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1. 메인 퀘스트 : 잠자는 관 속의 왕자님 (04)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외국의 손님이 오면 묵도록 되어 있는 하카만 별궁이었다.
외국 사절단을 위한 별궁은 여러 곳이 있지만, 그중 가장 본궁에서 먼 곳이다.
‘그러고 보면 아빠가 여기로 콕 집어서 보냈지. 이유가 뭘까?’
아빠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 태도였다.
“안타까운 사정이지만, 현재 루스템의 황족 중에 정화의 힘을 가졌다 알려진 이는 없다.”
“그, 그런…….”
“바로 그대들의 영지로 돌아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왕자에게도 나을 것 같군.”
거의 쫓아내고 싶어 한다고 오해할 수 있을 정도의 태도.
오빠도 옆에서 거들었다.
“아바마마의 말씀이 적절하십니다. 하루빨리 다른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길 빌겠소. 돌아가는 길은 평안하길.”
‘거의 빨리 꺼지라는 느낌…… 이었는데.’
다른 신하들이 난감해하며 말려서, 바로 쫓아내는 건 피할 수 있었다.
거의 교류가 없던 나스카가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건, 이 자체가 분명 제국의 위신을 올리는 일이니까.
무엇보다, 나스카 일족이 거의 빌다시피 해서였다.
“그렇다면 잠시라도 제국에 머물며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국의 수도에 가까이 올수록 우리 왕자님의 상태가 나아지셨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건 모두의 예상외였다.
내가 수업 시간에 배운 나스카 일족의 특징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아주 아주 오만하고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니까.’
용혈을 이은 마지막 후예라는 자부심과 선민사상에 가득 찬 이들이라고 했다.
‘오만한 검은 용의 후예라……, 그 녀석의 환생답네.’
전생에도 대현자 미하일은 유일하게 드래곤을 서번트로 부렸으니까.
그리고 그의 몸을 매개로 마왕이 강림하자, 드래곤은 그대로 마룡으로 화해 사람을 잡아먹고 땅과 물을 오염시켰다.
나는 한쪽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궁예> 스킬을 쓰기 위해서였지만 날 보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윙크하는 건 아주 이상한 기분이었다.
[대상의 정보를 분석 중…….]
[System Error! System Error! System Error! System Error……!]
[출력 가능한 정보만을 표시합니다.]
[이름: 미하일 나스카(※≒£ ¥■▩).]
[^&*▩◀€…….]
“…….”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였다. 이름 외에 제대로 뜨는 정보가 없었다.
평소에도 툭하면 에러가 뜨는 시스템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하지만 눈앞의 이 소년이 ‘그 미하일’의 환생체임은 분명했다.
다 깨져 있긴 하지만, 이름 뒤에 ‘( )’표시가 있는 것도 증거다.
저 표시는 전생에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의 이전 이름을 알려 줄 때만 쓰이니까.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 미하일은 아우라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육체.
아마도 나스카 일족은 온 힘을 다해 마력을 부어 넣어 가며 미하일의 목숨줄을 붙여 놓고 있는 것이리라.
이 상태를 저주라고 부르는 건 정확한 설명은 아니지만, 그렇게 믿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깎아 놓은 듯 하얗고 예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반투명한 마력석 관이 시야를 방해하는 게 거슬렸다.
뚜껑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이인 미하일의 얼굴.
전생에 우리는 10대 후반이 되어서야 만났으니까.
그때 난 어린 나이에도 S급 헌터로서 국경을 넘어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는 국가에 소속되지 않은 채 홀로 움직였다.
몇 번인가 함께 작전을 함께했고. 사선을 넘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믿을 수 있는 동료라고 생각했다.
“날 믿고 기다려 줘, 서나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배신당했다.
그 대가로 하나 남은 가족이었던 오빠를 잃었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까지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누구도 듣지 못한 나 혼자만의 맹세였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강렬한 의지.
‘죽이겠어.’
이상할 정도로 나를 위하는 고장 난 시스템 역시 이를 지지했다.
이 퀘스트 내용이 증거였다.
[퀘스트 명 : ‘절대적인 맹세’]
[설명: 부디 네 결심이 변치 않기를.]
[완료 조건 : 배반자 배제]
[보상 : ^%&$$$#]
시스템은 나에게 재촉하고 있었다.
어서, 그를 죽이라고.
나를 또 배신하기 전에. 이번에도 마왕을 세상에 불러올 매개체가 되기 전에.
겨우 얻은 두 번째 생을 지키고 싶으면.
“…….”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강렬한 마력이 손끝에 맺혀 금빛의 칼날을 만들었다.
여전히 밤은 모든 걸 감출 것처럼 고요했고, 미하일은 조각상처럼 잠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침실로 다시 숨어들어 가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카만 별궁으로 침투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지만 전혀 들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지만, 결국 한숨도 못 잤다.
그래서 결국 아침에 아빠와 오빠의 오버액션을 막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리샤! 무슨 일이야? 눈 밑이 까매! 설마, 잠 못 잔 거야?”
“역시 어제 흉한 꼴을 보여 준 나스카 놈들 때문인 게 틀림없어! 놈들을 어서 빨리 내쳐야겠다!”
“리샤를 충격받게 했으니 그냥 쫓아내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합니다!”
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급발진 중인 바보 부자였다.
이대로 놔뒀다간 진짜 나스카 일족을 내쫓니 벌 주니 하고 오버할 거 같았다.
‘어째 트집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설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아빠랑 오빠는 테두리 밖의 사람에게 관심이 크게 없는 타입이니까.
그냥 언제나처럼 나를 과보호하는 거겠지.
이 두 사람의 급발진을 막는 건 아주 쉬웠다.
나는 필살기, 어리광을 부렸다!
“으으. 리샤 피곤해! 오늘 하루 종일 누가 안아 줬으면 좋겠어!”
그러자 아빠와 오빠의 급발진 에너지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안아 주겠다!”
“아냐, 리샤! 오빠가 매일매일 안고 다닐게! 제발 그러게 해 줘!”
두 사람은 늘 그렇듯 경쟁이 붙었고.
결국 오빠가 먼저 하루의 절반, 아빠가 나머지 절반 동안 나를 안고 다니기로 했다.
‘좋아. 화제 돌리기 성공이다.’
백설 왕자인지 잠자는 숲속의 왕자인지 모를 상태인 미하일이 갑자기 튀어나왔어도.
내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아빠와 오빠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고. 일상은 조금도 어그러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잠시 선택을 미뤄 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래. 아직은…….’
나는 어젯밤 하카만 궁에서 미하일을 바로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
사실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마력으로 만든 칼날을 내리치기만 하면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이다.
미하일은 저항은커녕 의식조차 없었고, 육체 또한 마력 한 줌조차 없이 허약했으니까.
“…….”
그런데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이미 한 번 한 일인데.
마왕이 된 그의 목을, 내 손으로 직접 쳤으니까.
그 보상으로 두 번째 생을 얻었다. 가족들을 되찾았다.
지금 그를 다시 죽이는 것으로 이 두 번째 생을 지킬 수 있다면,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문득 과거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언젠가 동료 중 절반이 죽어 나간 전투에서,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였다.
그는 마지막 남은 마력을 다 짜내어 적에게 달려들어 움직임을 막았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어서. 망설이지 말고.”
적을 붙잡고 있는 자기 자신까지 함께 꿰뚫으라는 소리였다.
그는 그다지 처절해 보이지도, 큰 희생을 결심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지극히 무덤덤하게, 이성적으로 이것이 가장 나은 판단이라고 주장하는 듯했다.
평소의 실없는 농담이나 꾸며 낸 장난기는 전혀 없이.
저게 진짜 본인의 성격이고, 진심이라는 것처럼.
너무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바람과는 전혀 반대로 행동했다.
“입 닥쳐!”
적을 죽이고 미하일은 구해 냈다. 만신창이긴 했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채로.
‘그리고 한 대 야무지게 패 줬지.’
그 녀석은 얻어맞고 기절해서 나에게 질질 끌려갔었다.
‘왜, 왜 하필 그때 기억이 지금…….’
마치 나를 재촉하는 것처럼 시스템이 메시지를 띄웠다.
[완료해야 하는 퀘스트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때 덤덤한 얼굴로 자신도 함께 꿰뚫으라 했던 미하일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다른데도.
하지만 나는 결국 그를 향해 칼날을 내려치지 못했다.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결심한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그, 그래도 결심한 거 하나는 지켰는걸.’
너무 곱게 잠들어 있어서 화가 날 정도인 그 녀석에게 꿀밤을 먹여 줬다.
다시 만나면 일단 한 대 때려 주겠다던 맹세는 지킨 셈이었다.
***
아나트리샤가 한참을 망설이다 돌아간 직후.
반짝. 영원히 열리지 않을 듯하던 소년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조금 전까지 소녀가 서 있던 자리를 향했다.
알아볼 수 있었다. 절대로 못 알아볼 수 없었다.
한 번의 생을 넘어서라도.
조각난 영혼으로도.
절대 한 사람만은 못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니, 그렇기에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한탄했다.
“어째서…, 서나야…….”
떨리는 메마른 손가락이 조금 전 소녀의 손이 닿았던 이마를 애달프게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