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7. 서브 퀘스트 : 행복한 일상 (02)
‘이 사람들 왜 자기 궁으로 안 가?’
이 세계의 황족들에게 자기 궁은 전생에 자기 방과 비슷한 의미였다.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되면 그때부터 자기 궁을 받아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 원칙이라 했다.
물론 사이가 좋은 경우에는 매일같이 만나서 얼굴을 보고 식사도 하고 시간을 보내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딱 달라붙어서 지내나?
평범하게 산 전생에도 이렇게 딱 달라붙어 지내진 않았던 거 같은데?
내가 ‘왜 집에들 안 가세요?’ 하고 물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러자.
아빠와 오빠의 표정이 굳었다.
아빠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아빠의 파란 눈이 사냥당하기 직전 사슴의 눈망울처럼 울망거렸다.
“아빠가…, 곁에 있는 게 싫으니?”
“안니. 실치는 안치만…….”
나는 우물거렸다.
이 말에 아빠가 시무룩한 표정을 해서 웃으며 덧붙여 줘야 했다.
“당여니 죠쳐!”
비로소 아빠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오빠는 내 옆에 찰싹 붙어서 물음표를 마구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나랑 있는 건, 리샤? 오빠는 빨리 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돌아가서 유리창도 없고 하늘이 보이는 방에서 다 부서진 침대에 누워서 외롭게 있으면 좋겠어?”
“웅? 구건… 아니지만…….”
내가 봤는데 침실까지 부서진 건 아니지 않아?
게다가 황자궁에 방이 몇 갠데 노숙하는 처지가 된 난민처럼 말하는 거야?
나의 첫 의문 제기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
아빠와 오빠가 화해한 지 약 3일째.
그동안 두 사람은 내 궁에서 먹고, 자고, 놀고, 쉬었다. 전부 나랑 같이.
내가 자는 사이에 자기 궁으로 돌아갔다 왔다고 말은 하는데, 믿음이 안 간다.
결국 사흘째가 되었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압빠. 일 앙해도 대여?”
“어빠, 겅부 엄써?”
아니, 명색이 황제와 황자면 할 일이 있을 텐데?
아빠는 특히 내가 집무실로 찾아갈 때마다 일하는 기계처럼 앉아 있었다.
오빠는 저번에 콩나물 대가리랑 투닥거릴 때, 연무장에 있지 않았나?
뭐 배우는 거 없어? 제왕학이라든가, 검술이라든가.
그러자 아빠와 오빠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걱정 안 해도 된단다. 아빠가 그동안 일을 아주 많이 해 놔서 이제 일 안 해도 되니까. 리샤가 다 클 때까지 계속 돌봐 주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아빠는 이렇게 말하며 내게 사과 푸딩을 떠 먹여 주었다.
그걸 옴뇸뇸 받아 먹으면서도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분명히.
‘방금 시종장 할아버지 움찔거리지 않았어? 되게 초조해 보이는데?’
오빠는 해맑게 웃었다.
“아, 황자궁이 다 부서져서 어쩔 수가 없어. 그리고 난 아직 어려서 별로 할 일 없어.”
그런 말을 하면서 왜 저렇게 좋아하지?
황자궁이 그사이 다 수리되었으면 당장 가서 또 부수고 올 기세였다.
황자궁 책임자가 된 카렐만이 식은땀을 흘리는 게 보였다.
꼭 뭔가 협박당한 사람처럼.
‘설마 오빠가 황자궁 수리를 늦추라든가, 하지 말라든가 그렇게 협박한 건 아니겠지.’
“…….”
에이. 설마.
설마……?
그리고 늘 설마는 사람을 잡는 법이다.
***
아빠와 오빠의 화해로부터 약 일주일.
미심쩍지만 대충 눈감아 주고 있던 아빠의 비리(?)가 들킨 것은 그날 아침이었다.
정원에서 아빠, 오빠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번에 나는 오빠의 무릎에 앉아 아빠에게 스튜를 받아먹고 있었다.
아빠와 오빠는 몇 번의 충돌을 거쳐 규칙을 만들었다.
식사나 간식 타임 때, 한 명이 나를 무릎 위에 앉히면, 다른 한 명이 내게 먹여 주는 것으로.
덕분에 지난 일주일간 나는 손이 없는 것처럼 살았다.
스푼이나 포크도 들게 놔두질 않으니. 컵까지 들고 먹여 주기까지 했다.
‘내가 애기인 줄 알…, 아, 아기가 맞긴… 하지.’
알맹이의 나이가 얼마이든, 겉보기에 내가 두 살짜리 아기라는 건 사실이니까.
편하긴 한데 또 완전히 편하지만은 않은 오묘한 상황.
겨우 되찾은 가족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기가 싫어서 참고 있었다.
그런데 슬슬 한계가 오려 했다.
‘내 프라이버시 좀!’
유모랑 시녀 언니들이 붙어 있는 것도 개인 생활이 없는 거 같았는데.
아빠랑 오빠는 몇 배는 더했다.
이러다간 진짜 걸음마 하는 법마저 까먹어 버릴 것 같다고!
게다가 지금은 시스템이 잠시 먹통 상태라 방해가 덜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혼자 있을 시간이 없으면, 시스템 메시지 확인이나 퀘스트 진행 확인 같은 것도 힘들었다.
시스템이 정상화될 때를 위해서라도, 개인 시간을 좀 확보해야 했다!
“우웅…….”
내가 진짜 짜증을 낼까 말까 고민하던 차였다.
황녀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셀리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저어, 광휘 기사단장께서 오셨다 합니다. 폐하.”
……라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무리 윗사람인 아빠가 있어도 궁의 주인인 내게 먼저 물어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 손님이 내게 온 것이라면.
그런데 셀리나가 저렇게 말했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아빠를 찾아온 거로군.’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아빠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지는 걸.
저 표정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분명했다.
‘귀찮군.’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바로 축객령을 내릴 것이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아빠 말을 잘랐다.
“지금은 바쁘…….”
“기드옹 아찌! 쪄아!”
내가 꺄륵꺄륵 웃으며 두 팔을 파닥거렸다.
우명 삼촌이 왜 왔을지, 그리고 아빠가 왜 쫓아내려고 했을지 알 것 같아서였다.
내 말에 아빠와 오빠가 대놓고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의 해맑은 말에 우명 삼촌, 이번 생에는 광휘 기사단장 기드온이라는 멋들어진 지위와 이름을 얻은 분이 들어왔다.
“핫핫. 폐하, 이 기드온. 오랜만에 배알하니 태양의 영광에 눈이 멀 지경이옵니다. 황녀님, 황자님께서도 건강해 보이시고, 무엇보다 고귀한 분들께서 화목해 보이시니 기쁩니다.”
절도 있게 무릎을 굽혀 예의를 표한 기드온 삼촌은 전에 만났을 때와 좀 달랐다.
약간 눈 밑이 까맣게 물들어 있는 것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전과 완전히 다른 건…….
“아찌! 매끌매끄래져써!”
그렇다.
우명, 아니, 기드온 삼촌의 트레이드마크, 북슬북슬한 털이 사라져 있었다.
뺨까지 덥수룩하던 수염이야 깎았나 싶은데, 손등 손가락까지 자라 있던 털이 없이 맨들맨들했다.
그러자 기드온 삼촌이 씩 웃으며 소매를 척 걷어 보였다. 팔뚝까지 깨끗하다.
“역시 우리 황녀님! 알아봐 주시니 기쁩니다! 황녀님을 뵐 때를 대비해서 매일같이 미리 깎아 뒀지요!”
오빠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리샤의 피부는 아주 약하오. 기사단장의 손과 팔의 수세미 같은 털은 리샤의 여린 피부를 상하게 할 게 틀림없소.”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못 안게 한 적이 있었지.
진짜 그 뒤로 면도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기드온 삼촌의 행동에 깊이 감동했다.
삼촌이 통나무를 한 팔로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굵은 두 팔을 벌리며 내게 물었다.
“이제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황녀님?”
그리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빠와 오빠가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불허한다.”
“안 됩니다.”
하지만 둘한테 물은 게 아니라고!
나는 오빠의 무릎 위에서 포릉 날아오르면서 환하게 말했다.
“웅! 아찌 져아!”
기드온 삼촌은 솥뚜껑 같은 두 손으로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 작은 유리 조각을 대하는 것처럼.
삼촌이 진심으로 감동했는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커다란 두 눈시울이 젖어드는 게 아주 익숙했다.
전생에도 저랬었거든.
“역시 딸은 안는 느낌도 다르구나! 너무너무 귀여워! 서나야! 삼촌이란다! 삼촌 해 봐! 까궁! 까, 크흡!”
“삼츈, 왜 우러?”
“너무, 너무… 좋고…… 또 부러워서…….”
삼촌이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들이 셋이었는데.
날 보고 막내딸을 위해 노력(?)한 결과 넷째 아들을 보고 좌절했었다고 들었다.
기드온 삼촌이 날 둥개둥개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한 번 더 시도해 볼까. 이번에야말로 딸을…….”
아마 이번에도 삼촌과 이모는 네 번째 시도를 해 볼 모양이다.
결과를 이미 알 것 같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미리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
게다가 ‘그 녀석’이 안 태어나는 건 또 그러니까.
나는 아빠와 오빠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나를 놓지 않는 기드온 삼촌의 품에 한참 동안 안겨 있었다.
그동안 나를 빼앗긴 오빠와 아빠는 기드온 삼촌을 대놓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오빠는 아예 시비까지 걸기 시작했다.
“광휘 기사단장 자리가 매우 한가하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일이 없냐고 비꼬는 것이, 저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말로 패는 오빠의 특기는 똑같구나. 전생이나 지금이나.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하하! 그럴 리가요!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답니다! 특히 지난 일주일간 말이지요!”
일주일이라. 우연일까.
아빠의 눈썹이 살짝 떨린 것 같아 보였는데, 내 착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