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0. 메인 퀘스트 : 나를 귀여워한 스파이 (03)
***
말린다가 황녀궁에 배속되었을 때, 돌발 퀘스트만 온 건 아니었다.
[메인 퀘스트!]
[퀘스트 명 : ‘아빠를 지켜라!’]
[설명 :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황후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녀의 야심을 저지하여 ^&*와 ■≒할 때까지 아빠의 정조를 지키세요!]
[완료 조건 : 다브네스 후작 부인 축출]
뭔 표현이 저따구인지 모르겠다. 시스템의 괴이한 작명 센스에 대한 험담은 잠시 미뤄 두자.
나는 퀘스트 목록을 접어두고. 왜 저렇게 열심인지 모르겠지만, 쪽쪽이를 거울이 되도록 닦고 있는 말린다의 정보를 확인했다.
윙크.
말린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어억! 황녀님께서 날 보셨어! 내게 윙크를 해 주셨어!”
그러자 옆을 지나가던 모냐가 핀잔을 주었다.
“네가 든 쪽쪽이를 보신 거야.”
하지만 말린다는 꿋꿋했다.
“아냐. 날 보셨다구.”
지난 한 달간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모습이다.
말린다는 황녀궁에 온 지 보름 만에 나에게 돌발 퀘스트 완료 보상을 안겨 주었다.
‘나도 놀랐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어.’
원래 그다음에는 <궁예> 스킬로 정보만 한 번 더 뽑아 내고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 말린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그녀의 시스템 창 정보 중 몇 개가 바뀌어 있었다.
[특성: 뀨띠빠띠 숭배자(10lv), 성실함(5lv), 소박한 야심가(4lv)…….]
“…….”
‘뀨띠빠띠 숭배자’라는 저 흉한 특성은 ‘큐티 매니아’의 상위 특성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처음에 발현한 ‘큐티 매니아’ 특성이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레벨업 하더니.
지금의 ‘뀨띠빠띠 숭배자’로 승급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승급한 특성도 무섭게 레벨업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특성도 몇 개 변했다.
‘우둔함’이 ‘성실함’으로 바뀌었고, ‘어설픈 야심가’가 ‘소박한 야심가’로 바뀌었다.
명백히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황녀님 오늘은 부디 이 쪽쪽이를 써 주시면 대대로 영광일 것입니다!”
말린다는 이렇게 말하며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내게 공손하게 쪽쪽이를 바쳤다.
마치, 신을 숭배하는 신도처럼.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
나는 약간 질려서 얌전히 쪽쪽이를 받아 물었다.
역시 빨리 끝내야겠다.
아이템도 얻었겠다. 정보도 충분히 뽑았고, 증거도 꽤 마련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 딱 하나만 남은 상황.
결정적인 작전만 실행하면 된다.
‘그러면 엄마 궁에 붙어 있는 벌레 퇴치 완료!’
다 끝나면 말린다도 내보내야지. 좀, 아니, 꽤… 부담스럽다고.
***
황녀궁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황제 가족의 티타임이 열렸다.
전 대륙의 온갖 희귀한 꽃을 모아 둔 황녀궁의 유리온실은 여름이라 꽤나 더웠지만, 루퍼스리안이 참석하자 온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딱 기분 좋게 청량할 정도의 시원함이 온실 안을 채웠다.
그리고 귀한 얼음으로 만든 디저트와 음료들이 테이블을 메운 상태.
당연히 전부 아나트리샤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황제는 직접 각종 베리와 초콜릿 크림, 커스터드 크림을 겹겹이 쌓은 트라이플을 한 스푼 떠서 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자, 리샤. 오늘 본궁의 파티셰가 아주 자신을 하더구나. 네가 저번에 좋아하던 트라이플을 더더욱 맛있게 만들었다고.”
아나트리샤는 자그마한 입을 벌려서 간식을 옴뇸뇸 받아먹었다.
파티셰가 장담한 대로였다. 끝내주는 맛이다.
“마시써!”
그러자 옆에서 월귤 향이 가미된 메리골드 차를 손수 우린 루퍼스리안이 나섰다.
유리잔에 차를 따른 다음, 마력으로 만들어 낸 깨끗한 얼음을 띄운다.
퐁당퐁당.
이건 마력으로 만든 얼음이라 녹지 않으면서 아나트리샤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로 음료를 유지시켰다.
루퍼스리안이 매일같이 훈련한 결과 알아낸 완벽한 비율과 온도였다.
“여기 차도 같이 마셔. 단 것이 많아서 일부러 꿀은 안 넣었어.”
“웅.”
쬽쬽.
“딱 죠아! 시언해!”
빨대로 음료를 마시는 동생을 루퍼스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단란한 황실 일가를 둘러싼 시중인들은 하나같이 부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황제와 황자를 보고 있었다.
‘나도, 나도 황녀님 시중들 줄 아는데!’
‘제가 더 차를 잘 우린다고요, 황자님! 차 우리는 법과 특제 블렌딩 비율을 알려달라고 하신 이유가 설마 이것일 줄이야. 내가 호랑이를 키웠어!’
평화롭고 행복한 티타임은 여느 때처럼 이어질 듯했다.
갑자기 황제의 무릎에서 일어난 아나트리샤가 이렇게 외치기 전까지는.
“아빠. 나 하고 시픈 거 이써여.”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하는 아나트리샤는 그야말로 해맑고 순진한 아이였다.
딱 네 살짜리다운.
요즘 들어 자주 보여 주는 아이다운 모습에, 황제와 황자는 아주 행복했다.
카스톨트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로 딸에게 물었다.
“뭘 하고 싶은데? 뭐든 들어주마.”
루퍼스리안도 희색을 띠며 물었다.
“오빠가 뭐 해 줄까, 리샤? 말만 해!”
아나트리샤는 전생에 보았던 간절한 고양이 눈을 하고서 아빠와 오빠를 보았다.
“리샤, 엄마 방에 가 보고 시퍼요!”
잠시 유리온실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유모 엘제와 시녀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황제와 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동안 이 두 남자 앞에서 황후의 일은 언급 자체가 금기였던 탓이다.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색하던 침묵은 카스톨트 황제의 따사로운 목소리에 깨어졌다.
“그래. 아빠가 먼저 챙겨 줬어야 했는데 미처 못 했구나.”
루퍼스리안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반응을 보였다.
“리샤는 아직 못 가 봤지. 궁금하겠다.”
황자가 어머니의 일이 언급될 때마다 얼마나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었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경악을 삼켰다.
‘역시 황녀님이셔.’
‘황제 폐하와 황자 전하 모두 황녀님 덕분에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셨구나.’
황제는 딸을 안아 들고 아들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제 일가가 모두 모여 황후궁에 방문하다니.
황제가 자식들에게 다시 관심과 애정을 주기 시작한 이후.
언젠가 이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엘제는 감격으로 습기가 도는 눈가를 눌렀다. 셀리나는 함박웃음을 띠고서 주인의 뒤를 따랐다. 모냐 역시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그 시각.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황후의 투왈렛 룸에 있었다.
이 방을 잠가 둔 채, 혼자서 황후의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쳐 보는 건 그녀의 은밀한 취미였다.
근래에 들어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이 비밀스러운 취미를 꽤 자주 즐기고 있었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처음 황후궁이 비고 그녀가 실세가 되었을 때는, 곧 황후 자리가 손에 들어올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황후의 자리는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황제는 다이아몬드처럼 굳건했다. 조금의 여지도 보이지 않았다.
진전이 없는 채로 시간만 흐르자 초조함과 불안감은 더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그 약’을 다시 손에 넣었으니, 기회만 맞으면 된다.
이미 한번 그녀는 성공한 적이 있었다. 벨론드 대공 부부 때문에 그 기회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겼지만.
이번만은 다를 것이다. 달라야 한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사리 사라져 주지 않았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이를 황후의 옷과 장신구를 걸치는 걸로 풀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정말로 황후 자리를 손에 넣은 듯한 도취감을 느낄 수 있었으므로.
일시적인 위안일 뿐이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 역시 내게 더 어울려.”
그녀는 금사와 보라색 자수가 가득 들어간 은색 비단 드레스를 자신의 몸에 대어 보았다.
이건 이젤리아 황후의 웨딩드레스였다.
루스템 황가의 문장과 하스티아 왕가의 문장이 조화롭게 수놓아진 웨딩드레스.
다브네스 후작 부인에게 이 드레스는 소매와 치마 길이는 길고 허리와 가슴의 품은 작았다.
제대로 단추를 채우지 못한 채 어설프게 걸친 꼴은, 누가 보아도 제 것이 아닌 옷을 걸친 우스꽝스러운 광대였다.
어리석은 광대는 드레스에 그치지 않고 황후의 옐로우다이아몬드 보관을 썼다.
이는 대대로 루스템 황실에 내려오는 보물.
보관의 다이아몬드에는 ‘태양의 결정’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보석의 찬란한 광채와 드레스의 화려함에,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거의 묻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욕망에 멀어 있었기에,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더없이 빛나는 황후로 왜곡시키고 있었다.
다브네스 후작 부인은 황홀함에 젖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못 한 소리가 잠긴 투왈렛 룸의 문에서 울렸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