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9. 서브 퀘스트 : 쪽쪽이 대소동 (01)
시스템 에러 메시지가 눈앞을 가득 채워서 놀란 것도 잠시.
절로 어깨가 춤을 추고 입가가 실룩거리는 걸 참기 힘들었다.
바로 보상을 확인하고 싶은 걸 나는 잠시 참았다.
다름이 아니라, 시스템 에러 테러에 놀라 내가 외친 말이 문제였다.
“우악! 깜따기야!”
나는 그 한마디의 여파가 이렇게까지 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어린 황녀의 귀엽지만 애절한 비명이 울리자.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황제와 황자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자연스럽게 황제는 제 무릎 위의 딸을 온몸으로 감쌈과 동시에, 다른 한쪽 팔로 아들을 끌어당겨 안았다.
“아가! 루퍼스!”
루퍼스리안은 민첩하게 여동생을 끌어안아 보호하려 애썼다.
“괜찮아, 리샤?”
두 부자는 아나트리샤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자, 이번에는 분기탱천했다.
로낭스 후작 부인을 기절시켜 내쫓은 황제의 살기 가득한 마력이 다시 홀을 짓눌렀다.
“뭐지? 누가 감히 내 딸을 놀라게 한 건가?!”
“설마, 암살 시도를?”
루퍼스리안이 쏘아 낸 불꽃이 위협하듯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리샤를 위협하다니! 절대 살려 두지 않겠어!”
홀 안의 귀족들은 경악과 공포로 굳어 모두 납작 엎드렸다.
루퍼스리안은 살기를 풀풀 흘리며 동생의 주변을 살피다가 습격 같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더니.
곧 날카로운 시선을 아키러스에게 향했다.
“설마, 아키러스 네놈……, 은 아니겠군.”
아키러스는 아까 황자의 마력에 당하고 발에 밟힌 끝에.
방금 터져 나온 황제와 황자의 살기에 직격타를 먹어 버렸다.
평소라면 마력으로 몸을 보호했을 테지만, 루퍼스리안과 다투면서 마력을 전부 써 버렸고.
지금 그는 스스로 보호할 최소한의 힘도 없었다.
그 결과, 참사가 다시 벌어지고 말았다.
“뭐, 뭐죠? 지린내가 나는 것 같은……,”
“헉! 대공자님의 바지가…!”
누군가가 경악하여 아키러스를 손가락질했다.
그리하여 모두가 목격하고 말았다.
아키러스가 공포에 질려 바지를 적신 꼴을.
흰색이던 아키러스의 바지가 누렇게 젖어 들었다.
‘진짜 노랑 바지가 되어 버렸네.’
홀에 모인 수백이 넘는 귀족들이 전부 증인이었다.
안 그래도 아키러스가 황제의 앞에서 자신을 황자로 책봉하라고 생떼를 쓰는 걸 모두 보았다.
이성이나 위엄, 우아함 따위는 조금도 없는 그 태도를.
그것만으로도 황위를 노릴 황족으로서의 자질 부족이라는 소리를 들을 판이다.
그런데 마력을 잃었다던 루퍼스리안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태양의 마력을 가진 황족끼리의 대련에서 한쪽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패배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했다.
황위 계승전에서의 탈락.
차라리 암살당하는 것이나 전투 중에 죽는 게 도리어 명예로울 지경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에게 패배한 것도 모자라……, 공포에 질려 실금하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그것도 황제의 공개 알현 장소에서.
이건 전에 황녀궁에서 비공식적으로 있었던 비슷한 사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치였다. 차라리 반역을 일으켰다 목이 잘리는 게 나았다.
제국의 2천 년 역사에서 이런 치욕을 당한 황족은 없었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대공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키러스!”
아키러스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아냐! 아니야! 아니에요, 엄마! 세실리아!”
아키러스가 엉금엉금 기어서 가족에게 다가가려 하자, 대공비는 얼굴을 구기고 뒤로 물러섰다.
세실리아는 소매로 코를 가린 채 제 오빠를 외면했다.
이 난장판 속에서 아나트리샤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난 그냥, 조금 놀란 것뿐인데.’
그것만으로 이런 난장판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난 아무것도 몰라. 나는 네 살짜리 애기라구.’
얼마 전에 네 살이면 아기가 아니라고 우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나트리샤는 순진하게 눈을 뜨고,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우웅?”
평소 절대 하지 않던 애기짓이었다.
그걸 보고 황제와 황자는 닮은 부자 아니랄까 봐 동시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커흑!”
“너, 너무 귀여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요.’ 상태의 아나트리샤는 이 작은 행동이 만들어 낼 미래의 여파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
아나트리샤가 뭘 보고 놀랐는지는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이 알아서 결론을 내려 버렸다.
루퍼스리안이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아, 아키러스의 노랗게 물든 바지를 보고 놀란 모양이구나.”
“그런 것인가.”
사실 아나트리샤의 작은 놀람에 두 남자가 오버한 것에 아키러스가 공포에 질려 실금한 거지만.
사건의 순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황위 계승권은 이미 유명무실에 명예는 땅에 떨어진 아키러스를 편드는 이는 없었다.
그 가족조차도. 대공비도 대공녀도 고개를 돌렸다.
아키러스는 공개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하긴. 저렇게 추한 꼴을 보셨으니 아기 황녀님이 놀랄 만도 하지.”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거의 넋을 놓은 아키러스가 질질 끌려 나가고.
부서지고 더럽혀진 바닥의 정리가 빠르게 끝났다.
그리고 알현이 재개되었다.
알현이 끝날 때까지 황제는 보란 듯 딸을 무릎에 앉혀 놓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참여한 귀족들은 분명하게 목격했다.
황제와 황자가 얼마나 황녀에게 절절매는지.
황녀가 놀랐다는 것만으로 불꽃 쇼를 벌일 정도로 흥분하는 것도.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순진하게 아빠의 무릎에 앉아 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아기 황녀는……… 아주아주아주 귀여웠다.
정말로 귀여웠다.
수도 전체는 물론이요, 대륙 전체에 이에 대한 소문이 도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치 않았다.
***
콩나물 대가리가 노랗고 축축한 바지를 모두의 눈앞에서 보인 그날로부터 약 이주 후.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녀들에게 물었다.
“이거 모야?”
그러자 엘제가 싱글벙글 웃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상자 중 하나를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당연히 황녀님 앞으로 온 선물이지요!”
하나같이 화려하고 예쁘게 꾸며진 상자였지만, 크기가 꽤 작았다.
설마, 내용물이 또 다 ‘그건’ 아니겠지?
내가 불안감을 느끼는 동안 엘제가 상자를 풀어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나는 실망했다. 진짜 또 ‘그거’냐.
“또야…….”
“하지만, 이렇게 귀여운걸요. 우리 아기님께도 꽤 잘 어울릴…….”
나는 두 팔을 파닥거리며 외쳤다.
너무 싫어서 발음이 다 뭉개져 나왔다.
“시러! 쪼쪼기! 시러!”
그렇다.
최근 황녀궁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선물들은 어째선지 하나같이 쪽쪽이였다.
쪽쪽이 따위는 환생 첫날 이미 졸업했다고! 내 나이가 벌써 몇 살인데!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손가락 좀 빨았다고 진짜 애긴 줄 알아!
아니, 아닌가? 이건 아빠랑 오빠가 원흉이다!
“리샤는 애기 안니야! 쪼쪼기 피료엄써!”
빼앵 하고 외치자, 엘제와 셀리나 모냐의 표정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오구오구. 그렇죠. 우리 아기님은 아기가 아니시죠.”
“애기 안니라니까!”
“네, 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엘제의 표정은 절대 수긍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딱 봐도 아기가 짜증 내니까 오구오구 귀여워, 하면서 받아주는…….
으아악! 아니라고! 아니야!
물론 껍데기는 네 살 아기지만, 속은 이제 거의 서른이란 말이다!
쪽쪽이라니! 쪽쪽이라니이!
내가 머리쿵 방지 베개에서 벗어나는 데에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쪽쪽이가 더해지는 것만은 안 돼!
그건 두 살 때도 필사적으로 피한 건데! 네 살이나 되어서 쪽쪽이라니!
그럼 진짜 아기 같잖아!
“아아. 화내시는 것도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심장이 아파.”
만성 협심증을 호소하는 셀리나.
“이 핑크다이아몬드랑 빨간색 리본이 달린 쪽쪽이는 오늘 황녀님 원피스랑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리고 진심 어린 미련을 뚝뚝 흘리는 모냐.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으나, 큰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에는 이 쪽쪽이들 전부 좋다고 하셨잖아요?”
“…….”
그렇다. 나는 이미 패배했기 때문이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은 일주일 전, 가장 강력한 적 둘 앞에서 무너졌으니까.
‘그때,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나는 슬픔과 원통함을 담아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
그날은 아빠와 오빠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황녀궁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늘 그렇듯 수행원을 한가득 이끌고 왔는데.
그날따라 그 숫자가 유달리 많아서 불길했다.
그리고 아빠와 오빠의 얼굴에 떠오른 뿌듯한 미소도.
아빠가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아빠가 우리 아기 선물을 가져왔단다.”
뭐지? 이 오싹한 불길함은?
오빠가 옆에서 거들었다.
“리샤랑 진짜 잘 어울릴 거야.”
무수한 상자를 들고 있는 낯선 이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째선지 다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그들이 일제히 상자를 열자, 휘황한 빛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진귀한 보석 액세서리를 담을수 있게 설계된 상자 안에는, 각양각색의…….
나는 빼앵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쪼쪼기 시러어! 리샤 애기 안니야!”
아빠와 오빠가 몰고 온 건, 수도 안에서 수소문해 온 쪽쪽이 장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대체 왜 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