세하게 마력을 입혀서 잘린 미니미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삐져나오지도 않으면서 각이 아주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아나트리샤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판단할 사이도 없이, 아빠가 주는 미니미 샌드위치를 냠냠 받아 우물우물 씹고는 삼킬 뿐이었다.

옴뇸뇸.

두 부자는 합심하여, 그리고 경쟁적으로 아나트리샤의 간식 셔틀이 되었다.

아기 황녀는 여전히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티…, 머티라니. 절때 가마 앙두꼬야…….”

(먹튀, 먹튀라니. 절대로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러면서도 아빠랑 오빠가 나르는 음식을 먹는 건 잊지 않았다.

“시쮸떼 ㄱ…새…, 암냠냠냠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