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218)

Level 9. 서브 퀘스트 : 쪽쪽이 대소동 (02)

***

이러한 소동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벨론드 대공의 장남 아키러스 대공자가 처참한 굴욕을 겪고 계승권을 잃은 날.

알현의 자리에서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 황자가 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순진한 청보라색 눈을 댕그랗게 뜬 아나트리샤가 엄지손가락을 쪽쪽 빨고 있는 모습을.

그 순간, 부자는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물론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과다한 귀여움에 심장의 고통을 호소하는 게 먼저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서로의 생각이 같다는 걸 확신했다.

‘너도 같은 생각인가.’

‘아빠…, 아니, 아버지께서도 같은 생각이시군요.’

‘그냥 아빠라고 해도 된단다.’

루퍼스리안은 부친의 애절한 눈빛을 못 본 척했다.

리샤 덕질(?)을 할 때는 사이가 멀어졌던 적이 있나 싶게 죽이 척척 맞았지만.

아직 상처받고 화난 게 다 사라진 건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이지만 앙금이 있었다.

그나마 폐하에서 아바마마로, 이젠 아버지로 호칭이 변화한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지만.

물론, 리샤 덕분에 화해하기 전, 찬바람 쌩쌩 불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긴 했다.

어쨌든, 이 두 부자의 유일한 공감대이자 덕질 대상인 아나트리샤에게는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너무나도 귀엽고, 어리고, 사랑스럽고, 기특하며… (이하 생략)… 인 딸 or 동생이지만.

안쓰러울 정도로 나이에 비해 철이 들게 행동하려고만 했다.

카스톨트는 물론이고 루퍼스리안도 아나트리샤의 이런 면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인데. 아이답게 자라야 할 때를, 어리석은 아비 때문에 잃게 만든 것 같구나.’

‘리샤는 오빠인 내가 지켜 줘야 하는데! 그런데, 리샤가 날 지켜 주는 일이 더 많아.’

두 남자의 자책감은 조금씩 달랐지만 비슷한 면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이 없어 네 살짜리 아기의 몸속에 든 알맹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두 남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니, 알았다 해도 똑같았으리라.

어쨌건 이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은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된다.

‘리샤가 좀 더 어리광 부려 줬으면 좋겠다!’

‘특히, 나한테만!’

그런데 그때, 두 남자가 간절히 바라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아나트리샤가 정말로 드물게 그 나이 대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제대로 지켜 주지 못해 마음 아프게 여겼던, 조금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우웅?”

쪽쪽쪽.

작고 귀여운 엄지손가락을, 마찬가지고 작고 귀여워 미치겠는 입술로 쪽쪽 빨고 있었다.

아기들이라면 자주 보이는 광경이지만, 황제는 거의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명명식 날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나트리샤는 쪽쪽이부터 뱉었으니까.

물론 루퍼스리안은 본 적 있었지만, 그건 정신을 차리기 전 불쌍하기만 하던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텅 빈 눈으로 쪽쪽이만 문 채 누워 있는 것이 전부인.

지금처럼 생기 넘치고 귀여운 동생이 쪽쪽이를 문 건 못 봤다.

그러니 아예 못 본 것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루퍼스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명명식 날 이후 아나트리샤는 갑자기 십몇 년은 혼자 커 버린 것 같았다.

느리게 자란 걸 한 번에 보충했다고 보기에도 지나치게 빨랐다.

그 빠른 정신적 성숙이, 꼭 가족을 지키기 위한 아기의 발버둥 같았다.

이리 어리고 약한(?) 아기가, 자신이 빨리 자라지 않으면 가족을 잃을 거라고 불안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카스톨트도 루퍼스리안도 이 작은 아이에게 구원받았다.

때문에 더더욱 가슴이 쓰리고 입맛이 썼던 것이다.

아나트리샤가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부자 모두 지난 2년여간 아나트리샤의 곁에 붙어 뭐 하나라도 더 해 주려 애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의지하고 어리광 부려도 된다고.

제발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런데.

드디어, 드디어 아나트리샤가 아기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리광을 부렸다!

그렇다면 전력을 다해 받아 주는 것이 인지상정!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는 귓전에서 팡파르가 울리고 하늘에서 빛이 쏟아지는 듯 느껴졌다.

때문에 알현이 끝나고, 피곤했는지 여전히 손가락을 입에 문 채 (무려!) 잠든 아나트리샤를 황녀궁의 침실에 재워 놓고 난 뒤.

본궁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루퍼스리안이 먼저 외쳤다.

“쪽쪽이! 쪽쪽이를 구해 와!”

그러자 카스톨트가 근엄하게 대꾸했다.

“우리 아기를 위한 물건이다. 새로 만들게 하는 것이 낫다.”

루퍼스리안은 한 수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지적이시군요.”

“아니다. 쪽쪽이를 바로 떠올린 루퍼스 네 총명함은 언제 봐도 감탄스럽구나.”

기드온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두 분 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기드온의 매끈한 팔뚝을 경계 어린 눈으로 보던 루퍼스리안이 차갑게 말했다.

“광휘 기사단장은 리샤에게 둥개둥개를 해 줄 자격이 역시 없어.”

상황을 다 파악하지 못한 기드온이 그럼에도 분기탱천했다.

“아니!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입니까, 황자 전하! 우리 아기 황녀님께서 제 둥개둥개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요!”

그는 두 팔을 번갈아 들어 올려 이두근과 삼두근을 자랑했다. 근육이 팽창하며 기사단장의 튼실한 팔뚝을 가린 옷자락이 쫙 찢어졌다.

“다음에 뵈면 둥개둥개 또 해드리기로 약속했단 말입니다! 제가 그래서 얼마나 근육 단련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루퍼스리안과 카스톨트의 똑 닮은 눈빛이 불만과 경계심을 가득 담고 기드온의 팔뚝을 노려본다.

울룩불룩한 기드온의 팔뚝은 참으로 힘이 넘쳐 보였고.

또 매끈매끈매끈했다. 기드온은 아직도 매일같이 하루 세 번 거르지 않고 면도를 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이유를 위해.

‘여전히 리샤 둥개둥개를 노리고 매일 면도 중인 건가…….’

‘역시 광휘 기사단장. 방심할 수 없는 남자다.’

카스톨트의 냉철한 대꾸가 기드온의 약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역시 그대는 우리 애기를 둥개둥개해 줄 자격이 모자라.”

“예?! 폐하께서까지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기드온이 처음으로 항명할 기세였다.

“내가 그대의 속셈을 모를 줄 아나? 우리 아가가 즐거워해서보다는, 아가를 둥개둥개해 줄 때 본인의 기쁨과 즐거움 때문에 근육을 기르고 면도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황제는 자신의 제일가는 충신인 기사단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건 그대가 우리 애기를 기쁘게 해 주는 게 아니야! 너무나도 착하고 상냥한 그 아이가 그대를 위해 희생해 주고 있는 거지!”

“크흑!”

황제의 지적에 폐부를 찔린 광휘 기사단은 힘없이 무너졌다.

“맞아…. 이기적인 나, 나에겐…… 아기님을 둥개둥개할 자격이 부족해……!”

잠시 난장판을 침착하게 지켜보던 시종장이 물었다.

“한데 폐하, 전하. 쪽쪽이와 광휘 기사단장의 황녀님 둥개둥개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헛! 그러고 보니……!”

잠시 다른 세계로 향하는 논지에 휩쓸리던 기드온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걸 보고 카스톨트 황제와 루퍼스리안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쯧. 쓸데없는 짓을…….’

‘라이벌을 하나 줄일 수 있었는데.’

어쨌든 시종장의 상황 정리 끝에, 수도 안의 장인들이 우르르 집무실로 불려 왔다.

장인들은 처음 뵙는 황제와 황자의 존안에 오들오들 떨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제가 물었다.

“그래. 너희들이 수도 안에서 제일가는 쪽쪽이 장인들인가?”

장인들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올랐다.

“쪽, 쪽이 장인이라니요?”

시종장이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설명했다.

“쪽쪽이만 만드는 전문적인 장인들이 없어, 아기들을 위한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을 추려 불러들였습니다.”

그러자 황제의 수려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귀하디 귀한 황녀에게 줄 쪽쪽이를 만들 장인이다. 당연히 일생을 쪽쪽이만 만드는 일에 매진한 자들도 부족하거늘!”

“맞습니다.”

황제의 옆에 선 은발의 미소년이 마음에 안 찬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열 살 내외로밖에 안 보이는 아이인데.

역시 황족들은 다른 모양이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장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대답을 내놔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건…… 대박이다!’

‘어떻게든 바쳐야 한다!’

아직 수도 안에 대공자가 계승권을 잃은 일에 대한 소문은 나지 않은 상황이다.

오늘 벌어진 일이다 보니 당연했다.

하지만 곧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고 강물보다 멀리 퍼지리라.

왜냐면 시종장이 이들을 불러들이면서 사전에 그 사건에 대해 언질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 더더욱 소문을 빠르게 돌게 하려는 시종장의 계산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벨론드 대공 일파의 기세가 꺾였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게다가 마력을 잃었다는 소문이 난 황자의 마력이 건재하다는 것도 알았다.

무엇보다 황제와 황자가 하나뿐인 황녀를 얼마나 극성으로 아끼는지 눈치채 버렸다.

이건 두 번 있을 수 없는 기회였다.

장인들은 앞을 다투어 외쳤다.

“소, 소인은 감히 쪽쪽이 장인이라 자부합니다! 지금껏 만든 쪽쪽이만 해도 황궁을 빙 두르고도 남을 지경이며……!”

“소인은 에아루스 후작가에도 쪽쪽이를 만들어 납품한 전력이 있사옵니다!”

“지금부터 저는 죽을 때까지 쪽쪽이만을 만들 것을 태양신께 맹세합니다!!!”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이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황제와 황자를 조금 움직였다.

“좋다. 최고의 것으로 만들어 오도록 해 봐라. 재료는 아끼지 말지어다.”

“어떤 자를 선택하시려는지요?”

그러자 황자가 옆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대신 답했다.

“전부 만들게 하지요. 최대한 많은 이들을 경쟁하게 하여, 리샤에게 여러 선택지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영명하구나, 루퍼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루퍼스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자는 멈칫했으나, 아버지의 손길을 떨쳐내지는 않았다. 카스톨트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전부 만들게 해라. 그리고 인당 만들어 오는 개수도 제한을 두지 않겠다. 이미 말했다시피 예산에 대한 제한도.”

“하면 모두 사들이시는 것입니까?”

“그래. 하지만 그중 황녀의 선택을 받은 물건을 만든 자만을 황실 전용 쪽쪽이 장인으로 인정할 것이다.”

장인들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마감은 일주일 뒤다. 그때 황녀가 직접 선택하게 할 것이다.”

황제의 말에 일주일간 수도 안의 아기 용품 장인들의 운명이 정해졌다.

그들은 그날로부터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일주일간 한숨도 자지 못했다.

***

그리고, 드디어 지금.

“쪼쪼기 시러어! 리샤 애기 안니야!”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바친 쪽쪽이 행렬 앞에서, 아기 황녀께서 빼앵하고 우셨다.

그러자 장인들은 더더욱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크흑…! 일주일간의 철야가 수포로…….”

“인생의 역작이라고 생각했건만!”

“하지만 아기 황녀님의 실물을 보니 제 작품은 빛이 바랩니다. 부족함을 통감할 수밖에…….”

아나트리샤는 피눈물을 머금는 장인들의 반응에 당황했다.

‘엥? 이게 무슨 헛소리야? 다들 진심이야?’

좀 과한 충성 표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아나트리샤 앞에 메시지가 뾰롱뾰롱 떠올랐다.

[스킬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S급)> 부가효과 적용 성공!]

[부가효과 적용 시간 : 3분]

[적용 대상의 속마음을 표시합니다.]

[장인 A : ‘크흑, 너무 귀여우셔! 내가 만든 쪽쪽이는 황녀님의 작고 소중한 입에 물리기엔 한참 멀었다!’]

[장인 B : ‘다음에는 어떻게든 황녀님께 어울리는 쪽쪽이를 만들어 내고 말겠다!’]

[장인 C : ‘평생이 걸려도 좋다! 일생을 바칠 만한 일이야! ………’]

아나트리샤는 아연실색했다.

‘이게 다 진심이라고? 여기 제정신인 사람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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