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218)

Level 8. 메인 퀘스트 : 가족 사기단 (03)

***

벨론드 대공비는 오랜만에 아들과 딸을 대동하고 황궁에 들어왔다.

약 2년 전 황궁에서 아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이후 첫 방문이었다.

그동안 침묵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들이 황자에게 당한 치욕이 잊히길 기다린 것이다.

‘벌써 2년이 지났는걸. 충분해. 그런 사소한 일 따위 기억하는 자들은 없을 거야.’

그녀와 아이들은 주변의 시선을 즐겼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고 아첨하려는 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어머. 오랜만에 입궁하셨네요, 대공비 전하.”

“공자님 공녀님도 오셨군요. 어쩜, 두 분 모두 건강하고 영명하셔라.”

“두 분께선 그야말로 제국의 미래 그 자체이십니다.”

“저, 공녀님의 배동 자리가 비어 있다던데 저희 딸이 공녀님과 비슷한 나이 대랍니다.”

황녀의 명명식 직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대공비는 한껏 우쭐해졌다.

‘그래. 이래야지. 이게 맞는 거지.’

황자가 마력 폭주를 일으켰다는 사실과, 황녀가 열병을 앓았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에도 그녀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며 침묵했다.

그리고 얼마 전 결정적인 정보를 손에 넣었다.

잠시 소원해졌던 황궁 내부의 협력자에게서 확답을 들었던 것이다.

‘소문이 사실이다.’라고.

마침내 대공비는 움직였다. 아랫사람들을 시켜 이런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폐하께서 우리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으실 거라고 소문을 내.”

거짓을 퍼뜨리는 거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으니까.

마력을 각성하긴 했지만 결국 황자, 황녀가 모두 제대로 되지 못한 반푼이었다.

그렇다면 다음 후계자는 태양석을 빛나게 하고 또 명석한 그녀의 아이들 외에는 없었다.

그게 당연하고 옳은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가책이나 불안감 따윈 없었다.

그녀는 한껏 당당한 미소를 짓고 허리를 편 채 자랑스러운 두 아이와 함께 외궁의 그레이트 홀로 향했다.

오늘은 황제의 공개 알현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은 수많은 귀족들이 자유롭게 황제의 알현 장면을 관전할 수 있었다.

알현하는 이들 역시 귀족만이 아니라 젠트리부터 평민들까지 폭넓게 선정되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리저리 공작을 벌인 결과, 알현자들도 관전하는 이들도 평소의 두 배 정도 되었다.

‘증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대공비는 두 아이들과 함께 옥좌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섰다.

그레이트 홀에서는 황제 외에는 누구도 앉을 수 없었다.

때문에 태양의 햇살을 형상화한 황금의 옥좌만이 그레이트 홀에 유일하게 놓인 의자였다.

빈 옥좌를, 그녀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자리는 그녀의 두 아이들 중 하나가 앉을 자리였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말 터였다.

대공비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 알현자들 사이에 선 여자를 보았다.

로낭스 후작 부인.

그녀는 긴장했는지 창백한 얼굴이었다. 식은땀으로 목깃이 다 젖어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대공비는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제대로 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후작 부인은 더더욱 긴장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한번 황녀 쪽으로 줄을 갈아타려다가 실패하고, 상황이 변하자 다시 대공비에게 붙으려 한 박쥐 같은 자다.

대공비는 당연히 로낭스 후작 부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름대로 쓸모는 있었다.

오늘처럼.

대공비는 부채를 펼쳐 입가에 가득 떠오른 미소를 가렸다.

알현자들과 관전자들 사이에서는 희미한 긴장과 기대감, 호기심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문을 들었다.

‘2년 전 황자가 마력을 잃었고, 황녀가 다시 백치가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문 역시 들었다.

‘결국 얼마 전 황제는 자식들을 포기하고, 유폐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양신의 대리인으로서 지상을 돌보는 제국의 황제 자리에, 백치나 태양의 마력이 없는 자는 오를 수 없었으므로.

이는 제국 2천 년 역사의 불문율이었다.

설사 황제의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었다.

그리고 최근엔 한술 더 떠서 이런 소문도 있었다.

‘오늘 황제가 알현을 연 이유는 대공가의 아이들을 양자로 들여 후계로 삼겠다고 공표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모두가 대공비와 그 자식들의 눈치를 보고, 줄을 대려 애쓰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시종이 황제의 입장을 외쳤다.

“태양의 축복을 받아 지상의 가장 높은 금빛 옥좌에 오르신 빛나는 분, 제국의 유일한 주인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알현자들과 관전자들 모두 예를 표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레이트 홀로 입장하는 황제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 황자님까지?”

황후를 닮은 은발과 황제를 꼭 닮은 푸른 눈을 가진 아홉 살 소년 루퍼스리안.

유폐되었다던 황자가 황제의 등 뒤를 따르고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보동보동한 뺨은 귀여웠지만, 턱 선과 콧날은 뼈가 여물지 않았음에도 날카로웠다.

그야말로 천사를 조각한 듯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자줏빛 황자의 예복을 입은 소년은 어린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의젓했다.

그는 황제의 반걸음 뒤를 따라 그레이트 홀의 가운데에 깔린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황자는 대공비의 옆에 선 대공자 아키러스 앞을 스쳐 가며, 보란 듯 웃었다.

둘은 색만 다른 황자의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분명히 대조되는 처지였다.

신하의 자리에 선 아키러스.

황제의 뒤를 따라 옥좌의 옆으로 올라가는 루퍼스리안.

아키러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루퍼스리안이 마력 폭주를 일으키고 마력을 잃은 지 2년이 지났다면 다시 회복할 가능성은 없었다.

이제 황자의 예복을 입을 자격은 없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뻔뻔하게 굴다니!

루퍼스리안은 입술만 움직여 제 사촌을 비웃었다.

동생이 지어 준 딱 어울리는 별명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경 써서 입 모양을 잘 보여 주는 걸 잊지 않았다.

‘콩나물 대가리.’

아키러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확 붉어졌다.

‘저 반푼이 따위가!’

대공비는 아들의 상태를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황자가 당당하게 황제를 따른 것도 문제지만.

황제가 빈손으로 그레이트 홀로 들어선 게 아니라는 것도 문제였다.

황제는 두 팔로 귀여운 아기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저 아기님은 분명히 황녀님, 이시죠?”

장밋빛 뺨이 사랑스러운 아기는 황제의 품속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대공비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귀, 귀여워…….”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대공비조차 무심코 그 말에 동의할 뻔했다.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자신과 자식들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두고.

귀엽다니?

말도 안 된다. 귀여울 리가 없다.

반푼이조차 못 되는, 하잘것없는 백치가 아닌가.

대공비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사이 그레이트 홀은 놀라움과 불안감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오늘 알현에는 대공비에게 줄을 댄 이들이 많이 참여했다.

이들이 오늘 바라고 온 그림은 아주 간단했다.

‘황제가 대공자와 대공녀 중 한 명을 혹은 둘을 함께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공표하는 것.’

황자, 황녀의 계승권이 불투명해졌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다들 그리 생각했다.

마력을 잃었다던 황자와, 다시 백치가 되었다던 황녀가 당당하게 황제와 함께 입장하기 전까지는.

황제의 공개 알현에 황족이 함께하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다만 황제보다 먼저 입장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본래 예법이었다.

황제와 함께 입장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

황후뿐.

지금 루스템 제국의 황후 자리가 비어 있으니, 황제와 동시 입장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래야 했다.

원래대로라면.

하지만 그 원칙이 눈앞에서 박살 나고 있었다. 원칙의 화신 같던 황제 자신의 손에 의해.

술렁거림이 홀 구석구석으로 번졌다.

“황자 전하께서 마력을 잃으셨다는 소문, 사실이 아닌가요? 저리 총명하고 당당해 보이시는데.”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황녀님을 안고 오셨어요.”

“황자님 황녀님을 포기하신 게…… 아닌 건가?”

지금까지 황제는 자식들을 아예 내팽개쳐 두었다.

황자, 황녀가 아직 어림에도 벨론드 대공의 아이들이 후계자로 거론된 데에는 이 이유도 영향이 컸다.

황제가 이미 제 자식들을 포기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상 자식들을 유폐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2년 넘게 황자 황녀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 황제의 모습은 소문과 완전히 달랐다.

함께 입장하여 아들이 자신을 따라오는 걸 자상히 챙기고 옥좌 바로 옆에 세웠다.

게다가 어린 황녀는 아예 품에 안고 입장해서는, 옥좌에 앉아서도 여전히 품고 있었다.

황자는 당당한 태도로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저 태도까지 더해지자, 겨우 아홉 살임에도 황자다운 위엄이 넘쳤다.

어른들조차 저도 모르게 압도될 정도로.

하지만 압도된 귀족들은 몰랐다.

황자가 내뿜는 기세는 사실 황자의 질투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루퍼스리안이 여동생을 안고 입장하는 기회를 아버지에게 빼앗겼다며, 유치하지만 진지하게 분노하는 중이던 것이다.

그것만으로 어른들조차 바짝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다.

‘빨리 크고 말겠어! 빨리 커서, 모든 자리에서 내가 리샤를 안고 다니고 말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