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218)

Level 7. 서브 퀘스트 : 행복한 일상 (03)

기드온 삼촌 뒤로 다가온 시종장 할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쉬며 속삭였다.

“제발 폐하를 설득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면 시종장 할아버지도 지난 일주일간 폭삭 늙은 것 같아 보였다.

기드온 삼촌이 나를 안은 채 아빠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아빠는 피하고 싶어 보였지만 내가 안겨 있어 도망치지 못했다.

“폐하. 중신들이 폐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수고들 하는군. 주방에 일러 특식을 보내고, 상금을 내리라 하지.”

그렇게 싸늘하게 대꾸하면서, 아빠는 기드온 삼촌에게서 나를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괜찮으냐, 아가? 어디 쓸리지는 않았고?”

옆에서 오빠가 참견했다.

“여기 손목 근처가 붉어진 것 같아. 아프지 않아, 리샤?”

“역시 아기의 여린 피부에 광휘 기사단장은 너무 거칠어. 황명으로 접근을 금하도록 하지.”

“옳은 판단이십니다. 아바마마.”

방금 화해하고 처음으로 아빠한테 ‘아바마마’라고 하지 않았어?

이상하게 이럴 때만 아빠랑 오빠는 지나치게 죽이 잘 맞았다.

부자의 합동 공격 대상이 된 기드온 삼촌이 억울하게 외쳤다.

“너무하십니다, 폐하! 어떻게 그런 잔인한 명을 내리실 수 있습니까! 제가 왜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면도를 하고 있는데!”

삼촌은 하루 세 번의 면도로 매끄럽게 관리되고 있는 팔뚝을 다시 자랑했다.

울룩불룩한 근육들이 털 한 오라기 없이 매끈하게 빛났다.

으음. 감동적이지만 부담스러워…….

“언제 황녀님을 뵐지 모르니 늘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집 남자들은 냉혹했다.

“부족해. 더 노력하게.”

“한참은 모자랍니다, 기드온 경.”

“너무하십니다! 특히, 폐하! 안 그래도 일주일간 정무를 내팽개쳐서 일이 넘쳐서 저한테까지 오고 있는데, 유일한 힐링인 황녀님까지 빼앗아 가시다니!”

이게 뭔 소리야. 그리고, 왜 내가 힐링인 건데.

하지만 아빠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서 하던 일이나 하게.”

“폐하아!”

아빠는 매몰차게 기드온 삼촌의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삼촌은 나에게 아주 간절하고 불쌍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시종장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삼촌이야 그렇다 치지만 시종장 할아버지까지 저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상했다.

저 할아버지는 늘 여유 넘치고 의뭉스럽게 굴었는데.

두 사람의 시선은 이렇게 빌고 있었다.

‘제발 폐하 좀 설득해 주십시오!’

‘저희 좀 살려 주세요, 아기님!’

느끼 로맨스 그레이 같던 시종장 할아버지가 기름기를 쏙 뺀 참깨처럼 너덜해진 이유.

기사단장인 기드온 삼촌까지 일이 넘쳐서 눈 아래가 거뭇해질 이유.

나는 아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압빠, 때때이에여?”

(아빠 땡땡이쳤어요?)

설마, 일주일 동안 정무를 아예 손 놓고 계시던 거였나요?

그러자 아빠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자, 아빠가 머리를 다시 묶어 줄까? 바람에 머리가 흐트러졌구나.”

지금 내 머리는 아주 짱짱하게 잘 묶여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잔머리 하나의 각도까지 신경 써서 심혈을 기울여 묶어 준 당사자인 아빠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말 덜리지 말구!”

어디서 회피를 하려고!

그때였다. 옆에서 오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업무 태만이라니. 리샤가 싫어할 거예요. 아바마마.”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어빠도 때때이지!”

(오빠도 땡땡이쳤지!)

그러자 오빠는 눈매를 사르륵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 나는 어려서 해야 할 일이 없어.”

저건 100% 거짓말할 때 버릇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카렐만을 보았다.

“샤실대러 마래!”

그러자 카렐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수배해 둔 교사들이 이레 동안 황자궁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간 수도 없이 아뢰었으나 황자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신 것처럼……!”

그러고 보니 겨우 일주일 사이인데, 카렐만의 머리숱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내 눈썹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이 싸람들이!

***

조금 뒤.

나는 기세등등하게 의자 위에 서서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죄인(?)을 추궁했다.

“잘모테써여, 아네써여!”

(잘못했어요, 안 했어요!)

그러자 반성의 의자형에 처해진 두 명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잘못했다.”

“잘못했어.”

나는 엄하게 외쳤다.

“그러믄 어떠케야 게써여?”

(그러면 어떻게 해야 겠어요?)

그러자 오빠는 달콤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더 열심히 리샤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래. 루퍼스의 말이 맞다. 그동안 챙겨 주지 못한 걸 벌충하기 위해서라도…….”

절로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쮸!”

앗. 실수.

“…….”

“…….”

“…….”

침묵 속에서 일제히 모든 눈이 나를 향했다.

아빠 오빠만이 아니라, 기드온 삼촌, 시종장, 카렐만, 유모 등등.

다들 광대가 하늘을 향해 승천하려 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과 눈빛은 단어 하나를 전력으로 외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귀여워엇!!!’

셀리나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진짜로 뒤로 넘어갔다.

“허어억!”

다행히 모냐가 기다렸다는 듯 받아 냈다.

“이젠, 여한이 없…….”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너무 어린 몸이 마음을 제대로 따라 주지 못하는 것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몇 번이나 수치사 위험을 겪은 나는 이제 대처법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무시! 나는 실수 따위 하지 않았어!’

내 짧은 혀가 ‘쯧!’을 ‘쮸!’ 하고 내뱉는 실수 따윈 한 적 없다는 것처럼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물론 ‘쳇!’을 ‘찌!’로 잘못 발음한 적도 없다. 절대!

“잘모테쓰면 어케해야 대여!”

그러자 오빠가 작게 속삭였다.

“귀가 빨개. 다 티나, 리샤.”

“어허! 앙 들려! 하나두 앙 들린댜!”

나는 귀가 없다!

오빠가 뭐라는지 들을 귀도, 부끄러워서 빨개질 귀도 없어! 없다구! 으앙!

내 체면! 내 위엄!

***

결국 나의 수치심과 맞바꾼 노력 끝에.

“압빠는 할릴 다햐고 오세여!”

“알겠다.”

“어빠능 겅부 햐고와!”

“응.”

둘을 얌전하게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협박이 곁들여진 결과였다.

“햘일 앙하고 오믄 리샤랑 몬 놀아!”

(할 일 안 하고 오면 리샤가 안 놀아 줄 거야!)

기드온 삼촌과 시종장 할아버지, 그리고 카렐만은 나를 거의 구세주 보듯 올려다보았다.

“오오. 역시 황녀님이십니다.”

“폐하와 전하를 이렇게 움직이시다니.”

“드디어, 황궁에 빛이 돌아왔어!”

다들 감격에 겨워 눈물을 찍어 내는 동안.

아빠는 작게 푸념했다.

“우리 아가 곁에 있을 시간은 하루 24시간도 모자라건만.”

옆에서 오빠가 아빠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 귀한 딸을 1년 넘게 방치한 건 어디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그 기간만큼, 아니, 몇 배로 더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 곁에 있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하며 오빠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네가 동생 곁을 절대 떠나려 하지 않으니.”

오빠는 허를 찔린 것처럼 토끼 눈을 떴다.

그러나 어색해하면서도 아빠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헤벌쭉 웃었다. 아주 바람직해. 역시 좋아.

히히히.

이 좋은 분위기는 아빠의 이어진 푸념에 와장창 당했다.

“아가. 아빠는 정무 보러 가기 싫구나. 왜 정무 따위를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딸, 아들이랑도 못 놀고.”

“그래도 가야죠. 아빠가 황제잖아요.”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발음이 아주 정확하게 나왔다.

내 방을 나서는 아빠의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가 축 처졌다.

엄살이라는 걸 다 아는데도 불쌍해 보일 지경이다.

옆에서 오빠가 다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아바마마 몫까지 리샤와 놀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어허! 오빠도 공부 다 하고와! 다 검사할 거야!”

“…….”

오빠의 어깨도 축 처졌다.

어디서 K-영혼을 가진 내 앞에서 땡땡이를 치려고!

‘근데 두 사람도 알맹이는 국산이잖아. 성실함은 전생에 두고 온 거야?’

내 의구심과 상관없이 결국 아빠와 오빠는 원래 일상으로 복귀했다.

특히 본궁의 시종장과 기드온 삼촌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표정이었다.

막 황녀궁을 떠나는 아빠와 오빠가 너무 시무룩해 보여서 나는 두 사람에게 상을 가불해서 주었다.

“아빠, 힘내쎄여! 리샤가 기다릴께여!”

……라면서 아빠의 뺨에 쪽.

“빤니 겅부하고 와서 놀쟈! 어빠!”

……라고 오빠의 이마에 쪽.

그러자 시든 배추 같던 두 사람이 생기 넘치는 태도로 씩씩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머야? 떠 때때이야?”

그러나 두 사람은 아주 당당했다.

“걱정 말려무나. 3일 치 일을 전부 해치우고 왔단다.”

“과제 대신 시험을 봐서 진도 이상으로 전부 합격하고 왔어. 칭찬해 줘, 리샤!”

변명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아니었다.

시종장과 카렐만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들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일상이 고정되었다.

아빠와 오빠는 내가 깨어나기도 전에 황녀궁으로 와서 아침 식사를 함께 한 다음.

각자 정무나 공부를 성실하게 한다.

일을 마치고 와서 저녁을 함께 먹고 티타임을 가지면서 같이 놀다가, 내가 자는 걸 보고 자기 궁으로 돌아간다.

사실 잠도 황녀궁에서 자려 드는 걸 ‘미오 할꼬야!’라는 협박으로 내쫓는 데에 성공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가족이었다.

물론 내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일상을 되찾은 게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에헤헤.”

정말이지 꿈만 같은 나날이었다.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갑자기 끝나 버리면 어떡하나 두려울 정도로.

하지만 이 평화롭고 투닥거리는 일상은 2년 가까이 쭉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는 네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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