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8. 메인 퀘스트 : 가족 사기단 (04)
***
홀 안에 흐르는 분위기는 대공비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빠르게 당혹감을 수습했다.
‘괜찮아. 아직, 아직 일이 틀어진 건 아니야.’
황자와 황녀가 함께 입장한 건 분명히 예상외의 상황이었다.
황제가 제 자식들을 포기하고 유폐한 게 아니라는 증거였고.
더 나아가 온 마음을 다해 아끼고 있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였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푼이들이 멀쩡해지는 건 아니지.’
루퍼스리안의 얼굴은 조금 창백하고 시무룩해 보였다.
동생을 안고 있을 기회를 놓쳐서 시무룩해하는 것이지만, 대공비가 그걸 짐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람은 바라는 대로 보기 마련이다.
때문에 황자의 심통 나고 시무룩한 표정이, 마력을 잃은 황족의 비통함으로만 보였다.
다른 이들이 어린 황자가 흘리는 기세에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대공비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황녀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아기는 주변의 웅성거림에도 불구하고 새근새근 깊이 잠들어 있었다.
황녀가 백치가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황제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가 눈을 끔뻑거렸다.
순간이지만 대공비는 아기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아기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어?”
아무리 잠이 덜 깼다 해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마치, 이지가 없는 인형처럼 보였다.
정상적인 아이라면 저런 눈빛을 할 리 없다.
게다가 이제는 네 살이나 먹지 않았나.
소문대로 백치가 된 게 아니라면, 저럴 리 없었다.
대공비의 가슴 속에서 희열이 번지는 순간.
황제가 긴 망토 자락을 펼쳐 딸은 다시 안았다. 아니, 숨겼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리 보였다.
그 순간, 대공비는 확신했다.
황녀는 아직 어렸다.
겨우 네 살. 자라면서 상태가 나아지길 기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황제는 황녀가 다시 백치가 된 걸 숨기려는 거구나!’
아이가 더 자랄 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거다.
대공비는 결론을 내렸다.
‘내 눈은 못 속여.’
간절한 바람은 그녀의 눈을 가리고 대신 강한 추진력을 주었다.
후작 부인은 망설이다가 눈짓으로 물어왔다.
‘이건, 상황이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까? 대공비 전하.’
하지만 대공비는 단호하게 부채를 흔들었다.
미리 정해 둔 사인이었다.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라’라는.
***
아, 계속 자는 척하는 것도 은근히 짜증 나네.
물론 더 짜증 나고 귀찮은 건 덜된 아이처럼 연기하는 거지만.
하지만 참아야 하느니라.
벨론드 대공비에게 덫을 놓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았다.
그리고, 대공비와 하수인은 내가 놓은 덫으로 알아서 기어들어 와 주었다.
알현이 시작되자 로낭스 후작 부인이 폭탄을 지고 불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황제 폐하. 제국의 신하로서 충심으로 말씀을 올립니다. 벨론드 대공자와 대공녀를 폐하의 양자로 들여 후계를 안정케 하시옵소서!”
나는 아빠의 소맷자락에 숨어서 슬쩍 미소 지었다.
‘아싸!’
홀 안으로 술렁거림이 번졌다.
하긴, 나랑 오빠의 면전에서 대놓고 이런 말을 던지긴 쉽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대공비의 하수인이 몸을 던진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대공비가 소문이 진짜라고 확신한 거지. 내 연기를 보고 말이다!’
그 대가를, 하수인은 물론 대공비도 톡톡히 치러야 할 거다.
‘아직 근원까지는 못 캐냈지만, 최근에 소문을 무성하게 퍼뜨린 건 확실히 대공 일파였고.’
저들이 뭘 믿고 그렇게 확신했는지는 조금 의아했다.
그때였다. 내가 먼저 움직이기도 전에, 아빠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기 시작했다.
대공비 일파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아빠를 분노하게 한 모양이다.
아빠의 아우라가 분노로 타오르며, 살기를 실은 마력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황자와 황녀가 모두 태양석을 빛나게 하였는데. 후계가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건 무슨 망발인가?”
우웅!
공기가 마력에 호응하며 기묘한 소리를 내며 떨렸다.
차가운 살기가 옥좌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듯 내려왔다.
마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은 몸이 떨리고 무릎이 꺾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몇몇 마력을 갖춘 이들도 제 한 몸 보호하기도 버거워했다.
“흐억!”
“컥!”
“세, 세상에……!”
순식간에 홀 안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해졌다.
***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실로 오랜만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결혼 전까지 황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황제는 이복형제 넷과 사촌 하나의 피에 젖은 손으로 직접 보관을 머리에 쓴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반역을 기도한 이복형의 목을 직접 베었고, 그 지지파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전부 처형되었다.
바로 황궁 앞에서.
그때 흐른 피와, 황제의 냉혹하고 잔인한 모습은 지난 시간 동안 꽤 흐려져 있었다.
이젤리아 황후와 혼인하고 첫 아이가 태어나면서, 냉혹하고 잔인했던 황제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게다가 대략 3년 전부터는 다른 의미로 과거의 황제와 달라졌다. 아예 삶에 의욕을 잃은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자식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는 데에도 흥미가 없었다.
그 덕분에 벨론드 대공 일파가 이렇게 날뛰는 것이 가능했다.
자식들이 태양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기 전까지 벨론드 대공은 황족으로 인정도 받지 못하던 이라, 세력 역시 형편없었다.
황제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대공이 세력을 키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선 이들은 뒤늦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본래 황제가 얼마나 두려워해야 마땅한 이였는지.
경악과 공포 어린 시선이 금빛 옥좌를 향했다.
***
홀 안의 분위기는 아주 엉망이었다.
특히 살기의 직접적인 목표가 된 로낭스 후작 부인은 납작해진 개구리처럼 바닥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헉! 끄억! 으어……!”
이건 예상외였다. 아빠의 분노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덫으로 기어들어 오던 사냥감이 두려움에 짓눌려 찌그러질 정도로.
나는 밖에서 안 보이게 살짝 손을 뻗어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아주 작게 말했다.
“아빠, 그만.”
아빠의 의아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패 버릴 꺼에요.”
그리고, 필살기도 썼다.
“방해하면 미어요!”
효과는 강렬했다!
분노한 드래곤 같던 아빠는 순한 양이 되어 내 말을 따랐다. 홀 안을 짓누르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겨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이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졌던 이들 중에는 당연히 대공비도 있었다.
그 여자는 벌벌 떨면서도 항의했다. 욕심이 공포마저 이긴 모양이다.
“폐, 폐하. 공개 알현에서… 충언을 올리는 신하를 핍박하시다니요! 아, 안 그런가, 로낭스…… 어?”
대공비는 자신의 하수인 로낭스 후작 부인을 보고 당황했다.
“끄, 어어………!”
로낭스 후작 부인은 괴상한 신음을 내뱉으며 여전히 바닥에서 바르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까뒤집고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의가 불려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심적인 충격이 너무 큽니다. 알현에 계속 참여하기는 무리입니다. 몇 달은 정양해야 할 듯합니다.”
로낭스 후작 부인은 그대로 들것에 실려 나갔다.
엥?
그걸 대공비도 나도 황망한 눈으로 보았다.
대공비는 하수인을, 나는 덫으로 들어오던 사냥감을 잃어버렸다.
내가 올려다보자 아빠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아니. 적당히 하셨어야지!’
내가 패 버릴 건 남겨 놔야 할 거 아니에요!
나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하수인을 내세워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기 자식들을 아빠에게 양자로 들이라 압박하긴 했지만, 대공비는 아직 직접 나선 게 아니었다.
하수인을 내세운 주장이 제대로 끝나지도 못했다. 아빠의 과한 자식 사랑 덕분에.
이대로는 대공비 일파에게 제대로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로낭스 후작 부인은 조금 전의 추태로 정치적인 생명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것만으로는 대공비나 콩나물 대가리 등을 엮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자, 아빠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속삭였다.
“미안하다, 아가.”
나는 아빠의 망토와 소매에 가려진 채로 삐졌다는 티를 팍팍 냈다.
양 뺨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팩, 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빠가 안달복달했다.
“아빠가 우리 아가를 방해하려던 게 아니라……. 너무 화가 나 버려서 그만…….”
그러자 옆에서 오빠가 두 손을 내밀며 속삭였다.
“내가 안아 줄게, 리샤. 오빠는 리샤 말 잘 들을 거야.”
아빠와 오빠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물론 이 모든 대화와 손짓은 주변에 전혀 들리지 않도록 결계를 치고 진행 중이었다.
내 계획이 아직 완전히 파투 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빠랑 오빠가 나를 누가 안을 것인가를 두고 아웅다웅하던 중이었다.
술렁이던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치며 끼어든 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