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218)

Level 11. 메인 퀘스트 : 잠자는 관 속의 왕자님 (03)

언젠가 익숙한 얼굴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빠와 함께 만난 사람이 우명 삼촌이었으니까.

나중에 만나 본 삼촌의 가족들 역시 전생의 그 사람들이었기도 했고.

다시 만나게 될 얼굴 중에 이 얼굴이 있을 수도 있다, 는 걸 모르지 않았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와 바닥을 구를 듯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현자 미하일.

거의 최후까지 나와 함께한 최강의 헌터들 중 하나.

그리고.

그리고 인류를, 나를 배반한 배신자.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그 꼴이 뭔가 좀 이상했다.

‘뭐야, 저거?’

***

대륙에 루스템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몇 되지 않는다.

지상에 태양 없이 살 수 있는 생물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드물게 태양의 마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도 존재했다.

저 극북의 땅에 사는 이들이나.

혹은, 태양을 피해 떠도는 허공의 성에 사는 이들이라든가.

나스카의 일족이 바로 후자였다.

그들은 세계에 밤을 불러왔다는 어둠의 용을 조상으로 섬기는 이들이다.

용의 피가 흐르는 일족.

그들은 어둠의 용을 조상으로 가졌다는 전설답게 창백한 피부와 밤보다 검은 머리를 가졌고.

하나같이 달빛을 조각한 듯 아름다운 외모 또한 가졌다 했다.

그들의 특징에 대한 것마저 전설이나 동화처럼 설명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스카 일족이 지독하게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움직이는 도시 하나 크기의 부유성이 그들의 영지였고 나라였다.

이 부유성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고, 낮을 피해 움직였다.

때문에 밤하늘 달 근처, 혹은 샛별 곁에서 보인다는 나스카의 부유성은 대륙 곳곳에서 목격되곤 했다.

‘그 목격담이 근 몇 년간 거의 들리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는데, 무슨 일이 생겼던 모양이군.’

갑작스레 나스카의 일족이 루스템 제국의 황제에게 알현을 청해 왔을 때, 카스톨트는 꽤 놀랐다.

나스카 일족이 외부에 먼저 도움을 청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알현 자리 자체가 아주 기이했다.

과연 소문대로 창백한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진 나스카 일족들은, 아주 소중히 하나의 물체를 가져왔다.

‘관?’

반투명한 유리관을 짊어지고 왔던 것이다. 그것도 어린 소년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분명히 평범한 천 위에 누워 있건만, 순간적으로 꽃에 파묻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미소년이었다.

나스카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노인은 그 관 속에 누운 소년을 이리 소개했다.

“나스카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 미하일 나스카 님이십니다.”

주변에 웅성거림이 번졌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카스톨트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신비로운 일족의 등장이나, 누가 봐도 기이한 공왕의 후계자라는 소년의 상태를 차치하고서라도.

‘아가?’

저 소년이 든 관이 등장한 직후부터, 하나뿐인 딸 아나트리샤의 상태가 이상했다.

옆에 서 있던 아들도 이를 눈치챈 듯 딸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리샤 어디 아파? 열은 없는데.”

그리고 걱정하며 누이의 이마에 손을 대 본다.

그럼에도 아나트리샤는 마치 혼을 빼앗긴 것처럼 한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관 속의 소년에게.

아빠와 오빠가 자신을 걱정하고 말을 거는 것조차 듣지 못하는 것처럼.

카스톨트 황제는 어쩐지 거슬리는 불쾌감을 느끼며 손을 뻗었다.

제 무릎 위에 앉은 딸을 고쳐 안아 다독거리며, 자연스럽게 딸의 시선을 관 속의 소년에게서 돌렸다.

“놀란 모양이구나.”

겨우 열 살 내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관에 누운 모습이다.

어린 딸이 보고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황제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아나트리샤는 순순히 말을 듣지 않았다.

마력으로 제 몸을 다시 돌려 정면으로 앉아서, 공왕의 후계자라는 소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기묘한 불안감과 불쾌감이 카스톨트와 루퍼스리안 부자를 자극했다.

그때였다. 이 불쾌감이 미처 구체화되기 전.

나스카 일행의 수장이 황제에게 간곡히 이번 알현 요청의 이유를 말했다.

“간절히 제국의 도움을 청합니다. 미하일 님을 옭아맨 저주를 정화할 수 있도록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전혀 예상 못 한 요청이었다.

***

나스카 일족의 방문 소식은 빠르게 수도 사교계에 퍼졌다.

특히나 전대미문의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워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공왕의 후계자가 저주를 받았다죠?”

“저는 시체를 들고 왔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죽은 건 아니래요. 듣자 하니, 관이 그 귀한 마력석으로 만든 거라더군요. 마력석과 마법으로 간신히 목숨을 붙여 놓고 있다나 봐요.”

“세상에. 그런데 왜 왕자의 저주를 우리 제국에 풀어 달라고 왔을까요?”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소문은 빠르게 번졌다.

마침내 올봄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영애들의 화사한 입술에까지 이 화제가 올라왔다.

이 화제의 끝은 늘 하나로 귀결되었다.

“왜 하필이면 나스카 같은 폐쇄적인 이들이 제국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을까?”

놀랍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세실리아 벨론드의 입에서 나왔다.

화려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파티의 중심에 활짝 핀 꽃처럼 앉은 세실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알 것 같네요.”

그러자 영애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세실리아 대공녀에게 닿았다.

“대체 뭘까요? 말씀해 주세요.”

“궁금해요! 우리 부모님도 얼마나 궁금해하셨는지 몰라요!”

세실리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주변인들의 찬사와 감탄, 관심과 집중은 그녀를 꽃 피게 하는 양분이었으니까.

“우리 루스템의 황족들 중 핏줄이 짙은 이들은 태양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죠.”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루스템 제국이 번성하는 것이고, 제국 황족들이 대우받으므로.

“태양신의 축복을 받은 마력은 대부분 불꽃 혹은 빛의 속성을 가지게 되지만……, 역대 황족의 마력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속성이 있답니다.”

“그게 뭔가요?”

황족이 타고나는 마력의 속성까지는 세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세실리아는 으스대며 그 시선을 잠시 즐기다가 겨우 대답을 내주었다.

“바로 정화예요.”

한 박식한 영애가 맞장구를 쳤다.

“아! 하긴 태양은 모든 삿되고 악한 것들을 물리치는 힘을 가졌으니까요.”

그제야 왜 나스카 일족이 왕자를 황제에게 데려왔는지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황족이 가진 정화의 힘에 기대려 한 것이다.

답을 듣고 나자 다들 근질근질한 상태였다. 이 놀라운 정보를 빨리 주변에 먼저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리가 파하려면 멀었다.

개최자인 세실리아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실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스카 일족도, 왕자도 가엽네요.”

“네? 어째서인가요?”

“제가 알기로 폐하의 마력은 정화의 속성을 가지지 못하셨거든요. 물론 황자님이나 황녀님도요.”

어딘지 모르게 미묘하게 들리는 어투였다.

교묘하게 황제 일가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

동시에 묘한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눈치 빠른 영애들은 경악의 말을 겨우 삼켰다.

‘설마.’

그때였다. 세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명에 따라 한 시간 넘게 우산을 들어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던 소녀에게.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하녀에게도 시키지 않았다. 나무에 차일을 드리우거나 가제보로 가면 될 테니까.

그런데 명문 에아루스 후작가의 영애에게 부러 이런 일을 시키는 건 명백한 과시였다.

세실리아가 에아루스 후작가를 손에 쥐고 있다는 과시.

“에아루스 영애. 이리 와 보세요.”

아멘다 에아루스는 잠시 멈칫했지만, 세실리아의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세실리아는 동정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오늘도 다리가 불편해 보이네요. 가련하게.”

아멘다의 다리 상태는 사교계에서 아주 유명했다.

그녀가 약 3년 전 끔찍한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비극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아멘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몸에 평생 가는 장애를 얻고 말았다.

“치마를 걷어서 다리 상태를 보여 줘요.”

너무나도 무례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아멘다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아멘다의 바들거리는 손이 애써 치마를 들어 올렸고.

보라색과 회색이 뒤얽혀 기괴한 돌처럼 굳은 그녀의 다리가 드러났다.

“세, 세상에! 소문대로 석화의 저주가 남은 거군요.”

“징그러워. 어떡해…….”

“난 저러면 죽어 버릴 거야.”

누군가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소리에 다들 숨을 삼켰다.

치욕을 이기지 못한 아멘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 세실리아가 아멘다의 다리를 향해 고운 손을 뻗었다. 그녀의 흰 손끝에서 주황색의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멘다의 다리를 절반 이상 점령하고 있던 저주의 흔적에 닿았다.

그러자, 아주 조금, 겨우 손톱만큼의 면적이지만 분명히 석화된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경악이 사방으로 내달렸다.

“설마, 대공녀님께서 정화의 마력을 지니신 건가요?”

마력을 거둔 세실리아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보았다.

세실리아 대공녀가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정화하는 걸.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세실리아는 핑계를 대며 파티를 예정보다 일찍 끝냈다.

“아, 마력을 많이 썼더니 피곤하군요. 오늘은 일찍 자리를 파하기로 해요. 부축해 줘요, 에아루스 영애.”

아멘다의 부축을 받아 사라지는 세실리아의 뒷모습을 보고, 파티에 모인 영애들은 곧 깨달았다.

세실리아는 그들에게 행동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이 소식을 널리 알리라고.

***

쥐 죽은 듯 고요한 밤.

나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내려다보았다.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관 속에 잠든 소년, 미하일을.

곱게 포장할 만큼 예쁘게 생긴 얼굴이긴 했다. 전생에도 지금도.

낮은 투덜거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컨셉이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이야, 백설 왕자야? 둘 중 하나만 할 것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