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218)

Level 11. 메인 퀘스트 : 잠자는 관 속의 왕자님 (06)

***

세실리아가 나스카인들이 보낸 정중한 요청 서한을 받은 건, 세 가족이 함께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대공저를 나가던 때였다.

세실리아는 마차 안에서 서한을 열어 보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보세요, 아버지. 어머니. 나스카 공왕의 후계자가 제게 간절히 요청해 왔어요.”

실제로는 공왕의 후계자가 보낸 것이 아니라 그 수하가 보낸 편지였지만.

세실리아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공왕이 직접 보낸 것처럼 말했다.

‘어차피 공왕의 후계자를 도와달라는 나스카 일족의 요청이니 그게 그거지.’

검은색의 비단 종이에 금색으로 우아하게 쓰인 제국어가 이색적인 서한.

세실리아는 이를 자랑스럽게 부모에게 내보였다.

대공비는 호들갑을 떨며 서한을 받아 들었다.

“세상에! 나스카 공국의 공식적인 요청 서한이라니. 이건 제국 황제 정도가 아니면 받을 수 없는 거지.”

나스카인들은 워낙 폐쇄적이고 오만함으로 이름 높은 이들이라.

그들의 공식 서한은 이번 방문 직전 카스톨트 황제가 받은 것이 몇백 년 사이에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세실리아 대공녀가 받은 것이 두 번째.

“이런 건 황자도 황녀도 못 받은 거야!”

“뭐, 황자도 황녀도 정화의 마력은 가지지 못했으니까요.”

세실리아는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래! 그걸로 에아루스 후작가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장한데, 나스카 공국이라니! 역대 황제들도 하지 못한 일이야. 자랑스러워라, 내 딸!”

루도비카 대공비는 딸을 꽉 끌어안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벨론드 대공이 마침내 대꾸했다.

“이번엔 제법 잘했구나.”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다. 오빠인 아키러스는 지방으로 내쫓길 때까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

“걱정 마세요. 두 분을 실망시키지 않겠어요.”

세실리아는 곱게 웃어 보였다.

“제국의 황위는 반드시 제 것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 서한은 오늘 참석할 파티에서 우연인 척 사람들에게 보여 줄 예정이었다.

황도 전체에 소문이 쫙 퍼지도록 하기 위해.

***

파티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여러 귀족 영애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스카의 공왕이 보낸 서한을 잔뜩 자랑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너무 늦어지기 전에 세실리아 먼저 대공저로 돌아왔다.

파티 자체는 새벽녘까지 계속될 테지만, 미성년들은 밤 열 시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국의 관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공저의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아멘다를 마주한 건, 세실리아 혼자였다.

아멘다는 후작 영애가 아니라 문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초라하게 서서 세실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녀님…….”

“늦은 시간이니 들어가요.”

세실리아는 귀찮다는 듯 아멘다를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아멘다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절룩거리며 세실리아를 따라갔다.

“나스카인들이 공녀님께 도움을 요청했다고 들었어요.”

세실리아는 사납게 아멘다를 노려보았다.

“그냥 나스카인이 아니라 나스카 공왕의 후계자가 요청한 거예요. 내 시녀라면 당연히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나요?”

아멘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으니 그만 물러가요. 오늘은 내가 특별히 쉬게 해 준 거 알죠? 내일은 다시 내 시중을 들어야 하잖아요?”

보통 귀족의 시녀들은 일주일에 삼사일 정도씩 돌아가며 시중을 들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아멘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시중을 들게 했다. 오늘은 거동이 힘들 만큼 몸이 안 좋아 어쩔 수 없이 쉬는 걸 허락해 준 것이다.

세실리아가 아멘다를 혹사시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주변에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본인의 만족감을 위해.

몸이 불편한 아멘다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세실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건 없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아멘다를 홀대할 만큼.

‘어차피 아쉬운 건 너잖아.’

늘 아멘다는 세실리아 앞에서 절절매곤 했다. 한마디도 절대 거역하지 못했다.

세실리아가 아니면 아멘다를 평생 괴롭힐 저주를 해결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나스카 공왕의 요청을, 받아들이실 생각인가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저들이 하도 절실하게 요청하니.”

물론 바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몇 번이나 대답을 미루고 애타게 한 다음에야 답을 주리라.

‘그래야 내 능력의 가치가 더 올라갈 테니까.’

아멘다는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대공녀님. 제발, 제게 조금이라도 더 정화를 베풀어 주시면 안 될까요?”

세실리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너무, 너무 아파요. 제발….”

“내가 나스카 공왕의 후계자에게 정화력을 나누어 주면, 당신에게 줄 게 줄어들까 봐 그래요?”

“그건, 그렇지 않……!”

탁!

세실리아는 변명도 듣지 않고 아멘다를 쳐 냈다.

다리가 불편한 아멘다는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치마가 들추어지며 석화의 저주가 선명한 다리가 드러났다.

세실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멘다의 다리를 툭툭 쳤다.

“내가 따로 요청하지 않는 한 이 흉한 것, 내 눈앞에 보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멘다는 끙끙거리며 치마로 다리를 덮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세실리아의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감히 정화의 힘을 독점하려고 하다니. 이기적이군요, 영애는.”

“아니, 아니에요.”

“나는 이기적인 사람은 안 좋아해요. 영애가 지금처럼 굴면, 계속 시녀 자리에 놔둬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세실리아는 아멘다를 조롱하면서 협박했다.

‘얌전히 굴지 않으면, 너는 평생 그대로 살게 될 거야.’

아멘다는 세실리아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녀를 괴롭혀 온 저주를 아주 조금이라도 덜어 준 건 세실리아뿐이었으니까.

정화의 빛이 다리에 닿았을 때, 고통이 줄어들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은 몇 년 만에 겨우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제발 저를 내치지 말아 주세요.”

“좋아요. 용서해 주죠.”

세실리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대공저로 들어갔다.

“내일은 하루 종일 시중을 들어야 할 테니, 빨리 가서 쉬어요. 또 오늘처럼 쓰러져서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아멘다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세실리아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가혹할까.

세실리아가 아멘다에게 정화를 사용해 준 건 딱 두 번뿐이었다.

‘시녀가 되면 저주를 풀어 주겠다고 했었으면서!’

때문에 에아루스 후작가와 황가가 맺었던 맹약마저 잠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정화를 이용해 아멘다를 좋을 대로 이용만 할 뿐이었다.

지독한 예감이 들었다.

‘대공녀는 앞으로도 절대 내 저주를 풀어 주지 않을 거야.’

아멘다를 계속 협박할 수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완전한 저주 정화가 가능해도 하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아멘다가 절룩거리며 돌아간 자리에는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

“…….”

[아이템 ‘인비저블 아이’ 부작용 발생!]

이번엔 안구 건조증이 아니라, 비문증이었다.

눈앞에 날 파리 같은 것들이 벌떼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아, 정신 사나워.

그냥 부작용 끝날 때까지 눈을 감고 있자.

굳이 눈 뜨고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나는 엄청나게 놀란 상태였다. 그리고 분노한 상태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

이유는 간단했다.

익숙한 얼굴을 전혀 예상 못 한 타이밍에 봤기 때문이다.

분명히 에아루스 영애라 불린 소녀는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열음이 언니가 왜 여기서 나와?!’

무열음.

전 세계에서 유일한 S급 대장장이이자 연금술사였던 헌터.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 명의 헌터가 두 직업을 동시에 가지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마왕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내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에는 저 언니의 공이 컸다.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무기 ‘아스트라’를 저 언니가 개발했으니까.’

헌터가 강해지면 그만큼 더 강해지는 특수 무기.

이 무기는 주인이 강할수록 위력이 뛰어난 무기였고, 주인의 마력이 남은 한 무기가 부서지는 일도 없었다.

나도 오빠도 열음 언니의 무기 덕분에 목숨을 구한 적이 많았다.

헌터 협회까지 숨어들어 와 있던 사교도의 암살자 손에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열음 언니는 두 번째 생에서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언니가 콩나물 대가리의 동생 옆에 있었다.

‘게다가! 저 당근 꼬다리가 언니를 괴롭히고 있잖아!’

언니를 구해 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거로는 모자랐다.

열음 언니를 비웃고 협박하며 재수 없게 웃던 당근 머리의 표정이 생각나자, 화딱지가 나서 견디기 힘들었다.

‘넌 절대 그냥 안 둔다, 당근 꼬다리!’

내 결심에 반응하듯,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발생!]

[퀘스트 명: ‘쭉정이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라’]

[완료 조건: 세실리아 벨론드의 평판 추락, 아멘다 에아루스의 저주 정화]

다시 눈을 떴을 때 인비저블 아이의 부작용은 끝나 있었다.

인비저블 아이로 감시할 수 있는 장소는 내가 육안으로 본 곳뿐이다.

그리고 벨론드 대공저는 입구 근처를 스쳐가듯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딱 그곳에서 세실리아가 열음 언니에게 하는 짓을 봐 버렸다.

‘당근 꼬다리의 움직임이 심상찮아서 감시한 건데, 열음 언니까지 걸릴 줄이야.’

두 사람의 대화가 마침 내가 봐둔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 다행이었다.

조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전생에 인연이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난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환생한 직후부터 근처에 있었던 우리 가족과 몇몇 사람들 외에는 아직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얼마 안 되는 시간 차이를 두고 두 명이나 더 내 눈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전생에도 현생에도 아주 중요한 사람들을 말이다.

오늘은 열음 언니.

그리고 며칠 전에는…….

“…….”

뭔가 중요하고 피할 수 없는 흐름이 시작된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뭐든 절대 휩쓸리지 않을 거야. 내가 앞장서서 헤쳐 나가겠어!’

어쨌든 당근 꼬다리의 의도는 명백했다.

희귀한 정화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겠다는 것.

이미 에아루스 후작가를 손에 넣었고.

나스카 공왕의 후계자까지 세실리아 덕분에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세실리아의 주가는 단번에 뛰어오를 거다.

당연히 그걸 노리고 나스카 일족 이야기가 돌자, 지금껏 숨겨 왔던 자신의 정화 능력을 보인 것일 테고.

안 그래도 이미 나스카 일족은 세실리아에게 도움 요청을 한 상태였다.

‘당연히 응하겠지.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선보이려고 할 거고.’

여전히 곱게 포장된 왕자님은 별궁에서 쿨쿨 자는 중이었다.

세실리아 덕분에 ‘그 녀석’이 깨어 나는 상황을 상상해 봤다.

아주,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사악한 미소가 내 입가에 걸렸다.

“인벤토리.”

손을 펼쳤다.

그러자, 내 작은 손 안에 투명한 유리병 하나가 톡 떨어졌다.

인벤토리에 쓸데없이 많이 쌓여 있는 것 중 하나다.

‘이게 이렇게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는데.’

시스템 메시지는 아이템 이름을 선명하게 비춰 주었다.

[‘저주 정화 포션’(D급)]

계획 변경.

판을 더더더 키워야겠다.

나는 본궁으로 달려갔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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