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1)
나는 조금 전 함께 입장을 시작하기 전 아빠의 태도와 말을 떠올렸다.
아빠는 나를 꼬옥 안은 채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정말, 정말로 아빠가 안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니?”
“안 된다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아빠는 우리 애기를 안고 입장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다리가 떨리는 병에 걸려 있는데…….”
“아빠.”
“응?”
“거짓말하면 나쁜 어른! 리샤는?”
“……나쁜 어른은 싫어합니다. 하지만 아빠가 우리 애기를 꼭 안고 입장하지 않으면 슬픈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란다.”
이건 진심 맞았다. 아빠의 아우라가 증명하고 있었다.
아빠의 어깨가 시든 샐러드처럼 축 처졌다.
그렇다. 우리의 입장이 평소와 다른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그렇게 우겨서지!’
아빠가 거절당하자, 옆에서 오빠가 기회를 노렸다.
“리샤! 그러면 오빠가 안고 들어가는 건 괜찮지 않아? 아빠랑 떨어져서 가면 되는 거니까!”
“큭. 치사하구나, 루퍼스.”
“아빠한테 배운 거예요.”
“안 돼!”
“히잉.”
내 거부에 오빠가 열두 살이나 먹은 것도 잊고서 귀엽고 불쌍한 척을 했지만, 하나도 안 통했다.
‘오빠 놈의 불쌍한 척 귀여운 척이라니, 턱도 없는 짓을…….’
나는 단호박을 먹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나랑 오빠가 먼저 입장하고 아빠가 따로 입장하려 했었다.
‘그게 원래 황실 예법에도 맞고 말이지.’
하지만 아빠가 극렬하게 반대해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아빠는 우리 애기들에게 분리 불안이 있어요!”
“애기…, 들?”
오빠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왜. 열두 살이면 애기 맞지, 뭐. 나만 애기 취급 당할 수 없다. 아빠 아들도 애기, 땅땅!
“알았어요! 그러면 애기들은 좀 떨어져서 뒤따라 들어갈게요!”
오빠는 떨떠름했고, 나는 울망거리는 아빠의 눈빛에 결국 지고 말았다.
‘근데 갈수록 아빠 말투가 점점 나잇값 못… 아니, 회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착각일 거다.
전생의 당당한 S급 헌터이자, 현생에는 무려 제국 황제씩이나 하는 분 아닌가.
여하튼, 이런 사정을 당근 꼬다리나 그레이트 홀에 모인 귀족들이 알 리 없다.
당연히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가 알려 주는 사람들의 속내는 이러했다.
[귀족 A : ‘공식 석상에서 따로 입장하시는 건 거의 3년 만에 처음 아닌가?’]
[귀족 B : ‘정말로 황제 폐하께서 대공녀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나 보군.’]
[귀족 C : ‘이러다 대공녀가 정화 능력을 증명하면 판세가 바뀌는 거 아닌가?’]
[귀족 D : ‘진작 줄을 갈아탔어야 하나?’]
당연히 제일 가관인 건 당근 꼬다리의 생각이었다.
[세실리아 : ‘그래, 나는 저 백치 반푼이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른 황녀가 될 테니까. 진정한 황녀가 말이야.’]
얼씨구.
당근 꼬다리는 김치 착즙 주스를 아주 원샷 중이었다.
‘아, 이 생각하니까 김치 먹고 싶다.’
환생하고 나서 전생이랑 비교해서 아쉬운 게 몇 개 있는데, 대표적으로 김치였다.
‘여기 음식 너무 느끼해.’
영혼 깊숙이 새겨진 한국인의 입맛은, 환생 5년 정도로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운 건 김치만이 아니었다.
‘떡볶이…, 치킨…….’
나중에 어떻게 이 입맛 향수(?)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아, 있다가 아껴 둔 쑥쑥 포션 동치미 맛, 조금만 먹어야지.’
그렇다. 온갖 맛이 나는 포션에는 당연히 김치 맛도 있었다.
불행히도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것 중에 떡볶이나 치킨 맛은 없었다.
물론 있었어도, 포션으로 마시면 그 맛이 그 맛이 아니게 될 테니 더 아쉬웠겠지만.
그래서 쑥쑥 포션을 먹다가 동치미 맛을 발견했을 때, 나는 환호했다.
약 1년 전이었다.
“유레카!”
동치미 맛 포션은 인벤토리 가장 안쪽에 고이 모셔 두었다.
그리고 정 못 참을 때마다 한 입씩 마셔 왔다.
오늘, 좀 마셔야지. 이따가.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이걸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심각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아빠의 뒤를 따랐다.
사실 이번에 따로 입장하겠다고 한 이유 중에는 이것도 있었다.
‘나도 걸을 줄 알아! 멋지게 잘 걷는다구!’
아빠와 오빠의 과보호 덕분에 나는 다리 쓰는 법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더 일부러 내 발로 걷겠다고 한 거다.
물론, 오빠의 손을 잡은 채.
나를 안고 입장하는 데에 실패한 오빠가 이것만은 양보 못 했기 때문이다.
안 어울리게 진지하게 화를 내려고 했다.
“리샤가 에스코트도 없이 들어가는 건 절대 안 돼!”
“그건 아빠도 같은 생각이란다. 아무리 우리 애기가 계획이 다 있어서라지만, 그래도 에스코트도 없이 들어가면 안 되지.”
“…….”
아빠와 오빠의 합동 공격에, 나는 결국 질 수밖에 없었다.
***
미하일을 대신해 나스카 일족을 이끄는 우두머리, 로겐은 황제 일가의 입장 장면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이미 황제와 황자, 황녀와 안면이 있었다.
그러니 딱히 더 놀랄 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정말…, 정말로…… 귀여우신 분이시군.’
절로 입가에 할아버지 미소가 지어졌다.
나스카 일족에는 어린아이가 거의 없었다.
전대 공왕이 소멸 직전에 낳은 아직 어린 왕자 미하일이, 수백 년 사이 나스카에서 태어난 유일한 어린아이였다.
때문에 일족은 더더욱 미하일을 소중히 여겼다.
미하일은 그들 일족의 머리이자 심장이었고.
유일한 희망이자 미래였으므로.
로겐은 잠시 미하일에 대한 걱정도 잊고서 옥좌를 향해 총총히 걸어가는 아나트리샤 황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붉은색이 도는 금빛 고수머리를 살랑거리며, 장하게 또박또박 걷는 모양새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일족이 아닌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강한 호의를 느끼다니?’
그는 당혹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같은 일족들이 전부 비슷한 눈으로 아나트리샤 황녀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듯.
기이한 일이다.
그보단 차라리 미하일을 저주에서 해방시켜 줄 가능성이 있는 대공녀에게 더 호의를 가져야 했다.
실제로 조금 전 대공녀 혼자 입장했을 때는, 나스카 일족 대부분이 대공녀에게 기대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황녀가 입장하자마자 상황이 바뀌었다.
나스카 일족 전체가 한 사람처럼 아나트리샤 황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일은 단 한 가지 경우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로겐은 떨리는 눈으로 유리관 속에 잠든 미하일을 보았다.
‘왕자님, 왕자님의 감정이신 겁니까?’
소년은 늘 그렇듯 대답 없이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
세실리아는 당황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분명히 자신에게 잘 보이려 노력해야 마땅한 나스카 일족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일제히 아나트리샤 황녀를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것처럼.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숨 쉬고, 걷고 있는 것만으로 기쁜 듯.
분명히 조금 전까지 세실리아는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고귀한 루비 티아라를 쓴 채, 최고로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모든 게 한순간에 망가졌다.
그저 아나트리샤 황녀가 들어온 것만으로.
‘이게 말이 돼?’
분명히 막 황제가 입장하기 시작했을 때, 세실리아는 쾌재를 불렀다.
당연했다. 황제가 자식들과, 특히, 딸과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자신에게는 분명한 청신호였다.
그런데 제 오빠인 루퍼스리안 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나트리샤가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디디기 시작하자.
상황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작은 핑크색 구두가 붉은 융단을 밟기 시작하자마자.
“하아아. 뽀짝뽀짝 잘도 걸으시다니, 감동적이야. 아장아장하실 때가 어제 같은데.”
파셀 백작이 귀부인들 사이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만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찬탄과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머, 너무 당당하고…… 귀여우세요.”
“저 드레스 우리 딸에게도 입혀 주고 싶네요. 아, 하지만 황녀님처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우실 수 있을까.”
“늘 폐하께서 끼고 도시는 것도 이해되네요.”
“맞아요. 늘 폐하의 망토에 가려서 황녀님의 귀여움을 반도, 아니, 반의반도 제대로 못 보고 있었네요.”
황자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감탄이 쏟아졌다.
“정말 열두 살이 맞으신가? 키도 크시고, 저렇게 의젓하신데.”
“여동생을 아주 아끼신다더니, 정말인가 봐요. 직접 에스코트까지 하시고.”
“어쩜. 우리 딸이 황자님을 보면 잠도 못 자겠네요.”
나스카인들이 이상할 정도로 황녀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호의 역시 큰 영향을 주었다.
아나트리샤 황녀는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작은 치맛자락에 주변의 관심과 찬사를 휩쓸어서 몰고 가 버렸다.
그녀의 것이었어야 할 것들을.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고. 증명하기도 전이다.
그런데도 세실리아는 왜 이렇게 패배감과 열등감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이상해. 말도 안 돼. 이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고!’
하지만 분명히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