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2)
세실리아가 당황과 굴욕감에 잠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황제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벨론드 대공녀 세실리아.”
“아, 어, 예! 예, 폐하!”
세실리아는 더듬더듬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큰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전혀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버렸다.
조금 전 표정을 다 수습하지 못한 것도 큰일인데.
지금 황제의 명령에 뒤늦게 대답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당황하고 동요했는지, 미숙함을 드러내 버린 것이다.
‘아, 아냐. 괜찮아. 만회하면 돼. 내 능력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세실리아는 최대한 빠르게 흔들림을 수습한 다음,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대답했다.
“폐하의 명에 따라 이 세실리아가 왔습니다.”
이 태도를 보고 실소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머. 뻔뻔, 아니지, 신경이 꽤 굵으신가 봐요. 조금 전 실수는 아예 없는 것처럼 구시네.”
“뭐, 부끄러우니 저러시겠죠. 아무리 사교계 데뷔를 하셨어도 아직 열넷. 어린 나이이신걸요.”
“사교계 데뷔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대공 전하의 욕심이 좀 크신 것 아닐까요?”
세실리아의 역량이 기대에 못 미치는 게 아냐는 의심들.
사교계에 군림하는 것이나, 더 나아가 황위를 노리기에 모자란 게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대부분 대공 일파와는 거리가 있는 친황제파들에게서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온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 흔들림은 대공 일파에 가까운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세실리아는 굴욕감을 애써 곱씹으며 미소를 유지했다.
여기서 발칵 화를 내면 더더욱 체면이 깎이게 되니까.
‘보여 주면 돼. 증명하면 돼. 충분히 가능해!’
아나트리샤는 오빠와 함께 황제의 바로 아랫단에 서서 ‘헹!’ 하고 작게 웃었다.
‘다 티 났구만. 이제 와서 쫀 적 없는 것처럼 굴어 봤자…….’
카스톨트 황제가 하문했다.
“네가 정화의 능력을 가진 것이 사실이냐?”
세실리아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우아하고 위엄있게 대답하려 했다.
황녀의 자리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건 자신이라고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었으므로.
“예, 폐하. 태양신께서 저를 축복하시어,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고개를 들어 황제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는데.
황제는 조카딸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세실리아는 당혹스러워했다.
‘뭐, 뭐야?’
공식적인 증명의 자리를 만들었을 정도로, 황제가 자신의 능력에 기대가 크다고.
세실리아는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이런 자리를 직접 만들어 주셨겠어?’
하지만 황제는 아주 조금의 다정함이나 기대감 어린 시선도 주지 않았다.
정면에서 황제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에 세실리아는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잠시 아랫단에 선 딸을 바라보는 눈빛을.
정말로 순간이었으나, 못 알아보는 게 불가능했다.
황제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식들을 보고 있었다.
황제는 아들딸을 비슷하게 다정한 눈으로 보고 있었으나, 세실리아에겐 딸을 아끼는 것이 도드라져 보였다.
‘어……?’
이상했다. 황제가 자식들과 떨어져 입장한 건 거리감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정확히는 그리 믿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소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황제는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
세실리아는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눈빛과 태도에 아주 민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가져 본 적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리아는 생부인 대공에게서도 애정이나 다정함을 느껴 본 적 없었다.
대공비는 보란 듯 자식들을 싸고돌았지만, 그건 제 욕심과 외부에 자신이 이렇게 헌신적인 어미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진심 어린 애정과 걱정, 다정함은, 부모에게서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갈구하고 있었다.
황제가 자식들을 아낀다는 소문을 듣거나, 가끔 먼 발치에서 딸을 품에서 떼어 놓지 않는 걸 볼 때면,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질투심에 시달려야 했다.
‘저런 반푼이도 받는 애정을, 나는 왜 못 받는 거지?’
세실리아가 에아루스 영애를 유달리 괴롭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현 에아루스 후작은 하나 남은 자식인 딸을 너무나도 아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딸보다 어린 세실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 남은 자식입니다. 이 아이의 고통을 덜어 주실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아픈 딸을 걱정하는 후작의 행동과 말을 막 보았을 때, 세실리아는 지독한 악의에 휩싸였다.
그리고 지금은 몇 배로 더 강렬한 악의를 느꼈다.
그녀의 프라이드는 자신이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라는 데에서 나온다.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자신보다 앞에 선 이들이 있었다.
자신은 황녀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데 저 애는 태어난 것만으로 황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존재 자체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심지어 저 아이는 어릴 때부터 모자라다는 소문만 들려왔다.
세실리아로서는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녀 자리에 더 잘 어울리는 건 나야! 저건 자격이 없어!’
부러움과 질투, 멸시와 분노가 뒤범벅되었다.
그 와중에 세실리아의 얄팍한 자존심과 우월감을 유지해 준 건 단 하나였다.
‘어차피 반푼이에 불과해. 이기는 건 나일 거야.’
그런데 순식간에 상황이 바뀌어 버렸다.
백치인 줄 알았던 황녀는 보란 듯 제 능력과 영특함을 뽐내면서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이 분노가 세실리아의 동력이 되었다.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할 거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든 저 자리를 내가 가지고 말겠어!’
세실리아는 도전적으로 아나트리샤를 올려다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세실리아는 다급하게 앞으로 달려 나왔다.
꽤 절박한 태도였다.
“폐하의 기대대로 제 능력을 보이겠어요. 제 정화 능력으로 나스카의 왕자에게 걸린 저주를 정화해 보이겠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러면 폐하, 제가 수백 년 만에 정화 능력을 가진 황족임이 증명된다면…… 폐하께선 제게 무엇을 약속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그레이트 홀 안에 당혹감이 퍼져 나갔다.
이 자리에서 세실리아가 정화 능력을 증명해 낸다면, 당연히 그녀는 유력한 황위 계승권자 중 하나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지위나 약속이 아니었다.
‘그딴 게 아니라도 난 황위 계승권 3위의 황족이야!’
당연히 그 이상의 영광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 세실리아는 그리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내 권리야!’
그러자 구석에 서 있던 대공비가 딸의 역성을 들며 나섰다.
“그렇지요. 마지막 정화 능력자는 다섯 명의 형제를 제치고 황위에 오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세실리아와 대공비는 대놓고 요구하고 있었다.
‘정화 능력을 증명하면, 세실리아를 직계 황녀로서 인정해 달라.’
―라고.
주변에 긴장감 어린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설마, 폐하께서 공녀를 황녀로 입적하실까요?”
“정화 능력이 맞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미 직계 황자 황녀께서 저리 건재하시지 않습니까.”
“맞아요. 두 분이 태양의 마력을 못 갖추신 것도 아니고요.”
의견이 분분했다.
대공은 그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볼 뿐.
황제의 입은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다.
세실리아는 긴장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이 불편한 침묵을 박살 낸 건, 어린 황녀의 더없이 귀여운 목소리였다.
똘망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그레이트 홀 안을 울렸다.
“웅? 그럼, 저 애를 고치면 쎄씨가 내 언니가 되는 거야?”
아나트리샤 황녀는 이 사안의 심각함 따윈 모른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
내 귀로 듣기에도 꽤나 가증스러운 말투였다.
아마 내 속 알맹이가 이제 거의 서른에 가까우니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몰라요, 뿌우. 리샤는 일곱 쨜.’ 모드를 유지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쎄씨, 라면?”
“세실리아 공녀를 말하는 거겠죠?”
“귀, 귀여운 발음이셔라.”
공식 석상에서 당근 꼬다리라고 말할 수가 없으니, 애칭처럼 아무렇게나 부른 것이다.
사실은 쎄씨( )라고, 뒤에 한 글자를 마음속으로만 붙여 부른 게 절대, 절대 아니다.
그 마지막 글자가 ‘발’인 것도 절대, 절대 아니었다.
그야 나는 순진한 일곱 쨜인걸, 뿌우-!
나는 손뼉을 짝짝 치며 외쳤다.
“우왕! 리샤는 언니가 갖고 싶었는데. 잘됐다!”
그러자 당근 꼬다리의 눈에 희열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마, 맞아! 그래요! 그 말대로예요.”
너무 기뻤는지 목소리까지 덜덜 떨린다.
‘성대에 지진 난 것도 아니고. 좀 진정해라.’
대공비가 은근슬쩍 제 딸 뒤로 와서 감싸 안으려 하며 말을 보탰다.
“황녀님 말씀대로예요. 우리 세실리아의 능력이 증명되면, 마땅히 그 능력에 걸맞은 지위가 약속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황녀께서 바라시는 대로요.”
아줌마의 궤변은 아주 대단했다.
순식간에 당근 꼬다리의 황녀 책봉을 내가 주장한 것처럼 말을 교묘하게 바꿨다.
그러자 피오나 이모를 비롯한 우리와 친한 이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폐, 폐하! 정화 능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직계 황자 황녀께서 이리 총명하고 능력이 출중하십니다. 굳이 방계 황족을 황녀로 책봉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피오나 이모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애썼다. 그 밖에 우리와 가까운 이들이 이모 편을 들었다.
“맞습니다! 그래도 직계는 직계고, 방계는 방계지요!”
“세실리아 대공녀께서 아직 능력을 증명하신 것도 아닌데, 논의 자체가 너무 이릅니다!”
내가 멋모르고 실수했다고 여기고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하려는 것이다.
‘그럴 필요 없는데, 이모.’
당연히 일부러 이런 거니까.
그러니까 아빠랑 오빠도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피오나 이모와 몇몇 사람들이 날 말리려 해 준 건 더 좋은 연출이 되었다.
‘내가 진짜 실수한 걸로 보일 테니까.’
그래서 난 계속 ‘리샤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하생략)’ 모드를 유지하려 했다.
옆에서 오빠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리샤. 오빠만으론 부족해서 언니까지 필요한 거야?”
아빠 아들놈은 비 오는 날 ‘주워 가 주세요’라고 써진 박스에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을 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리샤가 이런 소리를 하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아빠 아들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