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3)
‘뭐라는 거야, 미친X아!’
―라는 말은 당연히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나한테만 들리게 말하면 상관없는데, 저 아래까지 다 들릴 크기였다.
덕분에 사람들이 당황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황자 전하께서 뭐라고 하신 거죠?”
“분명히…….”
다들 자기가 뭘 들은 건가 의심스러워하는 와중에, 아빠 아들놈은 헛소리를 더 이었다.
“그냥 오빠랑만 놀자, 리샤. 내가 드레스 입어도 쟤보단 더 예쁠 거야.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아니, 드레스 입으면 당근 꼬다리보다 오빠가 예쁜 건 당연하겠지,’
지금 그대로도 오빠는 당근 꼬다리보다 훨씬 예뻤다. 엄마를 그대로 닮았으니까.
……가 아니지! 이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야!
‘야! 안서운! 아니, 루퍼스리안!’
―이라는 비명은 이번에도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전생 이름 부르기도 그렇고, 여기서 내가 맞장구치면 더 이상해지니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빠 놈의 멱살을 잡고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에 안 들리게 결계를 치는 것도 잊지 않고.
소곤소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계획 망칠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니면 뭐야!”
오빠 놈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리샤가 저걸 언니라고 부르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리샤가 오빠나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나뿐인데!”
이 답 없는 아빠 아들놈을 어쩌면 좋을까.
전생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2회 차 때 뭔가를 잘못했나.
……아냐. 아무리 고민해도 내 잘못은 없다. 그냥 아빠 아들놈 혼자 문제인 거지.
나는 다시 필살기를 썼다.
“자꾸 이렇게 방해하면.”
“……방해하면?”
오빠는 불길함을 느꼈는지 표정이 굳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내 궁 출입 금지시킬 거야.”
“……!”
오빠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내 필살기는 아주 효과가 좋았다.
“리샤가 한 말은 무조건 옳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오빠는 조신하게 물러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리 편 저쪽 편을 막론하고 다들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방금 황녀 전하께서 안아 주시니까 바로 설득되신 거죠?”
안아 줬다고? 그렇게 보였나?
난 그냥 멱살을 잡았을 뿐인데.
“정말로 동생을 예뻐하시나 보네요.”
“참으로 의가 좋으신 남매시군요.”
“하지만 이대로면 대공녀께서…….”
당근 꼬다리 모녀는 좀 당황한 것 같았다.
오빠의 인신공격(?)에 이어, 내가 그런 오빠를 설득해 준 상황이 되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헷갈리겠지.
대공비는 애써 당혹감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황자 황녀 두 분 모두 찬성하신다는 말이지요? 세실리아의 황녀 책봉을요.”
은근슬쩍 확정 지으려 드는 대공비의 눈에 욕심이 가득했다.
나는 단호하게 잘랐다.
“쎄씨…가 정화 능력으로 저 애를 고치는 걸 증명할 때 얘기지!”
나는 옥좌의 계단 아래 놓인 관을 가리켰다.
황족들 사이의 암투와 광기 어린 주접(?)에 잠시 잊혀 있던 나스카의 왕자.
사실상 오늘의 가장 중요한 조연.
미하일은 여전히 고요하고 예쁘게 잠들어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뜨고 나에게 다가와 전생에서처럼 장난기 어린 농담을 건넬 듯한 모습.
내가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그.
잠시 미하일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사이.
당근 꼬다리가 정신을 차렸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요. 제 정화 능력은 진짜니까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아빠한테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폐하의 허락에 깊이 감읍하옵니다. 이 세실리아,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아빠가 입을 열어 허락한 것도 아닌데 내가 편들어 주었다는 건 아예 무시하는 태도였다.
별로 빈정 상하진 않았다.
‘어차피 함정인걸.’
하지만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면 쎄씨…가 실패하면 뭘 줄 거야?”
“……뭐?”
당근 꼬다리의 파란 눈이 커다래졌다.
나는 조금 전까지 유지하던 ‘리샤는 아무것도 몰라요 (이하생략)’ 모드를 치웠다.
그리고 최대한 사악한 미소를 지은 채, 보란 듯 팔짱을 꼈다.
이제는 팔이 제법 길어져서 팔짱다운 팔짱을 낄 수 있었다.
‘아냐, 이걸로는 모자라.’
그래서 나는 마력을 방출해서 팔랑팔랑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빠의 무릎 위에 앉았다. 아, 역시 내 전용석(?)의 쿠션감은 최고야.
아빠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아주 시건방지게 다리를 꼬며 연이어 말했다.
“쎄씨…는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냐? 얻는 게 있으면 그만큼 내놓는 것도 있어야지.”
조금 전의 ‘아무것도 몰라요’ 말투와는 전혀 다른 말투. 시건방 그 자체인 말투.
전생에도 적들이 들으면 화가 나서 복장이 터져 죽으려 했던 말투였다.
몬스터나 마족을 대할 때도 유효했던 거다. 지금도 당연히 효과가 있었다.
“아니면 모자란 거야?”
갸웃.
내 말에 당근 꼬다리의 표정에 쩍, 하고 금이 갔다.
“뭐, 라고?”
나는 조금 전의 사악함은 다 잊어버린 것처럼, 순진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서 작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었다. 숫자도 겨우 세는 어린아이처럼.
“하나아, 두울…… 일고옵.”
음, 좀 내숭이 과했나?
……아니었다.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허억! 너무, 너무 귀여우셔!”
“리, 리샤. 오빠 나이도 세 줘. 응? 으응?”
어쨌든 일곱쨜로 보였다는 건 잘 알겠군.
나는 오빠 놈의 주접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겨우 일곱 살인 리샤도 아는 걸, 엄청 나이 많은 쎄씨가 모를 리 없잖아.”
나는 해맑게 웃으며 어퍼컷을 날렸다.
“쎄씨 혹시 바보야? 난 언니 갖고 싶긴 한데, 바보 언니는 싫어.”
퍽!
이런 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타격이 당근 꼬다리에게 들어갔음은 분명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힘이 엄청나게 들어간 게 보였으니까.
“쎄씨가 성공했을 때 얻는 게 황녀 자리라면, 실패했을 때도 비슷한 걸 대가로 내놔야지.”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가 기본 아닌가. 아무리 환생했어도 이건 바뀌지 않는다.
“그게, 무슨!”
당근 꼬다리와 대공비가 파르르 떠는 걸 보며,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런 각오도 없이 내 언니 자리를 노린 거야?”
최대한 화가 나고 속이 터지는 말만 골라서 해댔다.
절대 쟤한테 빈정 상해서 이런 게 아니다. 절대!
이번엔 오빠가 제대로 추임새를 넣었다.
“당연히 굳은 각오를 하고 치를 수 있는 모든 대가를 내놔야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리샤의 언니 자리를 원하면서 말이다.”
어째 황녀 자리보다 내 언니 자리인 게 더 중요하다는 것 같은 느낌인데.
뭐, 상관없겠지.
그리고 내 신호에 마침내 아빠가 입을 열었다.
“황녀와 황자의 말이 맞군. 대공녀가 황녀의 지위를 원하여 능력을 증명하겠다면, 증명하지 못 했을 경우에 포기할 것 역시 있어야 할 것이다.”
대공비가 외쳤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설사 실패한다 해도, 세실리아가 태양의 서에 이름을 올린 황족임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인데요!”
그러자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태양석을 빛나게 하고,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지. 그리고 황족의 ‘능력 증명’에서 패자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다.”
‘능력 증명’은 루스템 황족이 자신의 마력을 증명하는 모든 방법을 말한다.
그리고 황족끼리 마력을 겨루어 승패를 가르는 의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증명에서 패배한 이는 모든 걸 잃었다.
황위 계승권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황위를 다툴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증명’을 포기하면 될 일.
이는 루스템 황족의 불문율이었다.
몇 년 전, 당근 꼬다리의 오빠 콩나물 대가리가 쫓겨난 이유도 이 ‘능력 증명’의 불문율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오빠에게 박살 나서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으로, 황위 계승권을 잃었다고 처분된 것이다.
대공비는 당연히 항의했다.
“이번에는 황족끼리 마력을 겨루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으응? 그치만 정화 능력을 증명하고 황녀의 지위를 받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황족끼리의 능력 겨루기보다 더 큰 능력 증명 아니에요?”
“내 딸은 역시 영특하군.”
아빠는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당근 꼬다리의 눈빛에서 불이 튀었다.
질투로 이글거리는 당근 꼬다리의 파란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내 거야! 내 거여야 해!’
그리고 그사이 <궁예> 스킬의 부가 효과가 다시 켜져서, 당근 꼬다리의 생각을 솔직하게 알려 주고 있었다.
아주 겉과 속이 같았다.
나는 보란 듯 아빠의 손에 내 뺨을 부비면서, ‘데헷!’하고 웃었다.
‘더 질투해! 더 분노하라고! 케헤헤!’
그래야 이성을 잃고 덫으로 달려들지.
아빠는 내게 모두가 들으란 듯 물었다.
“그러면 대공녀가 실패할 경우, 어떤 대가를 받으면 될 것 같으냐? 아가?”
그러자 나는 골똘히 고민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오빠 놈이 심장을 부여잡는 소리가 들렸다.
“허윽! 역시 안 돼! 너무 귀여운 리샤의 언니 자리에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어! 내가 언니도 할 거야!”
나는 오빠의 헛소리를 못 들은 척 무시하다가 아빠에게 다시 물었다.
“성공할 경우 황녀가 되는 거니까, 실패하면 내놓아야 할 것도 비슷해야겠죠?”
“그렇겠지. 역시 내 딸의 이해력은 대단하구나.”
“그러고 보니까 황위 계승권을 받은 황족은 금광을 받는다고 들었어요. 맞나요?”
“일곱 살 생일에 계승권을 받은 황족은 금광에 관한 권리를 받는단다. 너도 곧 받게 되겠구나.”
당근 꼬다리와 대공비, 이번에는 대공의 안색까지 하얗게 질렸다.
당근 꼬다리 몫의 금광은 대공가의 유일한 자금줄일 것이다.
그때였다. 오빠 놈의 아주 적절한 서포트가 들어왔다.
“그러면 대공녀가 실패할 경우 금광을 내놓으면 되겠군요.”
나이스!
금광 고마워, 당근 꼬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