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0. 메인 퀘스트 : 나를 귀여워한 스파이 (02)
***
말린다 다브네스는 황녀궁의 시녀가 되면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배속되었다.
그것도 황녀가 직접 임명하기까지 했다.
“마리댜는 쪼조기 담당!”
영광스럽고 또 중요한 지위였다. 주변에서 소란을 피우며 말릴 정도로 말이다.
“리샤.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 아니야? 저 시녀는 황녀궁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어.”
“맞습니다, 아기님. 그 중요한 일을 벌써부터 맡기시다니…….”
“좀 더 지켜보신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세요!”
“저에게도 안 맡기셨으면서!”
때문에 말린다는 그 일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 채 자청했다.
“제발 꼭 맡고 싶습니다! 믿고 맡겨 주세요!”
“웅! 아라써! 겨쩡!”
그 결과.
황녀궁의 한 방에서 말린다는 산처럼 쌓인 상자들을 보고 아연해졌다.
황녀궁의 하녀 중 하나가 그녀를 이곳으로 안내하고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이곳이 황녀님의 아주 중요한 물건들을 모아 둔 방입니다. 수석 시녀께서는 전부 리스트를 만들어서 분류해 주시고, 물건의 관리를 해 주시면 됩니다.”
“그, 어…….”
“저희들은 감히 손댈 수 없는 귀한 물건들이니 조심히 다루어 주십시오.”
말린다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하녀는 쌩하니 사라졌고.
그녀는 홀로 남겨졌다.
방 안을 산처럼 채운 쪽쪽이들과 함께.
‘중요한 지위라는 게…… 쪽쪽이 담당관이라고?’
황궁 전체를 휩쓸고 간 황녀의 쪽쪽이 대소동은 말린다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황제와 황자가 주문 제작한 것들과 국내외에서 선물로 들어온 쪽쪽이들이 쌓여 있었다.
황녀궁의 방 하나가 아예 가득 채워져 있을 정도로.
그것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쪽쪽이 담당관.
이것이 말린다가 받은 영광되고 중요한 지위였다.
벌써 그녀는 숙모에게 당당하게 편지를 했다.
-벌써 황녀는 제게 넘어와서 황녀궁의 중책을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 중책이 쪽쪽이 관리란다.
‘숙모님께… 뭐라고 말하지…….’
말린다가 방 안의 쪽쪽이를 소재와 크기에 따라 분류하고 리스트화 하는 데에는 사흘이 꼬박 걸렸다.
이를 보고하자, 황자가 차갑게 말했다.
“관리관이 할 일은 그뿐만이 아니야. 하나하나 닦고 말려 최고의 위생과 컨디션을 유지시켜야지.”
말린다는 은 식기 광내는 하녀들처럼 쪽쪽이를 닦고 또 닦았다. 일주일 내내.
‘이게 뭐야!’
***
다행히도 쪽쪽이 관리관이라는 일에도 긍정적인 면은 있었다.
적어도 황족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물론 얼굴을 자주 마주한다는 게 곧 그들의 호감을 얻거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황녀궁의 아침 단장 시간.
황제는 말린다를 보며 인상을 썼다.
“이 쪽쪽이가 정말로 황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고른 건가?”
황자의 차가운 질책이 이어졌다.
“여기 이 쪽쪽이에는 먼지가 0.001 그라운(=mg) 앉아 있어. 리샤에게 줄 수 없다. 다시 닦아 와.”
시녀들도 하나같이 차가운 눈으로 말린다를 볼 뿐.
그들은 ‘황녀님이 내게도 맡기지 않은 중책을 굴러 온 돌 따위에게!’라면서 질투 중이었다.
여기서 유일하게 따사롭게 말해 주는 건 아기 황녀뿐이었다.
“웅? 리샤는 마리댜가 준 이거가 죠아! 쯉쯉!”
황녀의 말 한마디에 말린다를 구박하던 말들과 눈빛이 눈 녹듯 사라졌다.
눈칫밥만 먹던 말린다는 저도 모르게 진심으로 감격했다.
“황녀님! 감읍…, 크흡!”
그래서 그녀는 몸서리치게 싫어하던, 쪽쪽이를 닦고 고르는 일에 꽤 진심이 되었다.
마침내 그녀가 닦아 온 쪽쪽이를 두고 황자가 더는 먼지를 트집 잡지 못하게 되었을 때.
짜릿한 희열을 느낄 만큼.
‘해냈다! 드디어 해냈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말린다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다.
‘대체 이 애는 뭘 하고 있는 거야?’
조카딸을 황녀궁에 밀어 넣는 데에 성공했고.
또 황녀의 총애를 얻어 중책을 맡게 되었다 했다.
그때까진 일이 술술 풀린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말린다에게서는 신통한 소식이 없었다.
황녀나 황자를 구슬려 자신에 대한 호감을 불어넣은 것도 아니고.
황제가 그녀를 돌아보게 만든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황녀궁 궁인들의 비리나, 황녀의 약점을 제대로 알아낸 것도 아니다.
정기적으로 도착하는 조카딸의 보고는 갈수록 순 쓸데없는 내용뿐이었다.
“매번 황녀가 이렇게 귀엽고, 쪽쪽이가 이렇고 저렇고……!”
말린다가 보낸 보고서가 손안에서 와락 구겨졌다.
어이가 없는 소리만 가득한 이런 보고 따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손톱을 깨물었다.
‘멍청해서 부려먹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는 쓸모가 하나도 없잖아!’
혹시나 이쪽의 약점을 도리어 황녀궁 쪽에 흘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차피 그 멍청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어. 그리고 몇 안 되는 정보들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으니.’
본인도 몇 겹으로 얽혀 있는 데다, 겁도 많은 성격이다. 큰 문제는 없으리라.
직접 소리 내서 말하지만 않으면 대체 누가 알 것인가.
‘그래도 곧 불러들여서 야단을 좀 쳐야겠어!’
안 그래도 황자궁에 심어 두었던 궁인들이 전부 쫓겨나며,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날개가 반 꺾인 상황이다.
그녀가 황후궁을 장악하고 벨론드 대공 일파와 협력해, 가장 먼저 한 일이 그것이었다.
황자궁 장악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궁인들이 주인인 황자보다 대공자나 그녀의 말을 더 따를 정도로.
그 기간 동안 사실상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루퍼스리안 황자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황자가 마력을 각성하고 황제의 태도가 변하면서, 모든 게 파투 났다.
‘황자궁에 심어 둔 자들은 이미 전부 쓸려 나간 지 오래되었지.’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시종장의 감시와 견제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그녀가 밀려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카딸을 황녀궁에 밀어 넣는 무리수까지 쓴 것이다.
그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다니!’
황제에게 접근하는 일도 당연히 답보상태.
도움이 필요했다.
내부에서 안 된다면 외부라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벨론드 대공가의 문장이 찍힌 것이다.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자 대공비의 분노 가득한 악필이 보였다.
그 글자들이 항의하고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알려 준 정보와 다르지 않은가. 황자는 마력을 잃지 않았고, 황녀는 백치가 아니었어!
그 결과 아키러스 대공자는 계승권을 잃었다. 그 사실을 대공비는 극렬하게 항의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편지를 기쁘게 봤을 것이다.
그들의 배반에 대한 마땅한 보복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잘못된 정보를 주지 말 것을…….’
벨론드 대공비가 황자가 마력을 잃었고 황녀가 백치가 되었다 확신하고 일을 벌인 이유는 간단했다.
황궁 내부에 그 사실을 확인해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다브네스 후작 부인이.
황후궁의 실세가 한 말이니 대공비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들이 계승권을 잃은 것이다.
후작 부인에 대한 대공 일파의 불신은 극에 달해 있으리라.
그리고 대공비는 이것까지는 모를 터이지만, 황자 황녀에 대한 헛소문이 돈 데에도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역할이 컸다.
황제와 자식들의 사이를 벌려놓을 겸, 헛소문을 처음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바로, 황제가 자식들을 유폐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근원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만일 이 사실까지 알면, 대공비는 후작 부인에게 더욱 이를 갈 것이다.
‘어찌한다…….’
고민만이 깊어졌다.
***
굴러온 돌 씨는 오늘도 뿌듯한 표정이었다.
“33번을 씻고 닦아 왔답니다. 하스티아에서 선물로 보낸 물건입니다!”
오빠는 이번에는 별다른 흠을 잡지 않았다.
요 며칠 사이에는 굴러온 돌이 골라 온 물건이나 청소 상태에 흠을 잡는 일이 줄었다.
트집 잡을 게 없다는 게 더 불만 같았지만.
나는 웃으며 쪽쪽이를 받아서 물었다.
“웅! 져아!”
그러자 말린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퍼졌다.
내 눈앞에는 메시지가 우르르 떠오르고 있었다.
[말린다 : ‘아, 황녀님은 정말로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우시고…….’]
[말린다 : ‘숙모님께선 쓸모 있는 정보를 보고하라며 또 꾸중을 하셨지……, 하지만 황녀님의 귀여움과 쪽쪽이를 관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말린다 : ‘……숙모님은 요즘도 황후 폐하의 옷을 몰래 입으실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말린다 : ‘그런데 그때 내 명의를 빌리신 건 왜였을까…….’]
확률은 10퍼센트지만, 시도할 수 있는 횟수에 제한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말린다가 옆에 있는 동안은 쉴 새 없이 스킬을 시도했고.
그 결과 말린다의 머릿속을 거의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 수 있었다.
“먀리댜, 져아!”
“영광이에요, 황녀님!”
[말린다 : ‘아앗. 행복…해….’]
굴러온 돌은 좋은 정보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싫어할 리가 있나.
가끔 황후궁에서 말린다를 찾는 전갈이 오곤 했다.
“부시녀장께서 쪽쪽이 담당관님을 찾으십니다.”
태업 중인 스파이를 관리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면 나는 불쌍한 고양이 눈을 하고 말린다를 보았다.
“나는… 먀리댜랑 노는 게 져은데……. 그래도 보내죠야게찌…?”
그러자 갈등하던 말린다는 곧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중책을 맡고 있는 제가 자리를 비울 수 없지요! 숙모님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러자 셀리나는 낮지만 분명히 “쳇.”하고 혀를 찼다.
그럴 리가.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어쨌건 말린다는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되고 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헤죽헤죽 웃어 주었다.
“꺄아! 놀쟈! 꺄하하!”
***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양심 없는 인간들!’
벨론드 대공비에게 뜯긴 자금이 너무나도 아쉬웠기 때문이다.
대공비의 항의 서한에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잡아떼기로 응대했다.
-나도 황자 황녀가 그런 상태인 줄 알았다.
그러자 벨론드 대공비는 뻔뻔하게도 이렇게 요구해 왔다.
-합당한 성의를 보여라.
지난번 후작 부인이 잘못된 정보를 준 일로 벨론드 대공가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후작 부인의 요청을 바로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했다.
‘그만큼 곤란해진 거야.’
대공자가 계승권을 잃으며 황실로부터 받은 금광의 권리가 절반으로 줄었다.
거기에 대공자가 황자에게 망신을 당한 후, 벨론드 대공가에 줄을 대려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당연히 챙길 수 있는 뒷돈도 부족해졌을 것이다.
대공가가 씀씀이를 줄일 수 있을 리 없으니, 돈에 쪼들리는 건 당연한 결과.
덕분에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돈으로 그들의 협력을 사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신뢰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도착했으니까.
그녀는 벨론드 대공가로부터 비밀리에 보내진 상자를 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술사의 비약.’
사악한 힘을 다루는 술사들만이 만들 수 있는 특수한 비약.
그녀는 사실상 대공 부부에게 준 돈으로 이 약을 산 셈이다.
‘황녀만 아니었어도 한 번은 더 쓸 수 있었는데.’
새삼 황녀의 훼방으로 버려야 했던 음식들이 떠올랐다. 거기에는 아나트리샤의 걱정처럼 무언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 비밀 공간 속에 약을 숨겨 두었다.
‘좋아.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겠어.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황제를 내 것으로……!’
그녀의 두 눈이 야심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들끓는 불안감은 사라져 주지 않았다.
허공에 동동 떠서 한심하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던 아기 황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후를 닮은 그 밉살스러운 눈동자.
그 존재 자체가 주장하는 것 같았다.
‘너는 이미 졌어.’라고.
이럴 때 다브네스 후작 부인의 마음을 가라앉혀 줄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황후궁 침실 주변에서 사람을 전부 물려 놓고, 홀로 투왈렛 룸으로 들어섰다.
달처럼 빛나는 황후의 옷과 장신구들이 주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투왈렛 룸의 빛나는 것들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아니, 그녀의 경계심이 최고로 높아져 있다 해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는 눈이 황후궁의 침실을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후웅.”
유리 정원에서 아빠 오빠와 노닥거리던 아나트리샤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좋아. 드디어 거기로 들어갔구나.’
쪽쪽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기의 자그마한 입꼬리가 사악한 호선을 그렸다.
그래 봤자 귀여울 뿐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