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8. 메인 퀘스트 : 가족 사기단 (01)
루스템 제국 황궁의 아침은 황녀궁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는 지난 2년 가까이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절차였다.
하지만 그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정확히는 변화가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바로, 오늘.
나는 침실에서 아빠나 오빠가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깨어났다. 정말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둘이 깨워 줬으니까.’
오늘은 씻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는 자리에도 두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모랑 시녀들이 더 신나 보였다.
모냐는 리본 두 개를 들고 심각한 고민 중.
“이 분홍색 리본을 다시면 정말 귀여우신데. 아냐, 아냐. 하늘색도 너무 잘 어울리셔.”
“난 암거나 죠아.”
모냐는 내 말에 기겁했다.
“어떻게 황녀님께 아무거나 드릴 수가 있어요! 말도 안 돼요! 제가 살아 있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왜 저렇게 비장한지는 여전히 이해 가지 않았다.
모냐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으아아. 왜 우리 황녀님은 다 잘 어울리셔서 절 힘들게 하세요!”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 보면, 진짜 사과했다간 오히려 바짝 엎드려선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난 아무 말이나 했다.
“그럼 둘 다 해 주면 되자나.”
좋아!
이제는 제법 괜찮은 발음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년 가까이 이어진 나의 피나는 노력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이다.
새삼 일취월장한 발음을 듣자니 뿌듯했다.
‘좋아! 이젠 애기 소리 안 내도 된다!’
그야 이제 난 아기가 아닌걸!
네 살이라 이거야!
아기가 아니라!
새 세계의 당당한 어린이!
내 대답에 모냐는 눈을 번쩍거렸다.
“맞아요! 역시 황녀님은 천재세요!”
모냐는 신이 나서 사파이어가 달린 머리핀과 리본 장식, 공단으로 만든 장미꽃 핀을 솜씨 좋게 내 머리에 장식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의외로 분홍색과 하늘색 리본은 잘 어울렸다.
다 모냐의 센스가 좋아서겠지.
‘사실 난 그냥 질끈 묶기만 하면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모냐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반응을 보일 게 뻔했다.
사실 이미 경험도 있었다. 꽤 여러 번.
특히 오늘 모냐는 오랜만에 내 단장 시간을 주도할 수 있어서 신이 나 있었다.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모냐만이 아니었다. 엘제와 셀리나도 상기되어 있었다.
나에게 입힐 드레스와 비단 양말, 드레스를 고르는 행동과 말투에서 행복감이 묻어 났다.
‘저렇게 좋을까.’
잘 이해되지 않지만, 어쨌든 다들 날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감사하게 여길 일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아직도 아침마다 주변인들의 성화에 어울려 주고 있었다.
‘다 크면 이런 거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더 빨리 크고 싶다!’
유모와 시녀들의 도움으로 완벽하게 치장이 끝나자.
나는 팬 서비스(?)를 겸해서 그녀들 앞에서 빙글 돌아 주었다.
유모와 시녀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기뻐했다.
“아아아.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황녀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며드린 게 대체 얼마만이야.”
모냐는 희열에 부르르 떨고 있었고.
“점점 자라시는 게 아쉬울 정도라니까요. 지금 황녀님을 보고 있는 제 눈을 뽑아서 박제해서라도 이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요!”
셀리나는 언제나의 셀리나였다.
“정말이지 이렇게나 건강하게 자라시다니. 명명식 전까지 우리 아기님, 아니, 황녀님 어떠셨는지를 떠올리면…….”
우리 유모 엘제는 기쁨에 눈가를 손수건으로 콕콕 찍어 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쉬었다.
“물론… 머리쿵 방지 베개를 졸업하신 건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아쉽지만.”
모냐와 셀리나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의 시선은 구석의 마네킹에 걸린 파랑새 머리쿵 방지 베개에 박혀 있었다.
무려 블루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빼곡하게 박힌 날개 장식이 화려하다.
그래 봤자 이젠 안 쓰지만!
지금 난 네 살이라고!
어엿한 어린이야!
생일이 지난 얼마 전, 나는 가족들과 시녀 언니들 앞에서 선언했다.
“인제 리샤 애기 안니야! 머리꿍 베개 안녕이야!”
그런데도 이 미련 넘치는 사람들이 포기를 못 하고 새로운 쿠션을 매번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내가 절대 안 쓰는 데도.
시녀들은 미련이 뚝뚝 넘쳐흐르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냈고.
나는 두 팔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시로! 실타구! 리샤는 이제 애기 안니야!”
앗.
너무 흥분해서 그만 발음 관리에 실패했다. 혀짤배기소리가 나와 버린 것이다.
이런 실수를!
이젠 의식적으로 어른스러운 말투를 쓰려고 하고 있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유모와 시녀들의 얼굴이 흐물흐물해졌기 때문이다.
으악! 으아악! 쪽팔려!
내가 두 팔을 파닥거리는데, 등 뒤에서 문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콰광!
“한 번, 한 번만 더 말해다오! 조금 전 그 귀여운 말투로! 우리 아가!”
“맞아! 리샤가 요즘 너무 어른스럽게 말하려고 해서 슬펐, 아니, 물론 기뻤지만! 그래도 듣고 싶어!”
문을 박살 내며 이런 바보 소리와 함께 들어선 건 두 남자였다.
[본캐: 황제 & 부캐: 아빠] 한 명과 [본캐: 황자 & 부캐: 오빠] 한 명.
두 명에게 말하면 각자 자기 본캐가 아빠, 오빠라고 우길 사람들.
그새를 못 참고!
나는 아직 짧지만 그래도 두 살 때보다는 제법 길어진 팔을 허리에 턱 얹었다.
이젠 제법 자세가 나온다. 뿌듯해!
이젠 네 살 나이에 어울리는 발육 상태라고!
쑥쑥 포션을 매일같이 마시고 운동해댄 보람이 있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내밀어 두 사람을 가리켰다.
“내가 어제 한 말 들어써요, 안 들어써요?”
좋아. 이번엔 나쁘지 않은 발음이다.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아직 몸이 다 안 자라서 어쩔 수가 없다.
두 남자의 어깨가 축 처졌다.
“들었지.”
“나도 들었지만…….”
나는 어젯밤 자기 전 나에게 동화를 읽어 주겠다며 싸우는 이 바보 부자에게 선언했던 것이다.
“나도 이제 다 커쓰니까, 이제 깨우러 오고 씻겨 주는 거 필요 엄써!”
아빠와 오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했다.
지난 2년 가까이 나는 몇 번이나 생활 독립(?)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빠랑 오빠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은 기가 막힐 정도로 죽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간절한 고양이처럼 나를 보며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정말 리샤? 우리를 버릴 거야?”
“나는 매일 이 순간만 기다리며 살고 있는데. 이제 삶의 기쁨이 사라지겠구나.”
“이제 리샤가 없으면 나와 아버지는 다시 사이가 벌어지고 말겠지.”
“……그건 진심이냐, 루퍼스?”
“장단을 좀 맞춰 주시라고요!”
그러다가 한번은.
“아빠는 리샤 머리를 묶어 주지 않으면 금단 증상이 일어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묶고 말 거란다.”
그리고 아빠는 진짜 그렇게 했다.
기드온 아저씨가 양 갈래 머리를 하고서, 거무죽죽한 얼굴로 내게 와서 부탁하게 만들었다.
“제발, 폐하께 황녀님 머리를 묶도록 허락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폐하께서, 저에게, 크흡, 황명으로 절대 머리를 풀지 말라고…….”
기드온 아저씨는 이 상태로 임신 중인 부인에게 가기 싫다고 울먹거렸다.
그렇다. 우명 삼촌, 즉, 기드온 아저씨 내외는 이번에도 네 번째 시도를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넷째 아들을 얻어 울면서도 웃고 말았던 것이다.
아저씨는 잠시 ‘나도, 나도 귀여운 딸…….’ 하고 잠시 서글프게 중얼거리곤 했다. 부인도 비슷한 상태였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어도 두 분은 이번에도 막내딸 얻는 데에 실패했다.
참고로 기드온 아저씨의 양 갈래 머리 재난은, 오빠가 원흉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오빠가 아빠에게 작전을 세워 줬던 것이다.
어쩐지 아빠 성격이랑 안 어울리는 방법이다 싶었는데 어제 알았다.
‘둘이 작전을 짤 정도로 친해졌다는 걸 기뻐해야 하나…….’
하지만 순순히 기뻐하기엔 좀 화가 났다.
그래서였다. 번번이 무위로 돌아간 생활 독립 시도를 다시 꺼내든 건.
조금 부아가 난 것 1%, 진심 99%.
‘내 프라이버시!’
물론 두 사람은 저항했다.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하지만 두 남자의 필사적인 저항은 내 강력한 카드에 무너졌다.
“내 말 안 들으면 미오할 꼬야!”
나의 가드 불가능한 기술에 아빠와 오빠는 처절하게 패배했다.
하지만 내 생각처럼 자기들 궁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부르면 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투왈렛 룸 문짝에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다가, 내가 실수로 애기 말을 쓰자마자.
문을 박살 내며 쳐들어왔으니까.
한숨이 포옥 나왔다.
“에효.”
정말이지 몇 년이 지나도 전혀 성장이 없는 남자들이 아닌가.
아니, 전생까지 생각하면 두 번째 생에서도 성장이 없다고 해야 하나.
오빠가 또 물색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앗. 리샤 한숨 소리. 늘 귀여워! 사랑스러워!”
이 바보들을 대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언제나와 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후움.”
나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름 아닌 눈앞에 떠 있는 시뻘건 메시지 때문에.
[System Error!]
무려 2년 가까이 시스템이 이 꼴이었다.
진짜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스킬은 잘 써지지만, 퀘스트나 관련 보상을 확인하려고 하면 이 난리다.
‘먹튀라니. 내가 먹튀를 당하다니! 그것도 2년 가까이!’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면 시스템 창을 짤짤 흔들어 털고 싶은 기분이다.
[부디 네 맹세가 지켜질 수 있기를.]
그 메시지 이후로 시스템은 계속 먹통이었다.
마치,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남은 힘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진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세상이 한번 멸망했다.
전생에 사람들은 시스템이 멸망을 피하기 위한 세상의 저항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멸망과 함께 저 시스템도 사라지는 게 정상일지도.
2회 차까지 따라온 것 자체가 오히려 말이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
마지막 의무를 다하고 사라진 걸까.
“후우움.”
여전히 눈앞에는 시뻘건 에러 메시지가 그대로 떠 있었다.
나는 작게 웅얼거렸다. 다른 사람이 못 듣게 작은 말이라 발음은 대충 했다.
“그래두 먹티는 안대……. 시슈테미 주거쓰면 사려내서라도 바다내고 말꼬야…….”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약속한 보상은 줘야 할 거 아냐!
죽었으면 살려 내서라도 받아내고 말 것이다.
기분 탓일까. 빨간 에러 메시지가 살짝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시스템은 여전히 먹통이지만, 지난 2년간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하루였다.
적어도 오전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