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8. 메인 퀘스트 : 가족 사기단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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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홉 살이 된 루퍼스리안은 방긋방긋 웃으며 동생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지금은 한낮이라 황제가 정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지만 루퍼스리안은 교사들의 시험을 뛰어난 성적으로 격파(?)하고 꿀 같은 휴일을 받아냈다.
덕분에 오랜만에 여동생을 독차지할 수 있는 시간이 난 것이다.
루퍼스리안은 카렐만에게 시켜서 마련해 온 선물을 자랑스럽게 내놓았다.
“자, 이것 봐 리샤! 이쁘지!”
카렐만도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놓은 것은, 자그마한 비스크 인형과 집, 가구 등의 장난감 세트였다.
도자기를 구워서 만든 자그마한 인형은 어찌나 섬세하고 고급스러운지 그야말로 작품 수준이었다.
머리카락은 비단실을 심었고 눈은 실제 보석을 썼다.
입힌 옷과 구두도 실제 사람이 입을 만한 것을 작게 줄인 것이다.
“공주님 인형은 최대한 리샤랑 닮게 만들었어!”
공주님 인형은 붉은색이 도는 금빛 비단실로 곱슬머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눈에는 제비꽃 색 자수정을 박아 넣었다.
“물론 리샤가 훨씬 귀엽지만!”
인형의 옷, 장신구, 가구 등의 소품들도 하나같이 황궁에서 써도 될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그대로 줄여 놓은 듯했다.
루퍼스리안은 기대에 차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여동생이 당연히 뛸 듯이 기뻐하며 그에게 감사하리라 생각했다.
‘죠아! 오빠가 체고야!’
이렇게 외치며 뺨에 뽀뽀를 해 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생의 반응이 예상과 좀 달랐다.
“후웅. 기엽네.”
분명히 아나트리샤는 웃고 있었다.
흐뭇하게.
그런데 그 웃음이 루퍼스리안이 예상한 것과는 좀 달랐다.
겨우 네 살짜리 아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의 웃음이라기보단.
어린 동생의 소꿉놀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큰 누나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그치만 내가 오빤데? 리샤는 나보다 한참 어린데?’
그러고 보면 어린 동생은 그를 볼 때면 종종 저런 표정을 하곤 했다.
루퍼스리안은 당황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리샤, 맘에 안 들어?”
“아아니. 마메들어!”
아나트리샤는 여전히 웃는 표정으로 작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바쁜 와중에도 아침에 황제가 묶어 주고 간 양 갈래 머리가 대롱거렸다.
두 부자의 강력한 작전에 힘입어 아나트리샤의 생활 독립은 잠시 미뤄졌던 것이다.
‘앗. 귀여워!’
루퍼스리안은 동생의 귀여움에 조금 전에 느낀 이상함을 잊어버렸다.
동생이 인형을 집어 들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치 놀자!”
“그래!”
두 사람은 인형 놀이를 시작했다.
“내가 공주님!”
“그래! 오빠가 왕자님을……!”
인형 놀이의 시작은 평범했다.
유모와 시녀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귀여운 남매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조금 전 아나트리샤가 제 오빠를 바라볼 때와 거의 비슷하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인형 놀이의 스토리가 기이한 방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구하러 와 주셨군요, 공주님!”
“아니! 나도 자펴와써. 오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마왕역을 맡은 까만 마법사 인형이 아나트리샤의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케케케. 공주와 왕자눈 내 손에 이따! 모두 항보케라!”
인형 놀이를 시작할 때의 설정과 달리, 지금 공주와 왕자는 가상 왕국의 후계자인 남매였다.
후계자를 모두 빼앗긴 왕(루퍼스리안 조종)은 자식들을 위해 항복했고.
마왕이 세상의 짱을 먹으며 인형 놀이는 끝났다.
잠시 놀란 눈으로 인형 놀이를 바라보던 유모와 시녀들은 곧 다시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우리 황녀님은 귀여워.’
‘아기님은 마왕이라도 귀여움으로 세상을 정복하실 거야!’
‘아기님이 여전히 귀여우시니 문제없음.’
***
인형 놀이가 끝나고 간식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오늘도 손이 없었다.
“자, 리샤. 이 슈크림 맛있어. 많이 먹어.”
오빠나 아빠가 옆에 있으면 내가 포크를 드는 걸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워낙 좋아해서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쩌겠어.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울려 줘야지.
그래서 얌전히 받아먹었다. 옴뇸뇸.
“어때? 맛있어?”
오늘 내 손 역할은 오빠다. 한창 먹는 와중에 나는 한 가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셀리나가 구석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웅? 모해, 세리나?”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전부 셀리나에게 모였다.
셀리나는 난처한 듯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내 재촉에 셀리나는 결국 실토했다.
“두 분의 귀여운 모습을 스케치해 보고 있었어요.”
오옹?
“보여죠!”
셀리나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며 사양했지만, 내 억지를 이기지 못했다.
결국 나와 오빠의 앞에 셀리나의 스케치북이 놓였다.
“우왕.”
같이 인형 놀이를 하고, 티타임을 즐기는 나와 오빠의 모습이 몇 장에 걸쳐서 그려져 있었다.
본인의 말과 달리 셀리나의 실력은 꽤 좋았다.
짧은 시간 동안 슥슥 그린 것 같은데 나와 오빠의 모습이 꽤 섬세하게 잘 표현되었다.
누가 봐도 나와 오빠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잘 그렸다고 칭찬하려는 차였다.
셀리나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사죄를 해 왔다. 그야말로 장렬하게.
“죄송합니다, 황녀님!”
“엥?”
“저의 이 부족한 실력으로 아기님의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다 담지 못하는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게 뭔 멍멍이 소리야?
내가 황당해하는데, 옆에서 오빠가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확실히…… 리샤의 실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해. 이건 분명히 큰 잘못이야.”
뭐라는 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엘제와 다른 시녀들이 오빠에게 맞장구를 쳤다.
“황자님의 말씀대로예요. 아기님의 귀여움을 다 담지 못한 건 분명히 큰 죄이지만…….”
“그래도 셀리나의 충성심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아기님의 귀여움은 사람의 손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오빠 놈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리샤의 귀여움은 궁정 화가라 해도 다 그려 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 아니, 인간의 손으로는 무리야. 그리고 셀리나가 충실한 건 나도 잘 아니 용서하도록 할까.”
“감사합니다, 황자님!”
아니, 왜 자기들 멋대로 잘못이라고 했다가 용서까지 하는 거야!
내 의견은?
그리고 오빠 놈 너는 그렇게 평해 놓고서 왜 그림을 빼돌리려는 건데!
나는 오빠 놈의 손에서 그림을 잡아챘다.
“이건 세리나 꺼자나!”
“쳇.”
어디서 밑장 빼기야!
못 그렸다고 뭐라고 해 놓고 그걸 뺐냐?
셀리나는 내가 되찾아 준 그림을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더욱 정진해서 황녀님의 귀여움을 100분의 1, 아니, 1000분의 1, 10000분의 1이라도 표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음은 가상하군. 물론 그림으로는 리샤의 귀여움을 절대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테지만.”
아니, 왜 오빠 놈이 잘난 척하는 건데.
끄덕끄덕.
유모랑 다른 시녀들, 아니, 셀리나까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해지 마. 그만 둬.
황당함과 민망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의 일이었다.
‘응?’
조금 수상한 분위기가 시녀들 사이에 감돌기 시작했다.
모냐가 엘제를 눈짓으로 불러내어 곁방에서 소곤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지? 갑자기 웬 비밀 대화?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간식을 먹으며 마력으로 청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엘제와 모냐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 폐하께서 벨론드 대공가의 아이들을 양자로 들이실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
아빠가 콩나물 대가리랑 그 여동생을 양자로 들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도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게…… 2년 전쯤에 있었던 황자님의 마력 폭주와 우리 아기님의 열병이 과장되게 소문난 모양이에요.”
“뭐?”
“그래서 황자님은 마력을 잃으셨고, 우리 아기님은…… 다시 백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모냐의 목소리가 떨렸다.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런……!”
엘제는 흥분해서 소리를 높일 뻔했다가 곧 다시 소곤거렸다.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나나 오빠에게 들릴 걸 염려한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두 분 다 완벽하게 회복하셨고, 폐하께서도 두 분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모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으득, 외부에는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마력 폭주 사태 이후로 황녀님, 황자님 모두 2년간 외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으니, 우드득, 그걸 두고 입방아들을 찧어대는 모양이에요.”
침착한 척만 하는 것 같다. 모냐 이 괜찮나? 방금 진짜 이 부러지는 소리 들린 거 같은데?
어쨌든 상황 파악은 전부 됐다.
우리가 좀 두문불출하긴 했지. 가족끼리만 시간을 보냈거든.
“나는 리샤만 있으면 돼!”
“아빠가 그동안 옆에 못 있어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옆에 있어 주마.”
그동안 아빠가 정무를 처리하는 것 외에 우리 가족은 공식적인 자리에 전혀 나가지 않았다.
아빠랑 오빠가 화해를 하긴 했어도 서먹한 느낌이 남아 있어서, 몇 번 더 친해지길 바라를 찍은 것도 있었고.
또 어렵게 되찾은 가족과 시간을 최대한 함께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 여파가 이렇게 올 줄이야?
우리가 밖에 안 나가니까 진짜로 잘못된 줄 안 건가?
거기에 한술 더 뜨는 소문이 더해졌다.
“그래서…… 폐하께서 두 분을 유폐하셨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고 해요.”
절로 혈압이 높아진다.
내가 한때 백치로 오해받을 만한 상태였던 건 사실이다.
성장도 느리고, 말은커녕, 사람과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생후 5, 6개월이면 시작할 이유식도 돌이 지나도록 안 먹었다고 하니까.
다들 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고들 수군거렸다 했다.
저대로라면 자라도 온전치 못하리라고.
그래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유모와 시녀 언니들이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하지 않았나.
그렇게 겨우 회복되었나 싶던 내가 갑자기 열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그러더니 2년 내내 황녀궁 안에서 두문불출했다.
잘 모르는 이들은 내가 열병으로 진짜 백치가 되어 버려서라고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이해하려면 이해 못 할 상황이 아니긴…… 개뿔!
이것들이, 감히!
‘아무리 그래도 나나 오빠에 대한 소문이 왜 그렇게까지 왜곡된 거지? 궁인들 몇만 털어도 사실이 아닌 걸 뻔히 드러날 텐데. 누가 손을 쓰지 않으면 그럴 수 있나?’
뭔가 냄새가 났다. 아주 구린 냄새가.
그때 오빠와 눈이 마주쳤다.
호적 메이트 기간 25+α 년의 경력으로 나는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오빠도 들었구나?’
마력으로 청력을 강화하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전생에도 오빠는 마력 컨트롤이 뛰어났으니, 아직 어려도 이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했다.
‘들었지?’
‘응.’
‘어쩔까?’
‘어쩌긴!’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가, 아래로 휙 꺾으며 처음으로 소리 내서 말했다.
“다 빼 버려야지!”
난 아직 덜 컸지만, 어쨌든 다 패 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