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1. 메인 퀘스트 : 잠자는 관 속의 왕자님 (05)
***
아빠와 오빠는 내 어리광을 핑계로 매일같이 나를 안고 다니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잠깐 어울려 주고 싫다고 했을 텐데, 다음 날까지 안겨 다니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바로 미하일을 못 죽인 게 조금 찔려서…는, 맞았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번엔 꼭 죽일 거라고 결심했었는데 말이다.
‘아니, 잠깐 미뤄 둔 거뿐이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저항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당장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변명을 하면서도 어째선지 조금 양심에 찔렸다.
그래서 그냥 아빠 오빠에게 안겨 다니고 있었다.
편하기도 하고, 아빠랑 오빠가 워낙에 좋아하니까.
지금은 오빠의 차례였다. 아빠가 공무로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오빠에게 안겨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데, 의외의 방문자가 있었다.
“파셀 백작께서 막내 도련님과 함께 알현 요청을 하셨습니다.”
“피오나 이모가?”
피오나 이모는 우명 삼촌의 부인, 즉, 세영 이모의 이번 생 이름이다.
세영 이모는 엄마의 친구이기도 해서, 이모라는 호칭이 입에 익었다.
이 세계에서도 ‘이모’는 엄마의 자매에게 쓰는 호칭이니, 그저 친황제파 귀족일 뿐인 피오나에게 쓰기는 애매했다. 하지만 내가 이모라면 이모인 거다.
“피오나 이모는 이모야!”
-라고 내가 마구 우겨댔고, 내 억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전생에 이모는 나를 아주 예뻐했었고, 이번 생에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우리 귀여운 서나! 우쭈쭈. 언니, 서나 나 줘! 나도, 나도 귀여운 딸……!”
“어딜, 내 딸을!”
“악! 적당히! 적당히 해! 언니! 나 죽겠어!”
맨날 엄마한테 나 달라고 떼를 쓰다가 등짝을 맞는다든가.
“서나야. 이모가 만든 레몬 파이 맛있지? 이모랑 이모 집 가면 매일매일 이렇게 맛있는 걸 먹여 줄……!”
“서나야. 아빠가 맛있는 거 준다는 사람 절대 따라가지 말라고 했지? 그렇게 꼬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
“나아뿐 사람!”
“커흑! 너무 해요, 형부!”
먹을 거로 어린 날 꼬드기려 하다가 아빠한테 혼나곤 했었지.
…이모를 볼 때면, 그리고 이모를 이모라고 부를 때에는, 엄마와의 추억이 떠올라 절로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래서 지금도 밀어붙이듯 일부러 이모라고 부르고 있었다.
특히, 이모 특제 간식들은 다 맛있었다.
“습.”
절대 그래서 침을 흘릴 뻔한 건 아니다. 절대.
마침 곧 수업이 끝나려는 참이라, 곧 이모를 응접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오빠에게 안긴 채였다.
전생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우아하고 품위 넘치는 태도로, 피오나(세영) 이모가 들어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렸는데도 알현을 허락해 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이모의 풍성한 비단 치마 뒤쪽에서 귀여운 꼬마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겨우 서너 살 되어 보이는 꼬맹이는 댕글댕글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확! 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는 이모의 치맛자락 뒤로 다시 쏙 숨어 버렸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흐물흐물 풀렸다.
‘아, 귀여워라.’
“황녀님께 인사 올리렴, 피비. 엄마가 예의를 가르쳐줬지?”
이모의 재촉에 꼬맹이는 쭈뼛쭈뼛하다가 겨우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어설프게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중간에 좀 비틀거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어른 흉내를 잘 냈다.
“피비가 항녀님께 인샤 올림미댜.”
저번에는 인사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었는데. 그새 많이 컸네.
“안녕, 피오나 이모. 안녕, 피비.”
***
피비. 즉, 파비엘 파셀은 광휘 기사단장 기드온과 파셀 백작 피오나 사이의 막내아들이었다.
기드온 단장과 파셀 백작의 금슬은 아주 유명했다.
결혼 직후 무려 연년생으로 세 아들을 얻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 황녀의 귀여움을 보고 새삼 딸에 대한 미련을 되살린 부부는, 네 번째 시도를 했고.
장렬한 실패를 맞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물이 바로 파셀 백작가의 넷째 파비엘이었다.
기드온이 황제의 측근이고, 피오나가 워낙 황녀를 귀여워하다 보니 파비엘은 어린 나이부터 황궁에 자주 드나들었다.
덕분에 올해 일곱 살인 황녀는 파비엘을 꽤 좋아했다.
“꺄아! 애기 귀여워! 볼이 빵실빵실해!”
주변에 아나트리샤보다 어린 아이가 파비엘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비엘은 한눈에도 천사처럼 귀여운 소년이었으니까.
아나트리샤가 오랜만에 보는 동생을 맘껏 귀여워하는 동안.
그녀가 파비엘을 보는 시선보다 더욱 강렬한 시선이 아나트리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들 황녀궁을 화덕 위 초콜릿처럼 녹여 버릴 듯 따스한 눈으로 황녀를 보고 있었다.
‘오구오구. 어린 동생이 귀여우세요. 우리 황녀님.’
‘황녀님도 아직 아기인데, 자기는 다 큰 것처럼 구시는 게…… 더 귀엽다는 건 모르시겠지!’
‘그것까지 귀여워엇!’
‘애기가 애기를 귀여워하다니, 귀여움이 두 배! 아니, 세 배! 네 배!’
그리고 그중 가장 상태가 심각한 건 다름 아닌 피오나였다.
“아아.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이건 범죄적이야.”
피오나는 아나트리샤의 지나친 귀여움에 강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코피가 흐르려는 걸 막았다.
아나트리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이모는 전생에부터 저랬는걸 뭐.’
“하아아. 황녀님이 이렇게 피비를 귀여워하시다니, 제가 네 번째 시도를 한 보람이……, 아니, 이게 아니지.”
그리고 사심 200%의 눈으로 황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동생이 귀엽죠, 황녀니임.”
“응!”
피오나는 막내아들을 아나트리샤의 품에 안겨 주며 속삭였다. 파비엘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통통한 볼이 발그레했다.
“백작저에 오시면 말이죠. 귀여운 동생도 있고, 바보 같지만 허우대는 멀쩡하고 말은 잘 듣는 오빠도 셋이나 있답니다.”
그때였다.
내내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던 루퍼스리안이 특정 키워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오빠라니, 파셀 백작! 리샤의 오빠는 나 하나뿐이야! 하나로 충분해! 감히 다른 놈이 리샤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조금만 더 화가 나면 태양석까지 빛나게 할 기세였다.
루퍼스리안의 분노는 여동생이 다시 자신의 품 안에 폭 안길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결국 오늘도 피오나의 사심 어린 유혹(?)은 루퍼스리안의 열성적인 가드에 실패하고 말았다.
“쳇.”
***
피오나 이모가 챙겨 온 달콤한 간식들이 테이블 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지고.
나는 레몬 머랭 파이와 샹티 크림을 듬뿍 얹은 초콜릿 타르트를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물었다.
“근데 무슨 일로 온 거야, 피오나 이모?”
“하으으. 통통해진 볼이 햄스터 같아요, 황녀님. 여기, 이 사과 퍼지도 드셔 보세요. 제 역작이랍니다.”
“알았어. 냠. …마시써!”
입 한가득 사탕을 물었더니 발음이 샜다.
으으. 일곱 살이나 되어서까지. 그런데 이모는 엄청나게 좋아했다.
오빠나 시녀 언니들도 함박웃음을 짓는다.
왜들 저러나 몰라. 네 살짜리 진짜 아기인 피비가 훨씬 귀여운데 말이다.
피오나 이모는 다시 실신 직전이었다.
“흐아아. 따뜻해. 몽실몽실해. 말랑말랑……, 진짜 아들이랑은 다르구나. 역시 다섯 번째 시도를 해 볼……. 아, 이게 아니지.”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끄집어냈다.
황녀궁 방문으로부터 무려 두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해서 전해드리려고요.”
“소문?”
“벨론드 대공녀가 예정보다 이르게 사교계에 데뷔한 건 알고 계시죠?”
나는 고개를 꾸닥꾸닥했다. 그러다가 실수로 뺨이랑 입가에 케이크 크림이 묻어 버렸다.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오빠가 손수건으로 입가의 크림을 닦아 주면서, 대신 말을 받았다.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지만, 세실리아 따위는 우리 리샤 앞에서는 태양 앞의 반딧불이도 못 돼.”
오빠가 코웃음을 치자 피오나 이모도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히 그렇죠. 그런데 얼마 전에 에아루스 후작 영애가 대공녀의 시녀가 되었다는 소문도 이미 들으셨죠?”
“응.”
에아루스 후작가는 전통적으로 황실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가문이라 했다.
개국 공신 가문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고, 아빠가 말하시는 걸 들었다.
며칠 안 된 일이라 아직 구체적으로 대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피오나 이모는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대공녀에게 정화의 마력이 있어서라고 해요. 에아루스 영애는 석화의 저주에 걸려 몸이 불편하니까요.”
엘제가 경악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정화의 마력를 가진 황족은 정말로 드물어요. 벌써 200년도 전의 황녀 한 분이 마지막 아닌가요?”
그리고 그 황녀가 바로 7대 전 루스템의 황제, 에셀리아 2세다.
“흠. 정화의 마력을 가졌다는 거 진짤까?”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이 전부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대공녀가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조금이지만 정화하는 걸요.”
저주의 정화.
최근 그걸 아주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세실리아가 자신이 정화의 힘을 가진 걸 밝혔다.
이게 우연일까?
능력이 진짜든 아니든, 의도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타이밍이었다.
나는 단것으로 빵빵해진 뺨을 손으로 괴었다. 폭, 하고 손가락이 말랑말랑한 뺨을 눌렀다.
‘이거 좀 귀찮아질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내 고민은 깊게 이어지지 못했다.
“하으으으! 우리 황녀님 뺨이 마시멜로 같아요!”
결국 주접을 참지 못한 피오나 이모가 나를 꼭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아니, 진짜 애기를 이뻐하라구요! 나는 다 컸어!’
그런데 옆에서 눈을 반짝거리던 꼬맹이 피비가 엄마를 거들었다.
“항녀님, 기여어오!”
그리고 자기 몫의 케이크 위 딸기를 소중하고 수줍게 내밀었다.
“…….”
나는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혀짤배기소리를 못 벗어난 애기한테까지 귀여움 받다니.
흑. 하지만 깜찍하고 착한 애기가 소중한 딸기를 나눠 준 걸 거절할 수는 없었다.
냠냠. 그리고 대신 내 케이크 위의 체리를 꼬마 피비에게 직접 먹여 주었다.
오빠는 옆에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오빠 자리도 동생 자리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데.”
뭐라는 거야, 바보 오빠가.
어쨌든 이날 피오나 이모가 가져온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빠르게 수도를 돌았다.
당연히 별궁에 있는 나스카인들에게도.
며칠 뒤. 나스카 일족이 정식으로 벨론드 대공저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을 때.
나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판을 키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