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8. 메인 퀘스트 : 가족 사기단 (05)
“반푼이 따위가 황자라니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저를 황자로 삼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키러스, 아니, 콩나물 대가리였다.
대공비의 안색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소리 없이 쾌재를 올렸다.
‘나이스!’
***
대공비 루도비카는 크나큰 낭패감을 느끼고 있었다.
로낭스 후작 부인이 꼴사납게 실려 나가고, 홀 안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 당장에라도 그녀의 자식들이 황자, 황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아첨하던 이들이 안면을 몰수했다.
“크흠. 어, 황자, 황녀 전하 모두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황자 전하께서는 저리 총기 넘치시잖아요.”
“게다가 폐하께서 자녀들을 저리 아끼시니…….”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는 자들을 노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들 조금 전 황제의 분노를 피부로 경험한 탓이었다.
누구도 로낭스 후작 부인처럼 꼴사납게 매장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대공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나설 수는 없었다.
애초에 로낭스 후작 부인을 방패로 내세운 것도, 사세가 불리하면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 내기 위해서였다.
직접 위험 부담을 질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
‘지금은…… 물러나야 해.’
그녀는 분노를 곱씹으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어머니와 황제의 옆에 선 루퍼스리안을 번갈아 가며 보던 아키러스가 어머니를 잡았다.
“어머니, 오늘 제가 황자가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소리가 컸다. 대공비는 아들을 야단쳤다.
“조용히 하세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아키러스는 어머니의 기대와 예상을 한참 빗나가 버렸다.
어머니가 물러날 기세이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외쳐 버린 것이다.
“반푼이 따위가 황자라니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저를 황자로 삼으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키러스는 철이 들기 전부터 늘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
“진짜 황자는 너란다, 아키러스.”
“태양석을 빛나게 하지 못한 놈은 황자라 불릴 자격이 없어.”
게다가 최근에는 아예 기정사실인 것처럼 주변에서 떠들어 댔다.
“이번에야말로 네가 황자가 될 거란다. 황제도 루퍼스리안 따위는 포기한 거지. 아예 궁 구석에 유폐했다고 하더구나.”
아키러스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입궁했다.
오늘이 그가 황자로 책봉되는 날일 거라고.
그래서 루퍼스리안 따위가 자격도 없이 차지하고 있는 황자궁을 제 것으로 할 거라고.
그런데, 어머니가 물러나려 하고 있었다.
아키러스는 그걸 견딜 수 없었다.
대공비가 경악하여 아들을 야단치며 끌어내려 했다.
“그만! 그만해라, 아키러스!”
그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려 애썼다.
이대로면 아키러스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양자로 들여 달라 황제에게 공론화한 것이 되어 버린다.
로낭스 후작 부인을 내세울 때도 전혀 생각한 적 없는 구도였다.
상황에 따라 빠져나갈 구석은 남겨 두고 움직여야 하는데.
아들이 나서 버리면 일이 잘못되었을 때의 역풍도 아키러스가 온전히 뒤집어쓴다.
대공비는 어떻게든 이걸 공식적인 요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무얼 잘못 알고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키러스는 어머니의 말에 더더욱 분노했다.
“철없다니요! 어머니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황자가 될 거라고요! 다들 그랬잖아!”
아키러스는 주변의 아첨하던 이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들 시선을 피할 뿐.
싸한 분위기에 아키러스가 더더욱 분노하려는 차였다.
소년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키러스의 귀를 찔렀다.
“아키러스 따위가 황자라니, 태양신께서 탄식하시겠군.”
누가 들어도 앞뒤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상태인 아키러스에 비해, 날카롭게 벼린 듯 이성이 살아 있는 조롱이었다.
아키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너! 어디서 마력도 잃은 반푼이 따위가 나를 모욕해!”
루퍼스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마력을 잃었다니 금시초문인데.”
아키러스는 자신만만하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헹! 다 소문났다고! 네가 2년 전에 마력 폭주를 일으켰다는 것 말이야! 마력 폭주를 일으킨 황족이 마력을 되찾은 예는 없다고 말이지!”
“…….”
이 말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루퍼스리안에게 닿았다.
루퍼스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공비가 살짝 끼어들었다.
이미 아들이 발을 빼는 게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그래요! 황자 전하께서 마력 폭주를 일으키셨고, 황녀 전하께서 열병으로 다시 정신이 흐려지셨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합니다!”
이에는 황제의 기세에 두려움을 느끼던 이들조차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런 소문이 귀족가는 물론이고 시장 바닥에까지 자자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 황자 황녀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다는 사실은 이를 부채질했다.
황제는 공무만을 빠르게 처리한 뒤 사라지기 일쑤였고.
사실은 황녀궁에 틀어박혀 함께 가족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는데.
어째선지 이에 대해서는 소문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마력을 잃은 황족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 황족도 황위를 잇지 못합니다. 이대로는 제국의 미래가 암담합니다!”
대공비의 말을 자른 것은 루퍼스리안이었다.
“나나 동생의 상태는 차치하고, 아키러스 대공자가 후계가 되면 제국의 미래는 새카말 텐데.”
루퍼스리안은 키득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까매지는 게 아니라 노랗게 물들려나. 노랗고, 축축하게.”
루퍼스리안의 시선이 아키러스의 사타구니로 향했다. 그가 무얼 조롱하고 있는지, 아키러스는 바로 알아들었다.
2년 전 아나트리샤의 마력 공격에 공포를 느끼고 그가 실금한 것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언급해 버렸다.
아키러스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끼며 분노했다.
소년은 제 분노를 자제하는 법 따윈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네놈이!!!”
아키러스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그는 그대로 루퍼스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아키러스!”
루도비카 대공비가 경악하여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도리어 대공비까지 아키러스의 마력에 휘말려 다칠 뻔한 것을, 세실리아 대공녀가 보호했다.
콰과광!!!
마력과 마력이 부딪치며 알현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부서진 벽돌과 대리석 타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명이 울렸지만 다행히 다친 이는 없었다.
‘누군가’가 마력으로 일반인을 보호한 덕분이다.
다들 황제가 아키러스를 막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욱하게 끼었던 먼지가 가시고 그레이트 홀 가운데에 파인 구덩이 속의 광경에 모두가 눈을 홉떴다.
루퍼스리안에게 가슴을 밟힌 아키러스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크헉!”
루퍼스리안은 저보다 세 살이나 나이 많은 사촌 형을 단번에 제압하고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키러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던 마력을 가진 귀족들조차 루퍼스리안의 움직임은 감히 보지 못했다.
이는, 루퍼스리안의 마력이 상상 이상의 수준을 갖췄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아키러스를 압도할 만큼.
소년의 은발이 사륵 흩날리고, 붉은색을 띤 불꽃 속성의 마력이 광휘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루퍼스리안이 손을 흔들자 주변인을 보호하던 결계가 사라졌다.
이는 폭발의 여파를 막아 낸 결계까지도 루퍼스리안의 작품이라는 소리였다.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마력 과시였다.
대공비에게 붙으려던 이들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세, 세상에! 황자, 황자 전하께서!”
“마력을 잃었다는 건 거짓 소문이었군요!”
“그, 그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루퍼스리안에게 제압당한 아키러스와, 딸에게 기댄 대공비의 눈에 절망이 어렸다.
그들이 믿던 유일한 지지대가 무너진 것이다.
루퍼스리안은 사촌을 걷어차 옆으로 굴려 놓고는 훌쩍 뛰어 여동생의 곁으로 돌아갔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황제와 황녀뿐이었다.
그래서 방금 압도적인 마력을 뽐낸 황자가 칭찬해달라고 달려오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루퍼스리안은 여동생에게 속삭였다.
“나 잘했지, 리샤?”
어서 칭찬해 줘, 라는 미소.
그리고 그런 오빠를 아나트리샤는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패 버릴 거였는데! 왜 오빠 놈이 패 버리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