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2. 메인 퀘스트 : 쭉정이는 가라 (05)
내 <궁예> 스킬로도 현재 미하일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이름만 보이는 게 전부니까.
지금까지 <궁예> 스킬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미하일이 유일하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놈의 정보가 다 깨져서 뜬다고 해도,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 미하일이 눈뜨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저주가 아니다.
‘아우라가 아예 안 보이니까.’
내가 보는 아우라는 타인의 마력 흐름이다.
그리고 마력은 곧 생명체의 생명력 그 자체.
일반적으로 마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일반인조차 생명력에 해당하는 마력은 품고 있었다.
사람만이 아니라 작은 벌레나 풀 한 포기에도 생명을 유지시키는 마력은 존재했다.
내 눈은 그걸 볼 수 있는 힘.
놈이 마왕 소환의 매개체였다는 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전생의 마왕이 내뿜던 압도적이고 절망적인 아우라도 이미 본 적 있으니까.
지금 미하일에게서 아우라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건 곧 이런 의미였다.
‘마력이 전혀 없다는 거야. 생명을 유지시킬 만한 마력조차.’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몸 안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놈의 몸 안에 마력을 흡수해 가는 구멍이 뚫려 있기라도 하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전생에도 본 적 없는 현상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그러자, 나를 다시 재촉하듯 시스템 메시지가 끔뻑거렸다.
[당신의 맹세를 잊지 마십시오.]
빨리 놈을 죽이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2회 차의 시스템은 미하일에게 꽤나 유감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도 죄수들의 오물처리로 고생 중일 다브네스 후작 부인조차 살리라고 했던 시스템인데.
‘근데 왜 저놈은 굳이 죽이라고 난리야?’
꼭 안 죽이면 다시 비극이 일어나기라도 할 것처럼…….
“…….”
이런 생각이 드니까 역시 당장 죽여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마왕은 놈의 육신을 통해 지구에 소환되었다.
이번 생에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란 법이 있나?
시스템이 미하일을 콕 집어 죽이라고 하는 이유도 그 외엔 떠올릴 수 없다.
‘역시 죽일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미하일은 어린아이라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져 있으니까.
내가 잠시 답지 않게 고민에 빠져 망설이는 사이.
상황이 웃기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세실리아가 마력을 펼치고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 두어 잔은 넉넉히 마실 만한 시간.
세실리아가 펼친 정화의 마력이 정말로 저주를 정화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기다린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소곤거리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전혀 차도가 없는 것 같죠?”
“나스카의 왕자가 눈을 뜬 것도 아니고, 안색이 좋아진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아요.”
당연히 세실리아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쏟아졌다.
“정말 정화의 마력을 가진 게 맞는 걸까요?”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긴 하지만…….”
“하지만 우리 딸이 직접 봤다고 했어요. 대공녀가 에아루스 영애의 저주를 정화하는 장면을요.”
그 증거로, 에아루스 영애는 창백한 얼굴로 여전히 세실리아의 뒤에 서 있었다.
저주 때문에 고통받느라 건강이 안 좋은 데다, 그동안 세실리아가 너무 무리시킨 여파인지 안색이 안 좋고 얼굴이 땀에 젖어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실리아는 지금 에아루스 영애의 상태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일생일대의 궁지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왜, 왜 안 일어나는 거야?’
세실리아가 꿈꾼 상황은 이런 게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했으면,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그래서 나에게 은혜를 갚아야지!’
이렇게까지 온 힘을 다해 정화의 마력을 써 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에아루스 영애에게는 써 준 적 없는 강도의 힘이었다. 저주를 정화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종처럼 부리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왜 나스카의 왕자는 일어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를 부축하고 있던 나스카의 장로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역시 루스템 황족의 힘으로도 우리 왕자님을 구하는 건 무리인 건가…….”
그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비통했다.
일족의 유일한 희망이 꺼져 버린 상황.
노인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타인이라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실리아에게는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다.
‘지금, 날 비난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 희생해 줬는데, 제대로 된 감사의 표시도 없이 비난이나 하다니!
세실리아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그녀는 노인의 손을 뿌리치고 나스카의 왕자에게 달려갔다.
“어서! 어서 일어나! 일어나라고!”
소년이 잠든 관을 덮은 유리 뚜껑이 덜컹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난 분명히 저주를 정화했어! 어서 일어나란 말이야!”
장로를 비롯한 나스카 일족은 당황하고 또한 분노했다.
“이 무슨 짓입니까!”
“우리 나스카의 고귀한 왕자님께 무슨 무례를……!”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로 고생해 온 분입니다! 놓으세요!”
조금 전 마력을 무리해서 써 버린 세실리아는 나스카인들의 손에 쉽게 밀려났다.
“왕자님께 가까이 오지 마!”
나스카인들은 세실리아로부터 미하일을 지키려는 듯 벽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떠밀린 세실리아는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덕분에 옷이 다 구겨지고, 곱게 땋은 머리카락이 다 헝클어졌다. 붉은 루비가 박힌 티아라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세실리아는 치를 떨었다.
“이 은혜도 모르는 것들!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이따위로 갚아?”
저주를 풀어달라던 때에는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굴더니, 지금은 감히 황족인 그녀에게 폭행을 가한 것이다.
세실리아는 억울하다는 듯 외치며 고개를 돌렸다.
“폐하! 이 무도한 자들을 보셨……!”
그때 세실리아의 눈에 ‘누군가’가 보였다.
금빛 황제의 옥좌 위. 황제의 무릎 위에 앉아 그녀를 비웃으며 굽어보고 있는, 밉살스러운 아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고 권력이 넘치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었다.
반달처럼 접힌 눈매 사이에서, 청보라색 눈동자가 유달리 빛났다.
아나트리샤의 자그마한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그 입술이 낸 소리는 주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세실리아에게만 들렸다.
-멍청한 당근 꼬다리.
-그건 저주가 아냐. 진짜 저주라도 네 쥐꼬리만 한 정화 마력으론 턱도 없었겠지만.
몇 년 사이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사일런트 메시지>라는 스킬의 효과였지만, 세실리아가 알 리 없었다.
원래는 파티원끼리 비밀리에 의사 교환을 하기 위해 쓰는 스킬이었지만, 아나트리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
세실리아를 비웃기 위해.
수치심과 모멸감,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나 세실리아의 이성을 다 태워 버렸다.
“이건 음모예요!”
그렇다. 자신이 실패했을 리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누군가의 음모가 아니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세실리아는 아나트리샤 황녀를 가리키며 외쳤다.
“방금 다들 들었죠? 황녀가 제게 폭언하는 걸 들으셨죠? 황녀가 나스카인들과 작당하고 절 함정에 빠트린 거예요!”
그 말에 갑자기 홀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
“…….”
“…….”
하지만 세실리아의 기대와 달리 그녀의 말을 긍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번엔 대공비마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세실리아? 황녀가 무슨 말을 했다고.”
“네? 어머니야말로 무슨 헛소리세요. 방금 황녀가 저에게 멍…청하다고 폭언을 했잖아요! 그 큰 소리를 못 들으셨다고요?”
대공비는 입술을 짓씹다가 말했다.
“……황녀, 께선 아무 말도 안 했어.”
나스카의 장로가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다.
“대공녀께선 능력에 맞지 않는 시도를 하셨다가 기력이 쇠하신 모양이군요.”
턱도 없는 힘으로 용쓰다가 헛소리를 들었냐는 말을 곱게 돌려 한 것이다.
“그럴, 그럴 리가!”
“그리고 우리가 어째서 루스템의 황녀님과 작당하여 대공녀를 모함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대공녀든 황녀님이든, 황제 폐하시든, 왕자님을 구해 주시기만 하면 누구이든 감사할 뿐이오. 설사 거지라 해도 무릎 꿇고 간청할 것이오만…….”
세실리아의 귀에 이 말은 ‘넌 거지보다 못해.’라고 들렸다.
모욕감과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세실리아는 획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니야! 난 분명히 정화의 마력이 있어! 그래, 에아루스 영애! 어서 증언해요! 주인인 내 명예를 지켜 줘야……!”
그 순간.
에아루스 영애는 그대로 쓰러졌다.
“에아루스 영애!”
“꺄악! 누가 의사를 불러요!”
조금 전 세실리아의 오버 액션과는 명백하게 다른, 분명한 실신이었다.
지나치게 쇠약해진 데다, 눈앞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던 세실리아의 무능력이 까발려지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세실리아의 추태. 나스카인들의 분노. 주변의 당황.
거기에 에아루스 영애가 기절하며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다.
그때였다. 아무도 예상 못 한 이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작은 몸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언니!”
아나트리샤 황녀가 붕 하고 날아올라 쓰러진 에아루스 영애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눈부신 빛이 황녀의 작은 몸에서부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견 성스러워 보일 정도로 밝고 또 강력한 빛이었다.
다들 빛에 에워싸인 황녀와 에아루스 영애를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다른 이상을 눈치챘다.
“헉! 태양석이 빛나고 있어!”
오늘 두 번째로 태양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처음 세실리아로 인해 빛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빛이었다.
아나트리샤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외쳤다.
‘빛나라, 사이키 조명!’